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근대 이전, 사 · 농 · 공 · 상의 네 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평민 계층.
중국 고대 사회의 평민층
중국 역사에서 사 · 농 · 공 · 상이 서로 동등하다고 인식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고대 이래 중국 사회에서는 관인층, 곧 관료가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사인은 관료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연마한다는 점에서, 관인층보다는 지위가 낮았지만 평민층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다음 순위는 농민, 그리고 공인, 상인 순이었다. 공인과 상인을 농민 아래 둔 까닭은 전근대 역대 중국 왕조의 주요 정책 기조인 ‘숭농억상(崇農抑商) 정책’과 관련이 있다.
농업 경제를 위주로 사회를 운영해 나간 중국은 중농주의(重農主義)에 기초한 경제 구조와 사회 체제를 방해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공업과 상업의 발전을 경계하고 억압하였다. 중국 역대 왕조가 사(士)와 농(農) 계층에게 우호적이었던 반면, 공 · 상(工商) 계층에게는 차별적인 조처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피지배층의 용례
정부가 공민을 양인(良人)으로 부른 것은 양천제(良賤制)가 확립된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471~499) 이후였다. 수당(隋唐)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체제(律令體制)가 확립됨에 따라 전체 인민을 양천으로 구분하여 편제하는 양천제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후 중국 역사에서 공민은 양인이라는 명칭으로 더 널리 사용되었고, 공민 자격이 부여되지 않은 사민(私民)은 천인(賤人)으로 불렸다.
한국의 사민관(四民觀)과 사민 편제 방식
정부는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공민층을 양인으로, 국역을 부담할 수 없는 자들, 곧 사민층(私民層)은 천인(賤人)으로 구분하였다. 이후 사 · 농 · 공 · 상 4개의 직업군으로 분류된 공민들은 국역체제(國役體制) 운영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사민 가운데 사인과 농민을 중시한 반면, 중농주의를 훼손할 수 있는 공인과 상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 제도적 차별 장치를 마련해 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인은 사인과 농민이 중심이 되었고, 공인과 상인은 “신분은 양인이되 직업은 천하다.”는 이유로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으로 분류되어 공민으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이들은 교육, 지역 사회 참여, 관직 수행과 같은 공민들의 보편적인 권리를 향유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 한영우, 『유수원 – 꿈과 반역의 실학자』(지식산업사, 2007)
- 하병태, 『중국 과거제도의 사회사적 연구』(동국대학교출판부, 1988)
논문
- 김성우, 「조선시대 사회구조의 변화와 농암 유수원의 신분제 개혁론」(『한국사연구휘보』 167, 사람의무늬, 2014)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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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 벼슬은 태사(太史)에 이르렀다. 공자의 제자이며, 저서에 『춘추좌씨전』, 『국어(國語)』 따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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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백성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신분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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