노비종부법 ()

목차
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제도
양인남자(良人男子)와 천인처첩(賤人妻妾) 사이의 자녀에게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법.
이칭
이칭
종부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양인남자(良人男子)와 천인처첩(賤人妻妾) 사이의 자녀에게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법.
내용

고려시대 이래 전통적으로 천인의 혼인은 동색혼(同色婚)만 인정하고 양천교혼(良賤交婚)은 금지하였으며, 이 경우 소생은 모두 천인계를 따라 천인신분으로 규정하였다. 그 결과, 양역(良役) 부담자인 양인의 수가 갈수록 감소되자 조선 건국 초부터 국방정책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대책이 빈번히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남존여비 · 일부다처제의 유교적 가족관 아래, 양인 또는 사대부의 비첩(婢妾) 소생이 다수인 점에 착안하여 이들을 종량(從良)시키기 위하여 1414년(태종 14)부터 양인의 비처첩소생에 대하여 실시한 것이다.

그 뒤 실시에 따른 여러가지 폐단 때문에 실시 여부를 놓고 논란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1432년(세종 14)에는 이를 폐지하고 종모법(從母法)으로 환원시켰으나, 세조 때는 예외규정으로 동서반유품관(東西班流品官) · 문무과 출신 · 생원 · 성중관(成衆官) · 유음자손(有蔭子孫)과 양인 가운데 40세 이상으로 자손이 없는 자의 천첩소생은 그대로 실시되었다.

또한 『경국대전』에는 특수한 신분층의 천첩소생에게 예외로 속신(贖身)을 규정하였으며, 양녀(良女)로서 노처(奴妻)가 되었을 경우, 그 소생은 종부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노비종모법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초기(朝鮮初期) 노비(奴婢)의 종모법(從母法)과 종부법(從父法)」(이성무, 『역사학보(歷史學報)』115, 1987)
「조선초기(朝鮮初期) 노비(奴婢)의 종모법(從母法)과 종부법(從父法)」(이성무, 『역사학보(歷史學報)』115, 1987)
「조선시대(朝鮮時代) 노비(奴婢)의 신분적(身分的) 지위(地位)」(이성무, 『한국학보(韓國學報)』9, 1987)
「조선초기노비고(朝鮮初期奴婢考)-노비종부(奴婢從父)·종모법(從母法) 중심(中心)으로-」(문수홍, 『성균관대학교대학원논문집(成均館大學校大學院論文集)』, 1967)
「高麗末期より朝鮮初期に至る奴婢の硏究」(周藤吉之, 『歷史學硏究』9, 1939)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