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인 ()

조선시대사
제도
근대 이전에 국역을 수행할 의무와 이에 대응되는 권리를 가진 평민 계층.
이칭
이칭
평민(平民), 서인(庶人), 공민(公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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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양인은 근대 이전에 국역을 수행할 의무와 이에 대응되는 권리를 가진 평민 계층이다. 국역을 수행할 수 없는 천인(賤人)에 대조되는 계층이었다. 중국의 영향 아래에서 고대 이래 전체 인민을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전통이 있었다. 중국의 율령체제를 국가의 주요 운영 구조로 설정하였던 통일신라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은 국가적 신분규범인 양천제(良賤制)의 기반 아래 양인들을 공민(公民)으로 동원하는 국역체제(國役體制)를 운영하고 유지하였다.

정의
근대 이전에 국역을 수행할 의무와 이에 대응되는 권리를 가진 평민 계층.
중국 고대의 사회 계층과 평민층

고대 이래 중국은 왕(혹은 황제), 관인층(官人層), 평민층(平民層)으로 구성된 사회였다. 천명(天命)의 수권자(授權者)를 자임하는 왕이 천하를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백성(百姓)으로 통칭되는 평민층을 다스렸는데,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치자(治者), 곧 관인층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중국 사회는 국왕을 하나의 층위로, 관인을 다른 하나의 층위로, 그리고 평민층을 또 다른 층위로 하는 사회였다.

평민층은 사인(士人), 농민(農民), 공인(工人), 상인(商人) 등 4개의 범주에 속해 있다고 보았는데, 이런 인식에서 사민(四民)이라는 구분이 생겨났다. 사민 가운데는 관인층이 되고자 교육을 받는 사인이 가장 우대를 받았고, 농민이 그다음의 지위를 누렸으며, 공인과 상인은 농업적 질서와 체제를 해칠 수 있는 위험 요인이라는 점에서 낮게 평가받았다.

천하의 패권을 둘러싼 군웅들의 할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서기전 770년~서기전 403년)에 이르러, 주(周)나라 이전 시기의 사회 질서인 봉건제(封建制)가 무너지면서 관인층의 사회 경제적 영향력이 점차 커져 갔다. 그에 반비례해서 평민층은 점점 더 몰락하여, 극심한 사회 양극화 현상이 초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전 7세기 관중(管仲) 같은 정치가는 평민층, 곧 사민층(四民層)의 보호와 안정을 위해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국시대(서기전 403년~서기전 221년)로 접어들면서 통치자 집단의 발호와 평민층의 몰락은 더욱 가속되었다.

새로운 사회 세력에 의해 사회가 급속하게 재편되고 새로운 패자(霸者)가 출현하는 혁명적인 상황이 전개되면서, 서기전 4세기~서기전 3세기 법가(法家) 계통의 사상가와 정치가들은 통치자와 평민층 사이에 놓여 있는 다양한 중간 계층을 제거하고 세습적 봉건 귀족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모든 권력이 절대적 통치자, 곧 천하의 패자에게 집중되는 통일국가의 수립이었다.

이러한 목표의 실현을 위해 이들은 모든 백성은 통치자의 신민(臣民)으로서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리 속에 사민(四民)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피지배층으로 재확인되었다.

평민으로 통칭되는 피지배층은 서인(庶人), 양인(良人)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피지배층과 관련한 용어들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는데, 서주(西周) 시대(서기전 1046년서기전 771년) 이래 중국 역대 왕조가 공민(公民)을 지칭하는 용어는 평민 혹은 서인이었다. 이들을 양인(良人)으로 부른 것은 양천제(良賤制)가 확립된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471499) 이후였다.

양인이라는 용어는 후한(後漢) 말기에 출현하였는데, 이때에는 당대 지배세력이었던 호족(豪族)들의 지배 아래 있던 노(奴)나라를 의식하여 그것에 대립되는 용어로 사용될 뿐이었다. 이후 수당(隋唐)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체제(律令體制)가 확립됨에 따라, 공민은 일원적으로 양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중국의 율령제도

중국의 율령제도는 왕토(王土) · 왕민사상(王民思想)에 기초하여 모든 신민을 편호제민(編戶齊民)시키고, 이들에게 일정 크기의 토지를 지급하거나〔균전(均田)〕, 민전(民田)의 소유권을 허용해 줌으로써〔명전(名田)〕, 국가 운영에 필요한 각종 세원을 납부할 수 있는 공민을 확보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조 · 용 · 조(租庸調) 3세(稅)’로 표상되는 이러한 세원을 납부할 수 있는 공민을 양인(良人)이라 불렀다. 이들은 부병제적(府兵制的) 국방 체제 아래 군역에 종사하는 국방력의 핵심 자원이기도 하였다. 국가는 국가 운영의 근간이자 국방력의 중추인 이들에게 교육받을 기회,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와 같은 공민층의 권리, 곧 ‘사환권(仕宦權)’을 보장해 주었다.

그렇지만 모든 계층이 편호제민(編戶齊民)과 균전 · 명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조 · 용 · 조 3세’ 및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무수한 계층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체로 비자립적 경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 곧 국역(國役)을 수행하는 양인층의 경제력을 보완해 주는 보조 인력으로 간주되었다. 공민의 지배를 받는 예속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이들은 사민(私民) 혹은 천인(賤人)이라 불렸다.

공 · 상층(工商層)도 조 · 용 · 조 3세와 군역 의무에서 제외되었다. 직업상 공전(公田)의 지급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양인 신분이면서도 직업상 천역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으로 분류되었다. 준(準) 천인적 지위를 가진 이들은 사환권을 향유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국역 수행 여부와 관련하여 전체 인민을 공민(公民)과 사민(私民), 혹은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국가의 인민 편제 방식을 양천제라 부른다.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 양천제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율령체제는 당대(唐代)에 완성되었다. 이후 중국의 율령제도는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 제국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주변 제국들은 중국으로부터 율령제도를 수용함으로써 고대국가 체제로의 변신을 꾀하는 등, 국가 운영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7세기 중 · 후반 한국의 통일신라, 일본의 다이카〔大化〕 시대의 율령체제는 바로 이러한 동아시아의 세계사적 조건 아래 출현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당 왕조 초기의 짧은 기간 동안 절정에 달한 중국의 율령체제는 당나라 중기(8세기 중반) 이후 급속하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방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당나라 후기와 5대 10국(907~979년) 시대에 이르러 율령체제는 마침내 소멸되었다. 그 뒤를 이은 송(宋) 왕조는 율령체제의 회복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자연히 율령체제의 근간이 되는 균전제와 부병제, 그리고 양천제와 같은 제도들도 도입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전(公田) 지급에 대한 반대급부 차원에서 군역을 수행하던 부병(府兵)의 존재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송대 이후 중국 사회는 관료와 평민, 그리고 천역 종사자 사이의 계선이 점차 불명확해져 갔다. 노비 같은 천인을 제외한다면, 어느 계층이나 과거를 통해서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 아래 어느 계층이나 할 것 없이 축재와 교육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중국 사회는 신분적 구속력이 약해지는 사회적 추세에 반비례해서, 계층 이동이 매우 활발한 사회로 점차 변모해 갔는데, 이런 움직임은 명 · 청(明淸) 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율령제도의 수용과 양천제의 운영

삼국시대 우리나라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전체 인민을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전통이 있었다. 『삼국사기』 진흥왕 23년(562)의 기사에 양인이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데서 그런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나라에서 완성된 율령체제가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였다. 687년(신문왕 7)에 문 · 무 관료들에게 차등 있게 지급하였다는 관료전(官僚田), 755년경 서원경(西原京, 오늘날 청주) 인근 4개 마을의 상황을 기록한 민정문서(民政文書)에서 남자를 연령 기준으로 6등급으로 나누고, 인정(人丁)의 다소에 따라 가호를 9등급으로 나눈 것 등은 율령체제 아래 수전제도(授田制度)의 흔적이었다.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던 고려도 당나라의 율령체제를 모범으로 하는 국가 운영체제를 확립하였다. 토지제도로서의 전시과(田柴科), 군사제도로서의 부병제의 실시 같은 조처는 고려가 율령체제에 기초하여 국가를 운영하였음을 보여준다.

양안(量案)호적(戶籍)을 작성하여 토지를 등록하고 인민을 편제하는 기초는 양천제였다. 고려는 양천제에 기반하여 토지 분급이라는 형식을 취하고(전시과), 그것에 기반하여 부세를 부과하였으며(조 · 용 · 조 3세), 부병제의 형식으로 군인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해 갔다.

고려를 이어 건국한 조선 또한 양천제에 기초한 국역체제(國役體制)를 기반으로 국가 시스템을 운영해 나갔다. 그로 인해 율령체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양천제는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도 그 기능이 약화되지 않았다. 양천제는 도리어 조선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사 · 농층(士農層)에게만 사환권(仕宦權)을 부여하거나,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양인 상층’에게만 군호(軍戶) 직을 개방하거나, 공 · 상층(工商層)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해서 천시하는 조선 왕조의 사회 구조는 이러한 상황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국가 운영 구조

초기 조선 왕조의 핵심 과제는 신민(臣民)에 대한 균등한 의무와 권리를 강조하고, 지배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실시였다. 왕조 초기의 주요 정책 기조는 국가적 평등 사회의 유지에 초점이 모아졌던 것이다.

이 시기 국가는 크게 3가지 핵심 장치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첫째는 제민정책(齊民政策)이었다. 제민정책은 국가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은 모두 동등하다는 입장에서 국가가 주기적으로 작성하는 호적에 인민을 편제시키는, 이른바 편호제민(編戶齊民)을 이상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모두 동등하다는 생각은 현실 사회에서는 실현되지 않는 관념에 지나지 않았다. 농장(農庄)으로 대표되는 지주제가 사회의 불안 요소가 될 정도로 발달하였는가 하면, 지배 · 피지배 신분층에 대한 구분 의식이 사회 전반에 걸쳐 심화되고 있었던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균등’의 최소 기준으로 국가에 대한 납세 의무인 ‘조 · 용 · 조 3세’의 담당 유무를 제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두 번째 국가 운영 원리는 국역체제였다. 국역체제란 ‘조 · 용 · 조 3세’를 부담하는 납세자에 대해서 국가 운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권리를 제공하는 장치였다. 따라서 제민정책은 국역체제를 통해서만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었다.

세 번째 원리는 양천제였다. 국가는 국역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인으로,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천인으로 구분하고, 양인에 대해서는 군역이나 교육, 그리고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제반 권리, 곧 사환권(仕宦權)을 부여해 주었다. 양천제는 국가의 포괄적인 인민 편제 방식이었던 셈이다.

국가는 이처럼 양인층을 대상으로 국역체제를 운영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제민정책을 실현해 나갔다. 국가 정책은 어디까지나 납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 양인층에게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여기에서 제외된 천인층은 국가 기관이나 양인층에게 예속되어 물건과 마찬가지로 매매, 증여, 상속되는 일종의 ‘말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천인층이 전체 인구에서 최소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15세기 조선 왕조는 매우 협애한 합리성이 허용되고 통용되는 사회였다.

주변 제국과 비교할 때,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존속하였던 양천제의 끈질긴 생명력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중국은 8세기 중반 무렵에 이르러 율령제도의 작동이 중지되었다.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율령제도를 도입하였던 일본 또한 2세기가 채 지나지 않은 9세기 중반에 이르러 양천제 규정은 사문화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한국은 몇 차례의 해체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천제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오뚝이처럼 부활하곤 하였다. 부활할 때마다 그 형태는 이론적으로나 실재에 있어서나 한층 더 이상적 형태에 가깝게 재구성되었다.

이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던 한국의 양천제는 16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해체될 징조를 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17세기 전반에 이르러 마침내 역사적 기능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 사회는 ‘사족 지배 구조’라는 새로운 사회 구조가 양천제를 대신해서 출현하게 되었다. 이 구조 아래에서 사회 계층은 지배층인 사족(士族) 혹은 양반(兩班)과 피지배층인 상민(常民)으로 양분되었다. 정부가 사족을 지배층으로 공인하게 됨에 따라, 하층 양인, 공 · 상인, 신량역천층, 노비를 포함한 모든 피지배층은 이제 상민 혹은 상놈〔常漢〕으로 불려졌다. 17세기 전반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국가적 신분 규범인 양천제를 대신해서 사회적 신분 관념인 반상제(班常制)가 신분 구조로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성우, 『조선 중기 국가와 사족』(역사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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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록 외 역, 『중국 과거제도의 사회사적 연구』(동국대학교 출판부, 1987)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경제연구』(을유문화사, 1983)
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일조각, 1980)
김석형,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과학원출판사, 1957)

논문

김성우, 「조선시대의 신분구조, 변화, 그리고 전망」(『동아시아 근세사회의 비교』, 혜안, 2006)
김유철, 「균전제와 균전체제」(『강좌 중국사 II』, 지식산업사, 1989)
신성곤, 「당송변혁기론」(『강좌 중국사 III』,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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