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을 계승한 종교이다. 공자는 인과 덕에 의해 천명에 따르는 이상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사상은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에 녹아 있다. 공자의 사상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지만 주로 국가운영원리로서의 유학이었다. 종교적 체계를 갖추는 것은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서였다. 문묘를 세우고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민간에서도 유교사상에 따른 제사 풍습 등이 체계적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의 경우 주자학 일변도로 치달았다는 지적이 있다.
유교는 공자(孔子)를 조술(祖述)한다. 공자의 사상은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그의 인간관과 세계관의 특징은 무엇일까? 여러 유교 학파의 원조인 공자의 사상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공자는 “은대(殷代)의 예(禮)는 하(夏)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 손익(損益)한 바를 알 수 있고, 주대(周代)의 예는 은에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 손익한 바를 알 수 있다. 주(周)를 계승할 이가 있다면 비록 100세가 지나더라도 그 손익한 바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 사상의 배경은 하은주(夏殷周) 시대이지만, 하(夏)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은주(殷周)시대를 살펴 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자는 은주 문화를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적 · 관념적 측면과 외면적 · 경험적 측면을 주체적 자각을 통해 통합적으로 인식하였다.
중국 은대의 종교문화는 은부족(殷部族)의 상고신앙을 중심으로 조상신 및 귀신숭배 사상이 성행하였다. 상제(上帝)는 초월적 · 절대적 존재로서 인간과 만물을 주재하고 천지자연과 길흉화복을 점지해 인간으로 하여금 이를 좇아서 모든 시책을 결단하게 하는 궁극적 근원이었다. 갑골복사(甲骨卜辭)에 보이듯이 인간은 상제에 대해 수직적 절대 복종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중요한 일은 점복(占卜)에 의해 결정되었다. 주대(周代)에서도 초인간적 주재자를 숭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천사상(天思想)의 등장과 함께 인간을 중심으로 지상의 사회 현실을 중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절대적 주재자가 ‘상제’에서 ‘천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관념적 · 무형적 존재의 실체와 권위에 대한 회의가 나타났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했던 공자는 초월적 주재자에 대한 교설(敎說)이나 의식(儀式)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천(天)’ 또는 ‘천명(天命)’에 대해 강한 신념과 외경심을 표시하였다. 천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그 뜻을 행하는 궁극적 존재라고 생각되었다. 인간은 천의 뜻에 따를 뿐이라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이 도덕성과 역사의식의 근거가 되었다. 공자는 은대의 상고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문화와 주대의 합리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예제문화(禮制文化)에 근거해 형이상학적 요소와 사회 역사적 요소를 통합하였다. 공자는 인간성의 주체적 각성을 통해 천사상과 천명사상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공자의 인간관의 핵심은 ‘인사상(仁思想)’이다. ‘ 인’은 인간의 본질이며 삶 그 자체라고 보았다. 공자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용어인 ‘ 성(性)’이나 ‘ 이(理)’라는 용어보다는 ‘ 도(道)’ · ‘ 직(直)’ · ‘ 덕(德)’ · ‘ 충(忠)’ · ‘ 신(信)’ · ‘ 의(義)’ 등의 말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 낱말들은 인간의 소이(所以)와 당위(當爲)에 관련된 덕목으로 본질적으로는 ‘인(仁)’에 귀속된다고 보았다. 인은 인간의 성취할 바람직한 가능성이며, 어느 일면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유연성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교의 종교적 측면은 경천사상에서 볼 수 있다. 은주시대에 걸쳐 숭앙의 대상이었던 ‘상제’와 ‘천’은 『시경』 · 『서경』을 비롯한 오경 속에 많이 나타나 있다. 경천사상은 우주와 인간을 주재하는 초인간적 · 초자연적 절대신에 대한 숭경(崇敬)의 자취를 담고 있다. 상제는 인간을 감찰하고 화복을 내려주는 무한한 권위를 지닌 절대 타자(絶對他者)로서 인식되었다. 상고에는 ‘상제’와 ‘천’에 대한 신앙이 비슷했지만, 주대로 내려오면서 천의 의미가 변화하였다. ‘천(天)’이라는 글자 속에 이미 ‘대(大)’라는 사람의 뜻이 내포되어 있듯이 초월적 권위가 인간에게 내재함으로써 인간과의 관련성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초월적 주재자의 외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일컫기보다는 인간의 책무와 도리를 중시해 덕(德)의 개념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제’나 ‘천’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 전환은 공자에 이르러서였다. 공자는 ‘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신성성과 구극성을 인간에게 내재화했다. ‘천‘은 외경적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인간의 성숙(仁)과 주체적 각성(德)에 의해서 ‘천’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천인관계(天人關係)에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파악하였다. 공자는 초월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도, 특정한 예배의 형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상제’에 대한 관념은 ‘천’ 속에 수렴되고, 그것은 다시 인격 속에 내재되어 인간의 실질적 태도와 삶 자체가 중요시되었다. ‘하늘’의 문제를 인간의 삶의 행태 속에 수렴시킴으로써 인간 행위를 떠난 상념의 세계를 건설하지 않았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중요시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행하는 제의는 기복행사(祈福行事)이지만, 유교의 제의는 윤리성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교의 제의는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는 구복(求福)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유교의 제의는 주술적 요구를 배격하고 세속 세계를 도덕화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습속, 오사(五祀)나 절사(節祀)와 같은 국가행사나 민간신앙과 습합(習合)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제의는 건실한 윤리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외형적 · 절차적 관계를 설정할 뿐만 아니라, ‘고무진신(鼓舞盡神)’하고 ‘신이명지(神而明之)’하는 신명성(神明性)을 다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적 체험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유교는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데 힘쓰기를 강조하며, 내세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 공자는 초인간적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표(言表)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이 처한 곳에서 도리를 다하려고 했을 뿐, 내세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의 문제는 삶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실존적 깊이를 가지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가 보다 중요한 관심사였다. 공자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도(道)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인간의 인간다움, 즉 도와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공자는 인생에서 인격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성취함으로써만 인생의 의미를 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자는 “믿음을 돈독히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篤信好學)”, “죽음을 당하더라도 도를 참되게 하며(守死善道)”,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殺身成仁).”고 말하였다. 누구나 스스로의 본분을 자각하고 실천함으로써 평화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도리를 의미하는 인은 자식을 사랑하고(慈) 부모에게 효도하는(孝) 친자관계(親子關係)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식은 부모의 몸에서 직접 발생한 관계이므로 부모(親)-자식(子)은 무조건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계에서 본질적 특성은 ‘사랑’과 ’존경‘이다.
인간 관계는 일반 사물과 다르게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인격이 없으면 인간 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과 존경이 사회로 확대되지 못하면 이기주의적 상업 정신으로 전락하기 쉽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부모가 죽어서도 제사의 형태로 유지됨으로써 사회의 정신적 방향이 정립된다. 조선(祖先)에 대한 제사는 자신이 생겨난 근원을 반성해(報本追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각하는데 있다. 의례는 효성의 정감을 담는 그릇이요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으로부터 자신의 존재의의를 느낀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 객관적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현세에 살아 있는 이들의 진실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기와 같이 한다(事死如事生).”고 했고, “내가 직접 제사하지 않으면 제사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吾不與祭 如不祭).”고 하였다. 효는 존경의 마음이 조상뿐만 아니라 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교의 중요한 종교적 덕목이다.
공자는 “제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한다(修己而安百姓).”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교는 자기도야(修身)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을 평안하게 한다(平天下)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의 도는 수도적(修道的) 측면과 행도적(行道的) 측면을 병행하기 때문에, 개인의 수양은 사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유교의 도는 이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는 은자(隱者)의 출세간과 세상에 영합해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속물주의를 거부한다. 유교는 이 세상 속에서 인간성을 수양하는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유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밝은 덕을 세상에 밝히는 것(明明德於天下)’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의 현실 지향적 성격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데 특징이 있다. 인간에 내재된 참된 가치를 현실 속에서 보존 · 함양함으로써 현실에서 현실을 개혁하는 적극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에 대해 『중용』에서는 “높고 밝은 진리를 극진히 하면서 일상일용을 말미암는다(極高明而道中庸).”고 했고, 풍우란(馮友蘭)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벗어남(卽世間而出世間)”이라고 하였다.
전 시대의 문화 전통을 집대성했던 공자는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 · 문(文) · 무(武) · 주공(周公) 등의 인물들을 고성왕(古聖王)으로 칭송하였다. 나중에 도학파(道學派)는 이 인물들을 도통으로 숭상하였다. 공자는 주의 문화가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는 것을 개탄하였다. 나중에 공자가 과거를 숭상하는(尙古的) 인물로 묘사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유교에서 “요순을 근본으로 삼고 문무를 본받는다(祖述堯舜 憲章文武).”고 하는 정신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부정의 표시이며, 현실을 개변시켜 이상적 목표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하대는 ‘충(忠)’을, 은대는 ‘질(質)’을, 주대는 ‘문(文)’을 숭상했는데, 공자는 내용과 현실이 균제한 문질빈빈(文質彬彬)한 상태를 가장 바람직하게 보았다. 이러한 개혁과 발전의 논리에 근거하여 공자는 시대에 따라 없앨 것과 새로 보충할 것을 올바로 처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정신을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부른다.
유교에도 중심 경전이 있지만 일정한 계통을 갖춘 사원이나 교회를 만드는 것과 같은 교조화된 신앙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후세에 공자와 그 제자들을 비롯한 성현을 제향하고 기념하는 성소(聖所)로서 대성전(大成殿)과 같은 사우(祠宇)를 태학(太學)과 향교에 설치하거나, 선현을 추모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한 터전으로서 서원을 세웠지만, 집단적으로 예배하기 위한 종교적 조직체로 볼 수 없다. 선비들은 국 · 공립기관인 성균관 · 향교와 사립 기관인 서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제나 승려와 같은 일정한 종교적 신분이 아닌. 혼인도 하고 가정도 돌보는 일반인으로서 생활을 해나갔다. 오히려 인간의 범상한 생활 자체를 중시하고 고양시키면서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인간에게 있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존중했기 때문에 금욕주의적 멸정론(滅情論)을 부정하였다. 인간의 감정을 삶의 현장에 알맞게 조절(致中和)해 삶을 가꾸고자 하였다. 이상 세계는 현실 세계를 떠날 수 없다고 봄으로써 일상과 이상, 감성과 이성 등의 이원적(二元的) 분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유교는 성(聖) · 속(俗)은 인간의 삶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뿌리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았다. 성속이라는 개념 이전의 성속이 하나로 수렴한 상태, 즉 중화를 이룬 상태를 소중하게 보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대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개인은 부여받은 순수정신(理性, 靈魂)을 확립하고 감정을 순화해 각성된 인격 주체를 이루어야 한다. ‘자기를 이기고 예를 지킴(克己復禮)’, ‘생각을 진실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함(誠意正心)’, ‘몸을 닦음(修身)’과 같은 수양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가정의 질서와 행복을 성취하는 일이다. 유교에서 가정은 성과 속이 만나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가정의 장로(長老, 尊長)는 사제격이며, 어린이(少幼)는 교인인 셈이다. 이는 대소가족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셋째 민생을 보양(保養)하고 교화를 펴기 위한 기반으로서 인도주의 국가의 건설이다. 국가는 인간 생활의 필요에 의해 구성한 조직체이다. ‘군(君) · 사(師) · 목(牧)’을 통해 기강과 질서를 세우며, 인륜을 가르치며, 의식주를 제공한다.
요 · 순 · 우 · 탕 · 문 · 무 · 주공 등이 통치하던 유교의 이상 국가에서는 교화와 통치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통치 기능과 교화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지 못하면, ‘나라에 도가 없는 상태(邦無道)’를 맞게 된다. 따라서 성인이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교화의 기능을 현인에게라도 맡겨야 한다. 어떠한 경우이든 국가 경영에서 통치 기능과 교화 기능은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입덕(立德) · 입공(立功) · 입언(立言)의 근본 취지가 여기에 있다.
공자는 스스로 ‘성인’의 명호(名號)를 사양하였다. 종교를 창설한 교조는 아니었지만, 10철(十哲) · 72현(七十二賢) · 3,000제자라 불리는 많은 문도를 배출했으며, 2,500년의 유교 전통에서 ‘만세종사(萬世宗師)’로서 숭앙을 받고 있다. 공자는 주대의 지식인 계층인 사인출신(士人出身)이었다. 사인은 지배 귀족으로서의 통치계층도 아니요, 생산자로서의 서인(庶人)도 아닌 중간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를 행하고자 ‘천하를 돌았으나(轍環天下)’ 뜻을 펴지 못하고 향리로 돌아와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부귀 빈천을 가리지 않고 배우려고 하는 자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유교는 공자를 종사(宗師)로 하여 조정이나 향리에서 정사를 도모하고 생활 관습을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관학파(官學派)의 정치 참여와 사림파(士林派)의 교육 정신도 공자의 정신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인(仁)을 비롯해 덕(德) · 예(禮) · 의(義) · 지(知) · 신(信) · 용(勇) · 충(忠) · 서(恕) · 효(孝) · 제(弟) · 경(敬) 등 많은 윤리적 덕목을 말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그의 언행을 통해 모범을 보이고 구체적 사례에 따라 말하였을 뿐 실지의 삶을 떠난 추상적 관념의 체계를 서술하려고 하지 않았다. 공자 설한 가르침(設敎)은 맹자에 의해 더욱 자세하게 밝혀졌다(明敎).
공자의 인은 모든 덕의 총체적 표현이요, 전인성(全人性)을 뜻한다. 인을 추구하는 군자는 인의 극치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인 개념은 인자(仁慈)라든가 사랑이라는 뜻으로 지 · 용과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공자는 “지자(知者)는 의혹하지 않고(不惑) 인자(仁者)는 근심하지 않으며(不憂) 용자(勇者)는 두려워하지 않는다(不懼).”고 하였다. 또한 공자는 제자들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안연(顔淵)에게는 ‘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했고, 자장(子張)에게는 ‘공(恭) · 관(寬) · 신(信) · 민(敏) · 혜(惠)’라 했으며, 중궁(仲弓)에게는 “문밖에 나설 때는 큰 손님 맞이하듯,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 받들 듯 할 것이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대답하였다.
유교는 효제와 충서를 중요시한다. 전자는 친애 즉 효도와 존경의 원리이고, 후자는 진실 즉 성실과 이해의 원리이다. 효는 만행의 근본으로 경애 · 자애 · 우애의 뿌리이다. 종적으로 어버이에 대한 경애로부터 멀리 조상에까지 보본추원하며, 횡적으로 부모와 자녀에 대한 애휼(愛恤)을 확대해 타인의 부모와 자녀에까지 미루어 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유교에서도 보편적인 사랑으로서의 인류애를 말하지만, 방법적으로 자기의 가장 절실한 부모 형제와의 관계를 토대로 궁극적으로 사해동포에까지 추급(推及)하기를 지향하고 있다. 충서는 충실성과 이해심이다. 공자는 ‘충신을 주로한다(主忠信)’고 하여 거짓없는 성실과 믿음을 다할 것을 말했고, 남의 처지와 심경을 나의 것으로 헤아리는 ‘서’의 마음을 중시하였다. 증자(曾子)는 공자의 ‘모든 것에 통하는 하나의 도(一貫之道)’를 “충서일 뿐이다.”고 하였다.
『대학』에 의하면, 유교 윤리가 제가 · 치국 · 평천하로 연결되어 가정 윤리와 사회 윤리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가정에서는 효 · 제 · 자가 바탕이 되며, 이것을 미루어 효는 임금을 섬기는(事君) 도, 제는 어른을 섬기는(事長) 도, 그리고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使衆) 도가 된다고 보았다. 가정의 윤리는 곧 사회 국가의 윤리로 연결되는 바탕이다. 그 기본 원리를 ‘서’라 하여 자기의 진실한 소망에 비추어 타인에게 한결같이 베풀기를 강조하였다.
이것이 곧 ‘혈구지도(絜矩之道: 자로 헤아리는 방식)’이다.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남도 원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바는 남도 싫어할 것이니, 자기의 본심을 헤아려 남을 대하라는 명제이다. 요순을 좇고, 걸주(傑紂)를 좇지 않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다.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함으로써 민중을 얻을 수 있으며 민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지도자 자신이 이러한 가치정향(價値定向)의 의식적 기반이 얼마나 튼튼히 되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중용』에서는 인간적 가치의 궁극적 근원을 인간의 본성에 두고 있으며, 인성은 천명에서 유래했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지(知)와 행(行)에 과불급이 없는 이상적 상태를 중용이라고 하였다. 상황에 적절한 도를 추구하는 중용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성(誠)’의 덕목이 요구된다. ‘성’은 존재의 원리이며 존재의 방식으로 자기 완성이자 타인 완성이다. 성은 내외 양면의 통합 원리이며, 인간의 주체적 참여에 의해 객관적 상황을 알맞게 처리함을 말한다. 이러한 내외합일의 원리는 인간 관계를 통해 달성된다. 그래서 『중용』에는 ‘삼달덕(三達德)’과 ‘오달도(五達道)’라 하여, ‘군신(君臣) · 부자(父子) · 부부(夫婦) · 형제(昆弟) · 붕우(朋友)’ 등을 말하고, 그 실현을 위한 내면적 실천덕목으로서 지 · 인 · 용을 일컫는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공자의 윤리사상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맹자에 이르러 보다 이론화되었다. 맹자의 사덕(四德:仁義禮智) · 사단(四端: 惻隱 · 羞惡 · 辭讓 · 是非)은 윤리설의 기반이 되어 후세의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교에서는 사람에 토대를 두고 정치제도를 완비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인간다운 생을 누리도록 하며 이를 수호함을 말한다. 그래서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 사람의 안부를 먼저 묻고 말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람에 근거한 사람을 위한 정치가 실현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공자는 ‘안인(安人)’과 ‘안백성(安百姓)’을 말하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재 배출에 힘썼다.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성취함이 지대한 임무였고, 이를 저해하는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인의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 정치사상의 취지이다.
유교에서는 위정자들이 바람직한 자질을 갖추는 것을 중시하였다. 위정자들이 본래의 사명을 망각 · 일탈하지 않도록 뚜렷한 목적 의식을 확인시키고 본래의 사명을 일깨워야 한다. 공자는 살상과 투도(偸盜)가 없는 정치를 추구했고, 맹자 또한 백성의 안업(安業)과 인륜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른바 덕치와 왕도로써 인도주의 국가를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유교의 정치사상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양심과 인격을 존중해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의 주체적 가치가 존중되지 못하던 당시에 덕치주의와 왕도정치는 매우 계몽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어 뭇별이 그것을 향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감화로써 다스리는 것이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명령으로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법망을 피하려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지만 양심과 인격(德)으로 이끌고 자율적 정신(禮)으로써 질서 있게 하면 백성들이 잘못을 부끄러워해 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타율적 명령과 형벌에 의한 강제가 아닌, 양심의 자유와 인격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한 인도주의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맹자가 살던 당시에는 부국강병과 패권 국가만을 추구하였다. 이에 맹자는 세력과 부만을 추구하기에 앞서 백성을 근본으로 인의(仁義)의 정치를 실현할 것을 여러 왕들에게 권유하였다. 맹자가 말했던 민본주의와 인의에 의한 왕도정치는 유교 정치원리의 근본 정신이다. 나아가 유교는 이권다툼만을 하는 통치자들을 배격하고, 겸양과 애휼보민(愛恤保民)의 정치 원리를 제시하였다. 국가가 잘 성립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 군사적 요소보다는 백성들의 신뢰가 가장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인의’에 입각해 신뢰를 강화하고 통치자의 도덕성을 확립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인간 존중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의 양대 지주로서 예와 악을 꼽을 수 있다. 예는─문물 제도 일반을 일컫기도 하지만─ 이성적 질서의 측면이고, 악은 정서적 자유의 측면이다. 예는 이성적이기 때문에 경건한 엄숙성을 강조하고, 악은 정서적이기 때문에 화열(和悅)을 중시한다. 예는 자기 반성적이고 악은 감정을 발산한다. 구심적인 예와 원심적인 악의 양면을 기초로 생활 방식을 운영하면 자유와 질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유교에서는 개체와 집단의 조화를 추구한다. 공자는 “군자는 널리 소통하되 편당하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하되 널리 소통하지 않는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고 하였다. 사사로운 편당성(偏黨性)을 버리고 보편적으로 널리 소통함을 뜻한다. 한편 전체적인 조화는 개체의 특수성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군자는 화합하되 일률적이지 않고, 소인은 똑같이 하되 조화롭지 못하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고 하였다.
유교에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개인의 존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 집단에 예속시키는 전체주의적 사고 방식도 아니며, 동시에 개인을 위주로 사회 · 국가를 무시하는 개인적 방임주의도 아니다. ‘나라에 도가 있다면(邦有道)’ 즉 질서와 자유가 있다면, ‘가까이 있는 이들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이들이 오고자 할 것(近者悅 遠者來)’이다. 훌륭한 국가는 훌륭한 개인들을 보호하는 고향이어야 한다. 개인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국가를 소중히 여기고, 국가를 수호하고자 의인 · 열사가 된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도 이와 동일한 원리의 적용이 요망된다.
유교는 정치를 명실상부하게 운영하기 위해 정명사상(正名思想)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政者 正也)”이라고 했듯이 정명이란 명분과 사실이 일치함을 말한다. “임금(君)은 임금답고, 신하(臣)는 신하다우며, 부모(父)는 부답고, 자식(子)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것이 뒤바뀌면 기강이 무너지고, 기강이 무너지면 백성이 살 수 없게 된다. 공자의 『춘추』는 노나라 242년간(서기전 722∼481)의 정치사를 시비(是非)한 비판서로 유교의 정명사상에 기초해 여러 사례들을 해석하였다.
유교는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 여러 나라의 사회 문화와 가치관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어왔다. 특히 한국은 중국과 인접해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치 · 경제 · 군사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 중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이다. 그러나 한국 상고시대에 대해서는 문헌이 부족해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분야는 한중 양국의 현존하는 여러 문헌과 금석학 · 갑골학 · 고고인류학 · 민속학 등의 방증자료를 통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 ·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 ·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흔히 한국사상을 말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 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태학(太學)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 · 백제 · 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 · 일신(日神) · 수호신 · 귀신숭배 등 각종 ‘음사(淫祀)’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가리킨다. 같은 조에 기자(箕子)에 관한 기사가 들어 있고, 이어서 위만조선 · 마한 · 부여 등 여러 나라를 기술하고 있다. 『제왕운기』에서도 단군조선 · 후조선 · 기자조선을 일컫고, 다시 위만의 기사를 기록한 뒤 삼국이 성립하기까지 열국의 분열상을 적어놓고 있다. 삼국 이전의 고조선을 상고시대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하늘과 조상을 모시는 숭천경조(崇天敬祖)의 사상이 있었다. 이 사상은 한국과 중국을 막론하고 고대에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지만, 각기 지역적 특색이 있었다. 『삼국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보장왕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로 중국에서 도교(道敎)를 들여왔다. 당태종이 도사 서달(敍達) 등 8인을 보내오자 이들을 유불(儒佛)보다 높이 대접하였다. 이들은 중국식 도교를 전파하고 고구려의 힘을 약하게 하려고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고래의 유풍을 변화시키고 파괴하였다. 『삼국유사』에는 “혹은 영석을 파괴하기도 하였다(或鑿破靈石).”는 기록이 나온다. ‘영석’에 대해 “민간에서는 ‘도제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 성제(聖帝)께서 이 돌을 타고 상제를 조현(朝見)했기 때문이다.”고 주(註)를 달았다. 먼 옛날 상제가 하늘과 교통하는 자리로서 신성한 바위를 택해 ‘영석’ · ‘조천석’ 또는 ‘도제암’이라 하였으며, 훗날 영석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래의 도사들은 왜 ‘영석’을 파괴했으며, 또한 옛 성제란 어느 시대의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 까닭을 이색(李穡)의 시 「서경(西京)」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갈 수 있다. “성(城)머리 노수는 햇빛을 가리는데/산정(山頂) 높은 누각은 멀리 바람을 이끄누나/듣건대 하늘 조회 드림에 일찍이 바위 있었다 하니/단군의 영상(英爽)하심이 군웅의 머리 되시도다(城頭老樹猶遮日 山頂高樓遠引風 聞說朝天曾有石 檀君英爽冠群雄).”고 하였다. 여기에서 『삼국유사』의 옛 성제와 「서경」의 ‘단군’을 일치시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보면, 동 11년 단군사(檀君祠)를 세웠는데 여기에 동명사(東明祠)를 합사했다고 하면서 단군을 서편, 동명을 동편으로 모셔 모두 남면(南面)하도록 하고 봄과 가을마다 제향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백은탄(白銀灘)에 조수에 따라 바위가 드러났다 잠겼다 하는데 이름을 ‘조천석’이라 하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동명이 기린을 타고 굴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 천상에 주사(奏事)한다고 하였다. 이승휴(李承休)는 ‘천상을 왕래해 천정(天政)을 참예(參詣)하니, 조천석상의 기린자취가 그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이름이다.”고 하였다.
위의 사례를 통해 보더라도 외래의 도사들이 파괴하려 했던 고유한 전통의 상징물인 ‘영석’ 또는 ‘조천석’의 유서가 매우 오래되고, 아래로는 동명성왕으로부터 멀리 상고의 단군에 이르기까지 추원(追遠)해 하늘을 숭배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신앙과 습속이 원래로부터 일관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래의 제천 행사와 공동체 의식도 이와 연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일실되어 이름만 전하는 『해동고기(海東古記)』 · 『삼한고기(三韓古記)』 · 『단군기(檀君記)』 · 『신지비사(神誌秘詞)』를 비롯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서도 “평양이란 본디 선인 왕검의 집이었다(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고 분명히 기록되었다. 고려의 백문보(白文寶)는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3,600년이 되었다.”고 했으며, 권근(權近)은 명 태조에게 단군의 “역년(歷年)이 천년이 넘었다.”고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 서거정(徐巨正)의 『동국통감』,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그리고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등의 중요한 사서 문전을 보면, 우리의 선인들은 적어도 고려시대(麗代)나 조선시대 때 단군조선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은 ‘ 신시(神市)’에서 ‘ 홍익인간’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에 보면 그 첫머리에 “처음에 누가 나라를 열어 풍운을 헤쳤을까, 하느님의 손이시니 이름은 단군이라 하시니라(初誰開國啓風雲 帝釋之孫名檀君).”고 하였다. 또한 그의 웅거(雄據)한 영역을 표시해 『본기』의 내용으로 주를 붙여 “조선지역을 거(據)하사 왕이 되셨으니, 시라(尸羅) · 고례(高禮) · 남북옥저(南北沃沮) · 동북부여(東北夫餘) · 예(濊) · 맥(貊)이 모두 단군의 수(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이색의 시에 ‘단군영상관군웅(檀君英爽冠群雄)’이라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도 본래 동방에는 ‘구이(九夷)’가 있었을 뿐 군장(君長)이 없었으나, 신인(神人)이 하강함에 국인(國人)이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열어 구이를 통어(統御)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간 것이 단군조선이었다고 추측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문헌에 의거해 고조선의 사상적 인식에 도움이 되는 측면을 보고자 한다. 기자조선에 대한 언급이 한국과 중국의 고문헌에 나오고, 고구려도 기자사(箕子祠)를 두어 숭배했다는 점에서 우리 선인들은 기자조선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禮義) · 전잠(田蠶) · 직작(織作) 등과 팔조교(八條敎)를 가르쳐서 의식(衣食) 등의 생활을 개선하고 인륜 도덕으로 교화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아 문호(門戶)를 닫는 일이 없었으며, 부인이 정신(貞信)하고 음벽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앞서 고찰한 대로 이미 단군조선의 개국 이전부터 동방에는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구족(九族)이 있었는데, 단군이 임금이 되어 군재(君宰)하고 영솔(領率)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절요』에 “동방에 견이 · 방이……등 구이가 있었으되 처음에는 군장이 없었다(東方有畎夷……等九夷 而初無君長).”고 했으며, 『동사강목』에는 “동방에 구이가 있었다. 견이(畎夷) · 방이(方夷) · 우이(于夷) · 황이(黃夷) · 백이(白夷) · 적이(赤夷) · 현이(玄夷) · 풍이(風夷) · 양이(陽夷)라고 일컬으니 모두 토착민이었다.”고 하여 구이의 선주민이 정착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또한 그들은 “천성이 유순하고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며, 혹 변(弁)을 쓰고 비단을 입었으며, 그릇으로 조두(俎豆)를 사용하였다. 하나라 임금 태강(太康)이 실국(失國)함에 비로소 반(叛)하였다.”고 하였다.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의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고 있었던 예술적 · 윤리적 · 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신시적(神市的)’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왕검조선)의 ‘신시’와 연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소도(蘇塗)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사한 ‘소도’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 마한과 백제의 소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고신도적(古神道的)’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 · 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 · 불 · 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연대와 작자는 미상이지만, 고구려에는 일찍이 100권에 달하는 사서로 『유기(留記)』를 편찬한 바 있고, 영양왕 때(600)에는 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사(古史)를 축소해 『신집(新集)』 5권을 수찬하게 하였다. 고구려는 『유기』 · 『신집』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사서 찬수 사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태학의 교수내용은 경(經) · 사(史) · 제자백가(諸子百家) · 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상류의 귀족층은 태학에서 교육했고, 민간의 일반 서민에게는 어디에나 공회당과 같은 학원을 세워서 경서와 무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풍속이 서적을 좋아하여 빈천하고, 짐승이나 먹이는 집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대옥(大屋)을 지어 이를 경당(扃堂)이라 불렀으며, 미혼의 자제들이 주야로 이곳에서 글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교 경전을 통해 인문 정신을 배양하고 강용(强勇)한 상무 정신(尙武精神)을 수련함으로써 고구려는 강대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오경(五經) · 삼사(三史) · 『삼국지(三國志)』 · 『진춘추(晉春秋)』가 있었다(北史).” 또한 “책으로는 오경 및 『사기』 · 『한서』 · 『후한서』 · 『진춘추』 · 『옥편』 · 『자통(字統)』 · 『자림(字林)』이 있었으며, 『문선(文選)』을 특히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 내용은 경전(經) · 사학(史) · 문자학 · 문장학이었는데, 경학이 으뜸이자 기본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를 보면, 『시경』 관저장(關雎章)과 내용 · 형식이 흡사하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고구려의 정치 이념과 후사(後嗣)에게 주는 고명(顧命) 등은 『서경』의 요전(堯典)이나 『상서(商書)』에 보이는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그 밖에 『삼국사기』와 같은 사서류에 나오는 사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시경』 · 『서경』 · 『주역』 · 『예기』 · 『춘추』 등 오경과 관계되는 요소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오경 이외에 삼전(三傳) · 삼례(三禮)에 이르기까지 행위 규범 · 사회 제도 · 정부 조직 · 율령 반포와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경전의 내용이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밖에 고구려의 예속과 유교 문화와의 상관성을 지적해볼 수 있다. 혼인을 할 때 고구려에서는 재물의 교환을 수치스럽게 여겨 재폐(財幣)를 사용하지 않았고, 상례에서도 부모와 부상(夫喪)에 대해 빈소를 차리고 3년 상을 지낸 것은 유교의 『의례』와 상통한다. 고구려 이전부터 구상제도(久喪制度)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가운데 어느 쪽이 시기적으로 앞서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를 보면 고구려의 예속이 유교 문화와 연관성을 가지고 발달해갔음을 살필 수 있다.
삼국 이전에도 한사군에 근접한 지역은 중국의 유교 윤리와 흡사한 예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삼한시대에는 외부의 영향이 적었으며, 읍락(邑落)이 잡거(雜居)하였다. 비록 국읍에 통치자가 있었을지라도 통치 기구의 지배적 기능이나 예의 규범이 보편화되지 못해 각기 독립된 토속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백제시대에 이르면 통치력이 널리 미쳤을 뿐 아니라, 유교적 체제가 갖추어졌다. 국가의 금령(禁令)과 법제가 뚜렷하게 되고, 중국과 비슷한 혼상례(婚喪禮)가 있었다. 재래의 소도 · 천신신앙 · 귀신숭배 등의 법속은 유교에서 말하는 교사지례(郊祀之禮)와 종묘제도의 방식으로 형태화하는 등 국가적 규모에서 유교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온조(溫祚)를 시조로 하는 백제는 본래 졸본부여(卒本夫餘)인 북방계로서 삼한시대의 마한지역으로 남하해 도읍을 위례(慰禮) · 웅진(熊津) · 부여로 옮겨가면서 독립 국가로 형성되었다. 백제의 온조왕은 창업 6년 만에 동명왕묘를 세웠고, 후대의 제왕들은 대체로 즉위 초년에 친사(親祀)해 의례를 행하였다. 동북으로는 고구려 · 신라와 대치하고 서남으로는 절해(絶海)를 대면하였던 백제는 통일국가가 되기 위해 처음부터 북방계나 남방 토착민과의 문화적 차이와 주변 열국의 이질적 성향들을 극복하고 통합해야 했다. 험난한 해양은 백제가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 수출하는 해상 교통로가 되었다.
백제는 정부 조직 · 행정 관서 및 행정 구역 등을 제정함에 있어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3세기에 이르러 중앙집권 국가의 체제를 상당히 갖추었던 고이왕시대(234∼286)에 중앙 관제를 육좌평(六佐平) 16관계(十六官階)로 제정하였다. 이는 『주례(周禮)』의 6관제(六官制)에 상응하는 것이다. 고이왕이 남당(南堂)에서 정사를 보았다고 하는데, 남당제도는 임금이 신하들과 의논하고 정사를 펴는 장소로서 『예기』 명당편(明堂篇)에 나오는 명당과 관계 있는 듯하다. 또한 성왕시대(523∼554)에는 10간 12지와 관계되는 내관 12부, 외관 10부로 구성되는 22부나 22담로제(檐魯制)를 두었고, 오부오방제의 행정구역의 오분법에서 오행사상과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다.
백제의 사서 편찬과 학술 사상에서도 유교사상과의 관련성을 볼 수 있다. 4세기경 백제 중흥지주(中興之主) 근초고왕(346∼375)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는데 『서기(書記)』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박사의 칭호로 판단할 때 대학제도와 전문 학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와 흡사하게 “풍속이 말 타고 활쏘기를 중히 여기고, 경전과 사서를 좋아했으며, 그 중 뛰어난 이는 자못 한문을 해독해 글을 잘 지었다. 그리고 음양오행에 대해서도 이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함게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해오기도 했다는 기사로 보아 유교의 경전사상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해상 진출은 중국 · 일본 등 동아시아 학술사에서 후세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양서』 · 『주서』와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 · 『고사기(古事記)』 등에는 백제에 대한 기술이 매우 상세히 나와 있다. 더구나 백제가 중국에 보낸 표문(表文)의 내용은 매우 높았고, 중국에서 백제의 임금에게 ‘왕’ 또는 ‘장군’으로 봉했던 것으로 보아 백제와 중국(梁)과의 관계가 밀접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왕자 아직기(阿直岐)와 박사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 유교 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전달함으로써 왕실의 스승이 되고 일본의 학문적 시조가 되었다.
끝으로 백제의 풍속을 살펴보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근본을 같이 했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깊었다. 예속에서 혼취(婚娶)의 예는 중국과 같았고, 상제는 고구려와 같았다고 한다. 부모와 부상(夫喪)에 3년 상을 하는 것은 백제 · 고구려 · 중국에서 공통된 것이지만, 백제와 고구려에서 더 심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백제 사회에서 행했던 예속과 법제는 ‘기자팔조교(箕子八條敎)’의 법속과 내용이 비슷하다. 왕이 매년 4월 중에 천과 오제지신(五帝之神)에게 제사한다든가, 시조묘에서 사사(四祠)하였던 점은 특기할 만 하다. 그 밖에 송의 가원력(嘉元曆)을 써서 인월(寅月)로 세수(歲首)를 한 것, 의약 · 복서(卜筮) · 점상(占相)의 술을 해독한 것, 놀이로서 투호(投壺) · 저포(樗蒲) · 악삭(握槊) · 농주(弄珠) 등을 쓴 것,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경의를 표한 것 등은 중국 문화와 유교 문화를 일상 생활에 활용했던 사례들이다.
신라의 건국은 삼국 가운데 가장 이른 서기전 57년으로 되어 있다. 신라는 건국이래 일정한 국호 없이 ‘사라(斯羅)’ · ‘사로(斯盧)’ ·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었다. 정식으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한 것은 6세기인 22대 지증왕대(503)였다. 신라는 삼한 78개 부족국가 가운데 하나의 소국으로, 지리적으로 산악이 많고 동으로 바다를 접해 교통이 불편한 외진 곳에서 스스로 성장해야만 했다. 따라서 신라가 삼국으로 정립해 국가적으로 높은 수준까지 발전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百官)의 공복을 정한 것은 법흥왕대(520)이다. 이미 백제는 고이왕 27년(260)에 관계(官階) 16품과 공복을 제정했고, 고구려는 소수림왕 3년(373)에 율령을 반포한 상태였다. 국사 편찬에서도 백제는 근초고왕 30년(375)에 『서기』를 편찬했는데 반해, 신라는 진흥왕 6년(545)에 와서야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대학 설립에서도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세운 반면, 신라에서는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문물 제도의 정비에서 대체로 200∼300년의 후진성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중국 대륙과의 문화 교류도 가장 늦었고, 고구려나 백제와의 관계도 일찍부터 개방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는 꾸준히 발전해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150년 간은 뚜렷이 흥륭지세(興隆之勢)의 진취적 기상을 보였다. 외래 문물에 쉽사리 동화되지 않고 고래의 기질과 풍습을 오래 보존해 고유한 정신을 저력으로 유교와 불교 등 외래 문화를 섭취 · 융화시켰다. 이제 신라가 중국문화와 유교 문화를 어떻게 수입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첫째 신라의 유교 전래의 단서를 중국 및 고구려 · 백제와의 교섭 관계에서 고찰할 수 있다. 신라의 유교 전래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늦었지만, 신라에서도 이미 고구려의 태학 설립(372)과 율령 반포(373)가 있은 지 약 10년 뒤인 제17대 내물왕 27년(382)에 중국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에게 사신을 파견하였다. 신라의 사신 위두(衛頭)는 부견이 동방의 일이 옛날과 다르다는 물음에 “그것은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가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내물왕 시대는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백제 근초고왕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임금의 칭호를 이사금(尼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꾸고, 왕권이 강화된 중앙집권제적 체제를 갖추는 등 독립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국세를 확장시키면서 고구려와 일본과도 외교를 맺는 등 국제적으로 신라의 존재를 나타내게 되었다.
19대 눌지왕 때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왕제(王弟) 복호(卜好)를 데려오고자 박제상(朴提上)을 보냈다. 그는 고구려 임금과의 대화에서 『춘추좌전』과 『시경』의 문구를 들어 왕(王) · 패(覇)의 구별을 분명히 하면서 설복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이미 오경사상이 지식인들에게 습득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박제상은 일본에 가 있던 왕제 미사흔(未斯欣)을 권도(權道)로써 귀환시키고 순사(殉死)함으로써 그의 지략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둘째 신라는 발전해가면서 국가적 체통을 확립시키기 위해 유교 문화를 이용하였다. 『춘추전』과 삼례(三禮) 등의 경전에 있는 사상을 활용하였다. 22대 지증왕대에 이르면 국호를 ‘신라’라 확정하고, 거서간(居西干) · 차차웅(次次雄) · 이사금으로 부르던 임금의 칭호를 중국식인 ‘왕’으로 부르도록 했고(503), 지증왕 때까지 존속되었던 옛 풍습인 순장제도를 폐지했으며(502), 상복법을 제정 · 공포하였다(504). 또한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군주(軍主)를 삼았고(505), 왕이 죽자 처음으로 시호를 사용해 ‘지증(智證)’이라 하였다. 다음 임금인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을 제정했으며(520), 연호를 사용해 건원(建元)이라 하였다(514). 이와 같은 사실에서 유교사상이 국가 제도에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신라의 고비(古碑)에 새겨진 유교사상에 대한 문자와 형상이다. 진흥왕은 신라의 중흥지조(中興之祖)로서 사방으로 경계를 확장해 서북으로는 한강하류에서 서해안에 이르렀고, 동북으로는 함남지방까지 진출해 경계를 획정하였다. 그가 남긴 네 곳의 순수비(경상남도의 창녕비, 서울의 북한산비, 함경남도의 마운령 및 황초령비)에는 ‘순풍(純風)’ · ‘현화(玄化)’ 등 재래의 고신도적 요소와 함께, ‘제왕건호(帝王建號)’의 취지로서 『논어』 헌문편(憲問篇)에서 인용된 “제 몸을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修己以安百姓).”는 구절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수기치인이라는 유교의 정교이념(政敎理念)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충신정성(忠信精誠)’ · ‘용적강전(勇敵强戰)’ · ‘위국진절(危國盡節)’ 등 국가를 보위하고 국력을 신장하는데 요망되는 정신을 고취하였다.
경주의 태종무열왕의 능비를 보면, 비신은 없어지고 밑에 거북 모양의 기대(基臺)와 육룡(六龍)으로 된 관만이 올려져 있다. 여기에서 용과 거북은 『주역』 음양사상의 상징이며, 육룡은 『주역』 건괘 육효로서 임금을 상징하고 있다. 괘 단전에 “때에 맞춰 육룡을 타고 하늘을 달린다(時乘六龍以御天).”고 했으니, 고대로부터 『주역』이 국가적 차원에서 응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문무왕의 해중릉을 바라보고 있는 이견대(利見臺) 역시 『주역』 건괘의 이(二), 오효(五爻)의 ‘이현대인(利見大人)’에서 따온 것으로 문무왕을 대인으로 여겨 그와 같은 명칭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신라의 화랑도와 유교사상과의 관계이다. 진흥왕대에 이르러 크게 융성했던 화랑도는 100여 년 뒤에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래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으로’ 효제충신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郎世記)』에서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여기서 배출되었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흔히 화랑도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충 · 효 · 신 · 용 · 지를 내용으로 하는 원광의 세속오계를 들고 있다. 그런데 원광법사는 “유술(儒術)에 크게 통하였다(삼국유사).”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세속오계에도 유교적 색채를 볼 수 있다. 세속오계와 유사한 내용을 『예기』 제의편(祭義篇)에서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효를 설명하면서, “거처를 엄숙히 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며, 임금에게 충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며, 벗에게 신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며, 전진(戰陣)에서 용기가 없으면 효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화랑도의 근본 이념인 ‘풍류(風流)’ 또는 ‘풍월도(風月道)’는 단순한 교훈으로 그치지 않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화랑도는 고래의 고유한 정신을 바탕으로 유 · 불 · 도의 기본 취지를 융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崔致遠,鸞郎碑序). 화랑들의 체험 세계는 인정적 · 윤리적이면서도 신이(神異)한 요소를 결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이론으로 단일화시키기 어렵다. 화랑도의 정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미워하고 선하게 하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화순하게 하니, 오상(五常) · 육예(六藝)와 삼사(三師) · 육정(六正)이 그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삼국유사』).”는 데서 볼 수 있다. 또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화랑들이 하늘에 맹서해 『시경』 · 『상서』 · 『예기』 등을 배우기를 결의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 점으로 보아, 화랑도와 유교와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볼 수 있다.
다섯째 국학에서의 경전 교육과 유교적 학술 문화이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보다 직접적으로 확대시켜 갔다. 신문왕 2년(682)에는 예부(禮部)에 국학을 설치하였다. 신라의 대학 설립은 비교적 늦었으나, 당시 발달한 형태의 당제(唐制)를 본떠서 만들었다. 『삼국사기』에 그 교과 과정이 기록되어 있어 자세히 알 수 있다. 국학의 교과 내용은 오경 중심이었고, 『논어』 · 『효경』을 읽도록 하였다. 특히 오경 · 삼사 · 제자백가서에 모두 능한 사람은 발탁해 등용하였다. 그 밖에 산학(算學)도 가르쳤다.
이미 진흥왕대 거칠부(居柒夫)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한데서 한문의 해독과 저술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한문을 통한 학술 문화의 발달은 중국과의 외교 문서 작성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논공(論功)하면서 그것은 무력의 힘이 컸으나 강수(强首)가 외교 문서를 작성한 공을 빼놓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신라의 유학자로서 설총(薛聰)은 구경(九經)을 이두(吏讀)로 풀어 써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도록 학문의 종장(宗長)으로서 숭앙되었다. 그 밖의 유학자로서는 강수 · 최치원 등 10인이 꼽히고 있다. 성덕왕 때(717)에 김수중(金守中)이 당에서 공자와 10철 그리고 72제자도를 가지고 귀국함에 이를 국학에 모셨다. 신라 후기로 갈수록 경술과 문장을 익히기 위해 입당 유학하는 일이 잦아지고 수많은 문인 · 학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유교의 학술적 연마는 상층 계급과 지식층의 일이었지만 유교의 윤리적 규범은 민간에까지 널리 영향을 주어 계층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깊이 침투하였다.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진덕여왕의 「태평송(太平頌)」, 충담사(忠談師)의 「안민가(安民歌)」, 고구려의 「온달전(溫達傳)」, 백제의 「도미전(都彌傳)」 그리고 신라의 「설씨녀(薛氏女)」 등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상에서 한국 상고 및 삼국시대의 상황을 개관하면서 유교사상이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대략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고찰된 내용을 토대로 한국 고대의 유교사상을 이해하는 데 유의할 점들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첫째 유교는 삼국 이전부터 전래하기 시작해 다른 종파 사상에 비해 가장 오래 되었고 끼친 영향 또한 매우 컸다. 유교가 본격적인 철학사상으로 발달한 것은 11세기 송대 이학(理學) 이후의 일이지만 유교적 문화를 담고 있는 사서와 사장(詞章)의 이해는 삼국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필수적 요소였다. 삼국이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시기는 다르지만, 유교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변화는 지대한 것이었다. 국가의 조직, 법령의 제정, 국사의 편찬, 교육제도의 설립, 학술 문화의 진흥, 보국애민 정신의 고취, 국제 외교의 성취, 미풍양속과 윤리 도덕 등 유교가 고대 한국의 건설과 발전에 기여한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둘째 삼국의 정치적 상황과 고유 문화에 따라 유교를 정착시키는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비교적 고조선시대의 고지(故地)에 근접해 발상(發祥)했으며 오래도록 전통적인 풍습을 바탕으로 성장한 나라이다. 고구려는 중국과도 가까우나 부여 계통의 예손(裔孫)으로서 고대 동방 사회의 유속(遺俗)에 많이 젖어 있었다. 고구려는 전통적인 것에 뿌리를 두면서 중국적인 것을 복합하였다.
중국의 역사서에 의하면, 고구려는 “그 풍속에 음사(淫祀)가 많으니, 영성신(靈星神) · 일신(日神) · 가한신(可汗神) 그리고 기자신(箕子神)을 섬겼다. 나라의 동쪽에 대혈(大穴)이 있는데 신수(神隧)라 하였다. 이 모두를 10월이 되면 왕이 친히 제사드렸다(舊唐書 高麗).”고 한다. 또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隋書 東夷傳).”는 기록이 자주 띈다. 한편 “혼례에 재물수수를 부끄럽게 여기고 부모와 부상(夫喪)에서는 그 복제가 화하(華夏)와 같다.”(周書 異域)고 하여 중국의 유교 문화와 상통함을 지적하면서도,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음사(淫祀)를 더욱 좋아한다.”(同上)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 태도가 일정하지 않아 외래적인 것과 토속적인 것을 아울러 수용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는 국가 제도와 학술 문화 등을 국제적 수준으로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兄死妻嫂).”, “그 풍속이 가무를 좋아해, 국중읍락(國中邑落)의 남녀가 매일 밤 떼로 모여 노래하고 놀이한다.……호음(好淫)해 남녀가 서로 꾀이기에 바쁘다.”고 기록되고 있는 만큼 전통적인 관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중국 사가(史家)의 안목에서 볼 때 어떤 것은 유교 문화적으로 의젓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윤리 도덕이 없이 해괴망측한 모습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민족성이 타율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활달한 것을 좋아하는 기질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도읍을 여러 번 옮기면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백제는 옛 마한지방으로 남하해 잡다한 종족을 통합해 국가 발전을 이룩했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에는 마한의 유풍인 ‘소도지의(蘇塗之儀)’가 행해졌다고 최치원이 지증국사비(智證國師碑)에 기록했듯이, 삼한시대의 고속(古俗)이 계승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유교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를 전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백제의 영지(領地)가 토속성이 짙었던 마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위지(魏志)』 동이전에 의하면, 마한은 “그 풍속이 강기(綱紀)가 없었다. 국읍에 주수(主帥)가 있었으나 읍락이 잡거(雜居)해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였다. 조아려 절하는 예(跪拜之禮)도 없었고, 거처는 초옥목실(草屋木室)로 분총(墳塚)과 같이 생겼는데 출입문이 위로 나 있었다. 대가족이 함께 살았는데 장유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 장사지낼 때 관(棺)은 있고 곽(槨)은 없었다.”고 하였다. 국가적 통제나 정제된 예속의 규범 이전의 본래의 자연 생활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와는 달리 『주서』 백제조에 보면 “그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했고,……배알하는 예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경의를 표하였다. 혼례는 중국의 풍속과 거의 같았으며, 부모와 남편의 상에는 삼년복상하였다.”고 한다. 백제는 유교를 기반으로 국가 체제를 갖추어 강성한 국가로 성장함에 따라 국가의 통제력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모든 제도를 구비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나라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의 동남벽지에 위치해 국가의 발전이 늦고 대륙과의 소통도 고구려와 백제의 매개를 힘입어야 했다. 신라가 고구려 · 백제와 나란히 국제적 수준으로 성장하기까지 긴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비교적 후기의 기록인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삼국이 통일될 즈음이 되었을 때 신라는 “풍속 · 형정 ·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 뒤 신라 문화에 대한 인식은 매우 달라져서, 당 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는 군자지국(君子之國)이란 칭호를 듣고 있어서, 자못 문헌을 아는 것이 중국과 유사하다.……그곳에 가거든 경전의 뜻을 잘 천명하여 대국의 유교가 성함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말하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는 소규모의 고유한 전통을 바탕으로 출발해 나름의 특성을 지니면서 성장하였다. 신라는 산신에게 제사지내기를 좋아했고, 일신 · 월신을 숭배하였다. 또한 사람의 성에는 김 · 박 양성이 많은데 타성간에 혼인하지 않았으며, 사람이 죽으면 관에다 염장(殮葬)했는데 분릉(墳陵)을 쌓았고, 왕과 부모처자의 상에는 1년 상을 지낸다고 하는 것은 신라의 고속(古俗)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정사의 처리에서도 한갓 전제적 방법으로 수행되지 않았으니, 중대한 일이 있으면 여러 부파(部派)가 모여 합의 · 결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양서(梁書)』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엄중한 죄인을 판결할 때에는 제가(諸加)가 의논해 평결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의 화백(和白)에 대해 “일을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한다. 1인이라도 이의가 있으면 파의(罷議)하였다(唐書).”고 하였다.
신라는 4세기 이후 내물 · 눌지 · 지증 · 진흥왕대를 거쳐 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 고유한 습속을 바탕으로 외래 문물을 접촉하고 수용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고구려 · 백제가 붕괴됨으로써 중국과의 교류를 가로막는 장애가 없어짐에 따라 중국과의 교류는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동방에 삼국이 정립해 싸웠던 삼국시대에 중국은 동국(東國)보다도 복잡하였다. 후한이 멸망(220)한 뒤 당나라가 창건(618)될 때까지 약 400년간 중국은 가장 복잡한 시대였다. 삼국시대(三國時代)를 거쳐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과 동진(東晉) 및 송제양진(宋齊梁陳)과 북위서위(北魏西魏)의 남북조(南北朝) 그리고 수(隋)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은 어수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를 지나 통일된 당제국과 통일신라의 역사적 상황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한중 관계는 보다 안정적으로 되어갔으며, 신라는 유교 문화를 비롯한 중국 문화를 직접적으로 대량 흡수하게 되었다.
셋째 삼국시대에는 특정 문화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유 · 불 · 도를 골고루 섭취하였다. 학인(學人)들의 성향에 따라 유교에 치중하기도 하고 도 · 불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개인의 경우에도 여러 사상을 두루 섭렵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고구려는 이미 유교 문화적 기반이 있었지만, 소수림왕 2년(372) 유교 경전을 위주로 하는 태학을 세웠고, 같은 해에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입하였다. 또한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시(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가운데 ‘천문’과 ‘지리’는 『주역』 계사전에서, ‘지족(知足)’은 『도덕경』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승려로 일본 호류사(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畫)를 그린 담징(曇徵)은 오경을 알고 있었다. 백제의 왕인박사는 일본 학문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유교서와 도가서를 전달한 사람으로 밝혀지고 있다.
신라의 경우 신선을 숭상하고 불교를 좋아했던 진흥왕의 순수비에는 『논어』를 비롯한 유교적 색채가 짙은 용어들로 채워져 있다. 중국에 유학했던 원광법사는 “널리 삼장을 통하고 유술을 겸해 배웠고(博通三藏兼學儒術)”. 당나라에 걸병표(乞兵表)를 썼으며, ‘두루 유술에 통했다’고 한다. 태종무열왕의 제2자인 김인문은 “유가의 책을 많이 읽었고 노장과 불교의 설을 두루 섭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지성(金志誠)은 일찍이 벼슬해 영반(榮班)을 역임했면서도, ‘오천언(五千言)의 도덕경’을 읽고 ‘십칠지(十七地)의 법문(法門)’을 탐구함으로써, ‘명위(名位)를 버리고 입현(入玄)하며’, ‘색공(色空)을 구멸(俱滅)’하고자 한 뜻을 명각(銘刻)하였다. 이와 같은 사례는 고대에 외래 사상인 유 · 불 · 도가 학술과 수양과 신앙, 그리고 형이상의 심오한 진리와 현실적인 국가 경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한국 고대에 유교를 비롯한 외래 사상이 수용되었지만, 삼국은 주체성과 정통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였다. 삼국은 다같이 국가를 창건한 시조를 신격화해 제왕의 행사로서 경배하고 제사해 국가 공동체를 유지 · 발전시키는 근원적 구심점으로 삼았다. 고주몽(高朱蒙)과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신화가 일찍부터 전해왔듯이 각국의 시조묘 설치는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대무신왕 3년(20)에 동명왕묘를 세웠고, 영류왕 2년(619)에 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제사드렸다.
백제는 온조왕 즉위년(서기전 18)에 동명왕묘를 세웠으며, 아신왕 2년(393)과 전지왕 2년(406)에 각각 왕이 동명왕묘에 배알하고 남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했던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경조숭천(敬祖崇天)의 의례가 중국적인 방식과 습합되어 시행되었다. 신라의 경우 정식으로 시조묘를 세운 것은 제2대 남해왕 3년(6)으로서 42대 흥덕왕 9년에 이르기까지 왕이 시조묘에 배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21대 소지왕 9년(487)에 신라 시조의 탄생지인 내을(奈乙)에 신궁을 지은 이래 55대 경애왕 2년(925)에 이르기까지 20대에 걸쳐 신궁에 관한 기사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신묘(神廟)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부여신이라 하여 부인상(婦人像)으로 하백녀(河伯女)를 상징하고, 다른 한 곳은 등고신(登高神)이라 하여 주몽을 뜻한다고 한다(周書). 또한 10월 제천(祭天)행사는 유명하다. 백제 역시 매 4중월(仲月)에 왕이 ‘천 및 오제지신(五帝之神)’에게 제사지내고, 연 4회 시조신에게 제사지냈다 한다(隋書 東夷傳). 그 밖에 『삼국유사』에 의하면, 영험한 비적(祕蹟)에 힘입어 재상을 뽑았던 백제의 정사암(政事嵓)과 나라가 성할 때 신인(神人)이 거주 · 내왕했다는 3산(三山:日山 · 吳山 · 浮山), 국가대사를 의논했던 신라의 사영지(四靈地 : 東 靑松山 · 南 于知山 · 西 皮田 · 北 金剛山), 임신서기석에 새겨진 하늘 앞에 맹세하는 신라 청년들의 생생한 모습 등은 삼국시대에 영산을 매개로 하늘과 소통하고자 했던 고인들의 갈망을 볼 수 있다.
이상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자기의 시조신을 숭배하고 하늘제사를 드리는 등 국가의 명운(命運)을 빌고 공동체의 기반을 다졌다. 삼국시대의 중기 이후 통일기에 가까워질수록 중국 유교식 제도가 유입되었지만, 삼국은 모두 국가의 기원과 민족의 뿌리를 잊지 않고 주체성에 입각해 외래 문물을 받아들였다.
다섯째 유교와 화랑도의 관련성을 성찰함으로써 외래 사상과 고유 사상이 융합하는 뚜렷한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화랑도’란 후세에 붙인 이름이고 원래는 풍류(삼국사기 · 삼국유사) 또는 풍월도(삼국유사)라 했으며, 이것이 화랑도 정신의 뿌리였다. 화랑 가운데 대표자를 국선(國仙)이라 하였다. 최치원 당시만 하더라도 화랑도의 역사를 적은 『선사(仙史)』가 있었다. 최초의 국선인 설원랑(薛原郎)의 비가 명주(溟州)에 있었고, 후세의 난랑(鸞郎)의 경우 최치원과 같은 명망있는 학자가 비문을 쓸 만큼 존숭되었다. 국민들이 화랑 국선을 매우 존경했을 만큼 그 위치는 범상하지 않았다.
삼국이 통일되기 1세기 전에 화랑도를 중창한 진흥왕은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모름지기 풍월도를 먼저 해야 한다(삼국유사).”고 하였다. 그 당시에 이미 있었던 풍월도와 유사한 형태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풍월도는 이미 유교와 도교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진흥왕 당대에 외래의 3교를 통합해 ‘풍류’ 또는 ‘풍월도’가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치원의 기록에 의하면, ‘풍류’ 속에는 유 · 불 · 도 3교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화랑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되어 오면서 유 · 불 · 도의 내용을 흡수해 ‘현묘지도(玄妙之道)’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김부식이 ‘풍류’를 기록할 때 『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에 화랑도를 인용했고, 일연(一然)도 『삼국유사』에서 풍월도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풍류는 본래 공자 · 노자 · 석가의 교지(敎旨)를 포함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유교사상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의 현상과 반응을 일으켰다. 유교는 ‘유교인’이라는 특정 집단이나 종파성을 띠지 않았다. 유학자라고 해도 타사상과 모순 · 대립 · 배척 · 갈등의 관계에 있지 않고, 한 사람이 다른 것들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화랑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풍류가 한국고유의 전통에 연원하는지 유 · 불 · 도 사상의 묘합에서 성장된 것인지 그 기원이 분명하지 않지만, 유 · 불 · 도 사상이 그 속에는 혼입되어 있다.
여러 사상과 융합되어 있었던 유교는 개인의 교양 · 가정 도덕과 사회 윤리 · 정치 제도 · 교육 · 문화 · 국가의 방위 등 실질적인 측면에서 기여하였다. 한국사상의 유교화인가? 유교의 한국화인가? 중국 유교와 한국 유교는 사상사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는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기기는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랜 기간을 거쳐 유교는 이미 한국에 토착화되고 체질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는 10세기 초 태조 왕건(918∼943)에 의해 창건되어 14세기말 공양왕(1389∼1392)까지 475년 간 지속되었다. 고려가 건국할 무렵에는 신라가 후백제와 태봉(泰封, 또는 후고구려)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왕건은 태봉의 장수로서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창업하였다. 고려에 신라가 부속되고 후백제가 항복함으로써(936) 삼국은 다시금 통일된 고려국으로 탄생하였다. 고려시대에 중국과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당나라의 멸망(907),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북방 거란족(契丹族)이 요나라를 세움(916∼1125), 중원(中原)에 송나라 건국(960). 여진족의 금 건국(1115), 북송의 멸망(1127), 다시 몽고제국(元) 성립(1206), 금나라 멸망(1234), 남송의 멸망(1279), 명나라 건국(1368), 원나라 멸망(1368) 등 한족과 동북의 주변 제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따라서 고려왕조의 대외 관계도 정치 · 군사적으로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성립은 한국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당시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시켰다. 둘째는 원삼국(原三國)으로의 귀속적 성향을 불식하고 완전히 통합된 단일 민족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과거의 신라국이 아닌 고려국의 처지에서 원삼국 시대의 실체를 근본적으로 파악해 민족의 뿌리를 분명히 찾고 삼국의 ‘본기(本紀)’를 객관적 · 사실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통일국가인 고려는 수많은 내우외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 초부터 긴장 관계에 있던 거란은 성종∼현종대에 걸쳐 10에서 40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쳐들어왔다. 화전양면(和戰兩面)으로 극복하기는 했지만,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는 등 외부의 위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다. 후기의 몽고 침입은 고종 18년(1231)에 시작해 고종 44년의 제7차까지 침구(侵寇)하였다. 고려는 개경환도에 이르기까지 40년 간 항쟁했지만, 국토의 유린과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1259년 대원(對元) 항복 의사 전달에 이어 원종 11년(1270) 개경 환도 이후 100년 간 몽고의 간섭과 압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고려 중기를 지나 수많은 반란을 겪어야 했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1127), 묘청(妙淸)의 난(1135), 의종(1170) 및 명종(1173) 때 정중부(鄭仲夫) 등의 난이 있었다. 마침내 명종 26년(1196)에 최충헌(崔忠獻)으로부터 시작되어 최의(崔竩)의 사망에 이르기까지(1258) 60여 년 동안 최씨 정권이 들어서서 일종의 막부정치(幕府政治)가 실시되었다. 그 사이 국내 곳곳에서 일어났던 공 · 사노비 · 농민 · 군인 등의 민란과 삼별초의 난 등 수 많은 사태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 송의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 · 교육 · 윤리 · 학술 · 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 · 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 · 교섭 · 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고려시대의 유교를 관찰하기 위해 편의상 전후기로 분류하고, 다시 전기를 태조(918∼943)부터 정종(1034∼1046)까지를 제1기로, 문종(1046∼1083)부터 의종(1146∼1170)까지를 제2기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다시 후기를 명종(1170∼1197)부터 원종(1259∼1274)까지를 제3기로, 충렬왕(1274∼1308)부터 공양왕(1389∼1392)까지를 제4기로 구분하였다.
태조∼정종의 129년 간이다. 태조는 후삼국을 평정한 다음 바로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친히 지어 반포하였다(936). 이로부터 태조 왕건의 문한 능력(文翰能力)을 알 수 있다. 태조의 「훈요십조」는 고려시대의 헌장이라고 일컬어지며, 고려 일대의 사상 풍토를 알려주는 기록이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유 · 불 · 도 및 재래의 토속신앙 등을 폭넓게 포섭해 정치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훈요십조」에 의하면, 고려의 창업은 부처의 힘과 삼한산천(三韓山川)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이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사원(禪敎寺院)의 건설과 연등 · 팔관을 행하고, 도교적 풍수설을 원용하는 등 종교적 기반 위에서 국풍을 세워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하였다. 「훈요십조」의 3 · 4 · 7 · 9 · 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즉 왕위계승에서 재래의 골품제도와는 달리 요순의 선양설(禪讓說)을 이상적인 것으로 찬양하였다. 이것은 『예기』의 이른바 세급(世及)의 원리 즉 적자전국(適子傳國)을 원칙으로 하면서, 형제수선(兄弟授禪)도 함께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봉록제도(俸祿制度)의 합리적 보장과 경요박부(輕徭薄賦)를 실시해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실시할 것을 말하였다. 특히 제10조에 이르러서는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 것을 거울삼고 오늘날을 경계하라”고 당부하면서 후세의 왕자들로 하여금 『서경』에 나오는 주공(周公)의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걸어놓고 출입할 때마다 살펴 위정의 표본으로 삼도록 당부하였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대에 계승 · 발전된다. 광종(949∼975)은 당대(唐代)의 정치적 요전(要典)인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숙독했다고 한다.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를 중용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설치해 진사과 · 명경과 · 의복(醫卜) 등을 두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과거제도의 시작이었다. 이는 후백제와 고구려계의 지식인들까지도 고려 관료제의 내부로 흡수시키는 방도가 되었고, 지방 호족들의 중앙 관료화를 촉진해, 유교적 문치주의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백관의 공복을 제정해 중화(中華)의 제도를 좇도록 한 것 또한 특기할만하다.
성종은 유교를 숭상해 공자와 주공의 풍을 일으키고, 당우(唐虞)의 정치를 이루려고 하였다. 성종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최승로는 그의 유명한 「시무28조」에서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내생(來生)의 자(資)이며, 유교는 치국의 근본이요 현세의 무(務)이다.”고 하여 유교를 기반으로 한 정교(政敎)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태조이래 제5대 경종에 이르기까지 군왕들의 득실 · 선악을 비평적으로 개진하였다. 그는 태조의 창업 정신을 존중하고 불교의 교리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다한 불교 행사나 고래의 토속 행사를 비판해 국가의 중요 행사였던 연등과 팔관을 폐지하게 하는 등, 경제적 낭비를 일으키는 불교신앙의 파생적 부작용과 도참 · 귀신 · 양재(禳災) 등 도교적이며 토속적인 민간신앙까지도 타파하고자 하였다.
태조대에는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웠고, 성종대에는 동 6년(987)에 경학박사 1인과 의학박사 1인을 12목에 두도록 하였다. 성종 11년에는 중앙에 국자감(國子監)을 창설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종합대학으로 국자학(國子學) · 태학(太學) · 사문학(四門學) 등으로 조직되었다. 국자감에서는 유교경전을 기본교재로 교육하여 유교문화를 크게 진흥하였다. 성종은 효를 강조해 치국의 근본은 효에 있다 하여 누구나 육경과 삼례를 통해 효로 돌아가야 한다고 권장하였다. 실제로 사회 교화에도 힘써 노약자를 구휼하게 하고 효자 · 순손(順孫)과 의부 · 절부를 표창하였다.
또한 성종은 송나라와 문화 교류를 텄으며, 박사 임노성(任老成)은 송으로부터 대묘당도(大廟堂圖) · 사직당도(社稷堂圖) 및 기(記) ·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 · 제기도(祭器圖) · 칠십이현찬기(七十二賢贊記) 등을 가져다가 헌상하였다. 이와 같이 성종대에 와서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신라의 선철 최치원을 동 11년 그리고 설총을 동 13년에 각기 종향하였다. 이는 동방의 승무(陞廡) 18현의 전통을 이루는 효시로서 한국 유교사의 맥을 형성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성종∼현종대에는 수 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고 체제가 잡혀갔다.
문종∼의종의 125년 간이다. 첫째 성종대에 국자감이 관학(官學)으로 설치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침체하고 사학이 크게 일어난다. 그 뚜렷한 사례로 11대 문종대(1046∼1083)를 즈음한 사숙(私塾)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이것이 이른 바 12공도(十二公徒)이다. 그 가운데에서 최충(崔冲)의 문헌공도(文憲公徒)가 가장 규모가 컸고 관학을 압도해 그 기능을 대신할 정도였다. 최충의 9재(九齋)와 12공도를 통해 구경삼사(九經三史)를 더욱 익혀 한문 문장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고, 시문 · 사장에 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과거를 보아 출사(出仕)하기도 하였다. 최충은 ‘해동공자’라 일컬을 정도였고, 최충의 9재는 우리 나라 사학의 효시로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사학의 발달에 맞추어 국가에서도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6대 예종(1105∼1122)은 국자감에 칠재를 두었다. 그 가운데 6재는 유학재(儒學齋)라 하여 각기 경전을 가르쳤다. 그 명칭과 내용은 여택(麗澤, 周易) · 대빙(待聘, 尙書) · 경덕(經德, 毛詩) · 구인(求仁, 周禮) · 복응(服膺, 載禮) · 양정(養正, 春秋)이었고, 나머지 1재는 무학재(武學齋)라 하였다. 예종은 스스로 선성(先聖)에게 헌작했을 뿐만 아니라, 백관 및 생원 700인과 더불어 『상서』 강의를 청하기도 했고, 국학의 장학 재단으로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해 학술 진흥과 교육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김인존(金仁存) · 박승중(朴昇中) · 김부식 등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시정책요』의 찬술 · 『정관정요』의 주석 · 『삼국사기』의 찬술 · 『역』과 『춘추』에 대한 저술 등의 학술 성과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인종대(1122∼1146)에는 학교 교육을 더욱 공고히 하여 학제를 상정(詳定)하는 한편, 과거제도 역시 확장 · 보완해 내실을 기하였다. 경내(京內)의 국자감에는 육학(六學 : 國子學 · 大學 · 四門學 · 律學 · 書學 · 算學)을 두고, 지방의 주 · 군 · 현에는 향학(鄕學)을 두었다.
품계가 높은 문무관의 자제가 배우는 국자학 · 태학 · 사문학에서는 구경을 대 · 중 · 소경으로 나누어 가르쳤고 『논어』 · 『효경』을 필수로 하였다.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층에게는 율학 · 산학 · 서학을 가르쳐 교육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또한 과거제도 역시 내용이 확장되어 제술과(製述科) · 명경과(明經科) 이외에 법(法) · 산(算) · 서(書) 등 기타 잡업(雜業)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문풍은 전성기에 달했지만, 과거시험에서 명경보다 제술을 숭상해 벼슬길에 오르는 일에 힘쓰고, 경학을 소홀히 하고 오로지 글짓기에 종사하는 경박부화(輕薄浮華)의 풍조를 낳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문인을 우대하고 무인을 멸시해 의종 말년에 이르러 무인 정중부 등에 의한 경계(庚癸)의 난(1170, 1173)이 폭발하게 하였다. 이때 많은 문사들이 죽고 일시에 문풍이 사라지게 되었다.
명종∼원종의 105년 간이다. 이 시대에는 무인들의 계사란(癸巳亂, 명종 3년, 1173) 이래 정중부 · 이의방(李義方) · 경대승(慶大升) · 이의민(李義旼) 등이 쟁패해 번갈아 득세하였다. 명종 26년에 최충헌이 집권해 고종 45년(1258) 최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완전한 무인정권 시대였다. 그 뒤 원종 11년(1270) 무인 세력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100년간은 국가가 온통 무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난의 초기에는 많은 선비가 죽거나 산간 불사(佛寺)로 도망했고,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멸절되다시피 하였다. 그 뒤 최충헌 · 최이(崔怡)의 보호 정책에 의해 일부 문사들이 차츰 소생했으나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최씨 정권하의 30년 간은 몽고 침략군과의 항쟁기였고, 그 뒤 100년 간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 · 이규보(李奎報) · 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이인로는 저서로 『은대집(銀臺集)』 20권, 『후집(後集)』 4권, 『쌍명재집(雙明齋集)』 3권이 있었고, 현재는 『파한집』 3권이 전한다. 그는 시세를 보아 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도피적 경향을 띠었다. 그와 종유(從遊)하던 이른 바 망년우(忘年友) 7인을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 불렀다. 이는 진대(晉代)의 청담(淸談)을 일삼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문하시랑에 올랐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을 지었고, 「동명왕편(東明王篇)」의 작자로 유명하다. 그 역시 ‘강좌칠현’과 교유하였다. 「외부(畏賦)」 · 「방선부(防蟬賦)」 등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당시의 파행적 세태를 비평 · 풍자하였다. 최자는 『보한집』의 작자로 문장의 조탁에 종사하였다. 그는 시를 지어 음풍농월이나 일삼았던 문인들의 폐습을 지적하였다. 제왕은 마땅히 경사(經史)를 근본으로 정사를 펴고 풍화성속(風化成俗)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평장사(平章事) · 지공거(知貢擧) 등 상당한 벼슬을 하였다. 지금까지 열거했던 이들은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충렬왕∼공양왕의 고려 말 119년 간이다. 첫째로 이 시기는 자주성을 잃고 100여 년에 걸쳐 원의 지배 하에 통제와 간섭을 받던 때이다. 고려는 충렬왕 때부터 원의 공주나 몽고 여자를 왕비로 삼았기 때문에, 고려왕은 원 황실의 사위요 외손이 됨으로써 고려는 부마국(駙馬國)이 되었다. 고려 땅의 일부는 원의 직속령이 되기도 했는데 공민왕 때 탈환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그것이다. 왕세자는 연경(燕京)에 머물러 인질이 되었고, 즉위한 뒤에도 여러 번 왕래하며 수년간 개경(開京)을 비우기도 하였다. 왕의 칭호나 묘호도 격하되었고, 관제도 통폐합되었으며, 임금이 몽고식 변발과 복식을 했고, 몽고말을 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인적 · 물적 징구(徵求)로 나라사람들을 궁핍하게 하였다. 고려는 구차스러운 안정을 얻었고, ‘고려’라는 국호를 간신히 존손시켰을 뿐이었다.
둘째로 정주 성리학이 전래되고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충렬왕 6년(1280)에 국자학생을 위해 최옹(崔雍) 등 7인을 경사교수(經史敎授)에 임명했고, 동 22년(1296)에 경사교수도감을 두고 7품 이상의 관인(官人)을 학습하게 하였다. 이러한 계속적 조처는 침체되었던 경사와 학술을 진흥시키려는 의도였다.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원나라의 연경에 가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주자의 ‘신서(新書)’를 접하고는, 이것이 학문의 정맥(正脈)이라 하여 연구에 몰두해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다. 안향은 국학에 섬학전(膽學錢)을 두었고, 중국으로부터 공자와 72현의 초상 및 제기 · 악기와 경사 등의 문헌을 구해왔으며, 대성전(大成殿)을 완성하였다. 안향에 의해 주자학을 기본으로 경사를 널리 탐구하는 학문 전통이 뿌리내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이정(白頤正)은 안향에 이어서 연경에 10여 년 동안 머무르며 정주 성리학을 연구했고, 귀국 후 이제현 · 박충좌(朴忠佐)와 같은 선비들에게 그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 밖에 우탁(禹倬)은 정자의 『역전(易傳)』을 연구했고, 권보(權溥)는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했으며, 이곡(李穀)은 도학을 연구하였다.
셋째 고려 말의 주자학의 전개와 사회적 기능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색은 이곡의 아들로서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태어나 조선 태조 5년(1396)에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주자학이 들어온 지 50년이 지난 때로부터 고려조의 마지막 50년에 활동했던 전환기적 시대의 역사적 증인이다. 이색은 학문의 폭이 넓어서 경학과 성리학 · 도학과 문학 · 유학과 불교 · 학문과 벼슬을 겸비한 홍유석학(鴻儒碩學)이었다. 신구의 학문을 한 몸에 지니고 전후시대를 연결해 국학을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구용(金九容) · 정몽주(鄭夢周) · 박상충(朴尙衷) · 박의중(朴宜中) · 이숭인(李崇仁)은 모두 그 밑에서 교수되었으며, 정도전 · 권근 · 하륜(河崙) · 길재(吉再) 등의 수많은 명류(名流)가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 이들은 여말의 신진학자들로서 시대를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역사적 인물들이다. 이제 제4기, 특히 그 후기에 이루어졌던 특징을 주자학과 관련해 살펴보자.
① 불교에 대한 교단적 · 교리적 비판이다. 종래에는 유 · 불 · 도가 상충하는 관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유교를 높이고 이단을 배척하는 주자학이 들어온 후에 사정이 달라졌다. 안향은 그의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에서 “성인의 도는 일용윤리(日用倫理)에 불과하다.……저 불자들은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고(棄親出家) 멸륜패의(蔑倫悖義)하니 곧 이적(夷狄)의 유(類)이다.……내가 일찍이 중국에서 주자의 저술을 얻어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선불지학(禪佛之學)을 물리쳤으니, 공이 족히 공자와 짝할 만하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고 한다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제생은 ‘신서(新書)’를 열심히 배우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색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찬양하지만, 불교 교단의 팽창과 타락상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비판하고 그 폐단의 시정을 주장하였다. 정몽주는 고려 말 유학의 종장으로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는 칭호를 듣는다. 그는 불교가 현실 세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론을 결핍하고 있다고 보아 불교의 정치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박사 김초(金貂)와 유생 박초(朴礎)는 불교를 반인륜적 · 반국가적인 것으로 규정해 척결해야 한다는 극렬한 주장을 펼쳤다. 이는 불교를 신봉하고 불계(佛戒)를 받았던 역대 제왕의 눈에 거슬려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저술을 통해 불교 배척의 이론을 폈으며, 권근은 여기에 자세한 설명과 주석을 붙였다.
이와 같이 친불유자(親佛儒者: 불교에 친한 유학자) · 지불유자(知佛儒者: 불교를 아는 유학자) · 반불유자(反佛儒者: 불교에 반대하는 유학자)를 막론하고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 배척적 위치에 있었다.
② 사장(詞章) 위주의 ‘말학(末學)’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근본’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인종대에 송나라 사람인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당시 고려의 문풍에 대해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학에는 공부가 없었다. 문장을 보면 당의 여폐(餘弊)를 방불하였다.”고 하였다. 송의 문풍이 들어오면서 문구의 조탁에 얽매이던 사륙체 따위의 풍습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나타났다. 김부식 · 김부철(金副轍) 등은 동파문학(東坡文學)의 영향을 받아 신선미를 갖게 되었는가 하면, 임춘(林椿) · 최자 등은 경사문체(經史文體)나 한대의 고문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는 사장이 발달한 시대로서 유자들도 문장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특히 무신집권 하에서 문예 방면에 힘쓰고 문장의 조탁으로 흐르는 일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사류들은 모두 부허(浮虛)한 사장지학(詞章之學)에 힘쓰기를 그만두고 질실(質實)한 경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안향은 처음부터 육경과 사적(史籍) 그리고 경사와 주자서 등을 중국에서 구해 와 국학에 존치(存置)하였다. 그는 학교를 일으키고, 경사와 주자서의 독서를 강조하였다. 우탁은 “경사(經史)에 밝고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고려사 열전)”. 이제현은 “사장을 좇던 이들이 모두 명경지사(明經之士)가 되도록 해야 할 것(역옹패설)”이며, “집집마다 정주(程朱)의 책이 있어 성리지학(性理之學)과 교지지도(敎之之道)를 알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익재난고)”이라고 하였다.
이색은 당대 제1의 문장가였지만 사람들이 “시를 외우고 글을 읽되(誦詩讀書) 도를 좋아함이 깊지 못하고, 번화하게 꾸미는 다툼이 이미 심하다. 장구(章句)를 조탁함이 너무 지나치니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은 어디에 있겠는가(고려사 열전).”라고 하였다. 그는 성리설을 이해했고, 『주역』 · 『중용』 같은 경서를 풀어 논술하기도 하였다. 정몽주는 “사장은 말예(末藝)이며, 신심(身心)의 학이 있으니, 그 학이 『대학』 · 『중용』에 있다.”고 하였다. 정도전은 이색에 대해 성균관을 이끌면서 “성리학을 밝히고 부화한 풍속을 내침에 선생을 발탁하여 학관(學官)을 삼고 경학을 강론하게 하였다(圃隱奏使稿書).”고 기록하였다. 조준(趙浚)은 향교의 교육에서 사서오경을 읽히고 사장읽기를 허락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고려 명인 중에 문장가 아닌 이가 없겠지만, 고려 말의 주자학자들은 한결같이 사장의 말폐를 지적하고 경학 장려를 주장하였다.
③ 고려 말의 사류들은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는 국초부터 대외 관계에서 중국의 선진 문화는 받아들이지만, 야만적인 정복 국가에 대해서는 결연히 배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태조의 「훈요십조」에서도 옛부터 우리는 ‘당풍(唐風)’을 사모하여 예악문물이 그 제도를 따랐음 밝혔다. 그러나 중국과 고려는 지역과 인성이 각기 달라 구차스럽게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고도의 문명을 받아들이되 민족의 체질에 맞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태조는 거란은 “금수의 나라요, 풍속과 언어도 다르니 의관제도(衣冠制度)를 본받지 말라”는 유지를 내렸다. 또한 태조는 폭력으로 침략을 일삼은 거란에 대해 폐물(幣物)을 거절하고 사자(使者)를 잡아 가두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 뒤 성종 · 현종 때는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 주변에서 송 · 금이 일어나고, 금이 북송을 멸했어도 고려는 의연하였다.
고려는 태조의 창업 정신을 지켜왔지만, 원의 침략으로 40년간의 오랜 항쟁 끝에 물리적으로 굴복하였다. 이후 왕실을 비롯한 귀족층은 정치적으로 원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북경을 수도로 하는 원나라는 중국 문화를 기초로 하여 발전해 갈 수밖에 없었다. 원의 수도인 북경[燕京]을 통해 입수된 주자학은 춘추의리학을 바탕으로 한 존왕양이의 화이론적 민족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뒷날 원세력을 몰아내고 명과 친화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게 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시세가 변해 중국에는 명이 건국되었고(1368), 고려는 명 태조에게 사빙(使聘)을 보냈다. 쇠미해진 원은 북쪽의 개평(開平)으로 쫓겨 북원(北元)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앞서 공민왕은 즉위 년에 몽고식 체두변발(剃頭辮髮)을 고쳤으며, 동 5년에는 원의 감독관청이었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철폐하고 원의 직속령으로 있던 동북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회복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였다. 또한 행패가 심했던 친원일파를 숙청하고, 구세력인 권문세가를 억압해 대내적인 개혁과 더불어 친명반원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국가 체제를 전향적으로 구축해가고 있었다.
주자학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사대부들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이미 읽고 있었으며, 이색 · 이숭인은 왕명에 의해 강목의 정신에 입각해 고려 역사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복속시켰던 원을 배격하고, 인의예악(仁義禮樂)의 보편적 인도주의를 표방한 명을 승인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며, 태조 이래의 전통 정신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박상충은 “무릇 신(信)을 버리고 역(逆)을 좇음은 천하의 불의이며, 강을 등지고 약을 향함은 금일의 비계(非計)이다(고려사 열전) ”고 하였고, 정몽주는 “우리 태조께서 당나라 말기에 일어나 중국을 예로 섬긴 것은 천하의 의주(義主)를 예로써 본받을 뿐이었다.……원사(元使)를 예접(禮接)함이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북원을 섬기자고 하는 이인임(李仁任) · 지대윤(池大奫)과 대립했던 박상충은 귀양을 가다가 죽었고, 정몽주는 언양에 유배당하였다.
④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조준은 그의 상소문에서 정치의 요체를 도학에 두어 ‘작성(作聖)과 치치(致治)’에 있다고 하고, ‘경(敬)’과 ‘공(公)’이 기본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은 요순의 학이며, 건중건극(建中建極)은 탕무(湯武)의 학이니”,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치도(治道)를 논정(論定)함으로써 광명의 학을 이룰 것”을 진언하였다. 또한 홍유석학과 더불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베풀어, 좌우사(左右史)로 하여금 언행을 기록해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며, 아침저녁으로 경적(經籍)을 탐구해 본원을 밝힐 것을 건의하였다.
하륜은 주자의 ‘인설(仁說)’을 병풍으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공양왕은 이를 환영해 “항상 좌우에 펴놓고 보아서, 충심으로 수성(修省)해 허물을 바루고 잘못을 고칠 것이니,……밖으로는 풍속의 성쇠를 보고 안으로는 군심(君心)의 선악을 생각하리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고려 말의 사류들은 군주로 하여금 유교인이 되게 하여 격군택민(格君澤民)의 전통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⑤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 · 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주자학이 수입될 즈음 안향이 국학을 재건하기 위해 섬학전을 두었다. 공민왕 때에는 성균관을 중수하고 이색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이 일어났다. 이에 수 많은 학자가 모여 학문과 교육 활동을 펼쳤다. 특히 정몽주는 “안으로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밖으로는 향교를 세워서 유술(儒術)을 일으켰다(고려사 열전)”. 또한 조준은 상소하기를 “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으로서 국가의 치란과 정치의 득실이 이것에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이런 흐름을 이제현의 소론(所論)은 총괄적으로 보여준다. “옛날에 태조께서 초매(草昧)에 경륜할 때 먼저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했으니, 한 번 서도(西都)에 행차하심에 곧 수재정악(秀才廷鶚)으로 하여금 박사로 삼아 육부(六部)의 생도를 가르치게 했으며……광종 다음에는 더욱 문교를 닦아 안으로는 국학을 높이고 밖으로는 향교를 베풀어서 이상(里庠)과 당서(黨序)에 현송(絃誦)이 들려, 이른바 문물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불행히 의종 말년에 무인의 변이 일어나서 옥석(玉石)이 함께 타서 호구(虎口)를 벗어난 자는 깊은 산으로 도망해 관대를 벗고 중의 옷을 입은 채 여생을 마쳤으니, 신준(申駿) · 오생(悟生) 같은 이가 이들입니다.……이제 전하께서 학교를 넓히고 상서(庠序)를 삼가하며, 육예(六藝)를 높이고, 오교(五敎)를 밝혀서 선왕의 도를 천명하시면 누가 진유(眞儒)를 반대하고 석자(釋子)를 추종하겠습니까?(고려사 열전)”라고 하였다.
조선조의 영조는 고려 태조가 서경에 창학(創學)한 것을 가리켜 “고려조 500년의 근기(根基)가 진실로 여기에 있다(太學志).”고 했듯이 학교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고려 말의 학교재건운동은 학술적 · 이념적 의미에서 지도적 인물을 배출하고, 유교사상을 보편화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⑥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재래의 의례 · 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로 변경하였다. 정몽주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고려사』에는 “시속(時俗)이 상제(喪祭)에 불법(佛法)만을 숭상하는지라 정몽주가 처음으로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를 모방해 가묘(家廟)를 세워 선조를 받들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라에서도 가묘를 세우도록 영을 내렸지만, 단시일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그 이전에도 사류 가운데는 이미 가묘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가례』는 사대부를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민간뿐만 아니라 종친에게도 그 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정몽주는 조정에서도 몽고의 복식을 고쳐 관복을 중국식에 따르게 하는 등 제도의 개혁을 주도했고, 공양왕 때에는 ‘신정률(新定律)’을 제진하고 6일간이나 진강하도록 했다고 한다.
⑦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전제는 국가 경제의 결정적 요인으로서 매우 중시되었다. 일찍이 맹자는 정전법(井田法)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정전(丁田)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23년(통일 후 4년째인 940)에 역분전(役分田)을, 경종 1년(976)에 전시과(田柴科)를 실시해 토지제도를 제정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는 국초로부터 전시과를 실시해 나름의 합리적인 전제를 운영해왔지만, 후기에는 제도가 문란해져 과점(寡占)과 겸병(兼倂)의 폐단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전제의 폐단과 개혁의 필요성은 식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일찍이 충숙왕 5년(1336)에 왕은 “공신의 사전(賜田)이 산천으로 표지를 삼아 받은 바가 날로 넓어지되 납세를 하지 않으며, 공부(貢賦)의 밭은 날로 줄어들고 있으니, 그 정수(定數) 밖으로 차지한 것은 조사해서 반납하도록 하라(高麗史 食貨志).”고 하여 폐단을 지적하였다. 귀족들의 토지 과다소유와 국가 경제의 위축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사원의 과다한 토지소유도 문제였다.
이색은 공민왕에게 상소하기를 “경계(經界)를 바루고 정지(井地)를 고르게 함은 치인(治人)의 선무(先務)라 하옵니다. 생각컨대, 우리 조종(朝宗)이 창수(創垂)하신 제도와 지수(持守)하신 규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나, 400년간 말류의 폐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중에서 전제(田制)가 더욱 심하옵니다.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호강(豪强)이 겸병하여 까치가 지은 집에 비둘기가 사는 것과 같습니다.……어떤 이는 말하기를 부자의 밭은 갑자기 뺏을 수 없고, 적년(積年)의 폐는 문득 고치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용렬한 임금이 할 바요, 전하에게 바랄 것은 아닙니다.”고 하였다.
이런 논리는 맹자의 “무릇 인정(仁政)이란 반드시 경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는 구절에 대한 주자의 풀이에 근거하고 있다. 주자는 “이 법이 닦여지지 않으면, 전(田)이 정분(定分)이 없게 되어 호강이 겸병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지(井地)가 불균하고 세부(稅賦)가 정법(定法)이 없어서 탐포(貪暴)한 자가 많이 취하게 되므로 곡록(穀祿)이 불평하게 된다. 인정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계에서 시작하고 폭군오리(暴君汚吏)는 함부로 폐한다. 경계를 바르게 할 수 있다면 분전제록(分田制祿)은 힘들이지 않고 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권근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재물은 백성의 심장인데, 전쟁과 천재로 백성들은 굶은 기색이 있고 들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며, 같은 밭에 주인이 2, 3명이나 있어서 다 각기 세금을 거둬가도 관리들이 금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 불쌍하고 외로운 백성들이 누구를 의지하며 뉘라서 이것을 바로잡아줄 것인가(高麗史 食貨志)”라고 탄식하면서 소를 올렸다.
공양왕 2년 9월 전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그것은 점진적 개혁이나 개선이 아니라,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불사르는 혁명적인 거사였다. 전제 개혁의 방법론에는 찬반론이 있었다. 이성계(李成桂) · 정도전 · 윤소종(尹紹宗) 등은 찬성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색은 쉽게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고, 이림(李琳) · 우현보(禹玄寶) · 변안열(邊安烈) · 권근 · 유백유(柳伯濡) 등은 이색과 같았다. 정몽주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였다. 전제의 개혁은 구질서 체제의 기반을 완전히 붕괴하는 혁명적인 사건인 만큼, 종래의 호족은 물론 당시의 사류들에게도 개량수정주의와 완전 개혁의 급진적 견해 사이에 방법론적 차이가 있었다. 양측간에는 정치적 충돌도 발생했고, 결과는 보수파의 패배와 급진파의 성공으로 끝났다.
⑧ 고려 말의 최종 단계에서 주자학파인 신진 사류들이 갈등 · 분열하게 되는 경위와 고려 유학의 종장이었던 정몽주의 위치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위화도회군이 있었을 때, 고려에 충성을 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경장론적 입장과, 고려의 명운(命運)이 다해 어쩔 수 없이 혁명으로 새 나라를 열어야 한다는 창업론적 견해의 갈등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우왕의 폐출과 창왕의 옹립 및 폐출에 따른 찬반과 이견, 토지 개혁안의 제청 및 시행에 대한 찬반과 갈등은 주자학파간의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불사르고 전국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신진 사대부 개개인의 처지와도 관계되는 사회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예민한 문제였다. 여기에서 보수와 진보의 세력으로 갈라지면서 귀양도 보내고 처벌도 하는 등 정치적으로 갈등하였다.
정몽주는 당시 유학의 종장으로서 대국적인 입장에서 매사에 신중하고 끝까지 견디며 용의가 주도하였다. 국내외의 어려운 사정을 모두 짊어지고, 명과 일본을 오가며 국가의 체통을 살렸다. 우왕과 창왕의 폐출을 찬성했고,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공양왕 2년(1390)에는 『주자가례』의 실시, 오부학당과 지방 향교 등 학교의 건립, 원복(元服)을 화복(華服)으로 바꾸고, 의창(義倉)을 두며, 다시 동 4년에는 신정률(新定律)을 제진하는 등, 내수외비(內修外備)로 왕실의 중흥을 꾀하고 국기(國基)를 다지고자 하였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서 고려의 사직(社稷)이 그 한 몸에 달려 있었다. 이성계는 문하시중(좌정승), 정몽주는 수문하시중(우정승)이었다. 정몽주는 왕씨(王氏) 고려를 끝내고 날로 권위가 높아가며 중외(中外)의 인심이 쏠리고 있는 이성계를 옹립 · 추대해야 한다는 조준 · 정도전 · 남은(南誾) · 윤소종 등을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였다. 이어 이성계까지 탄핵하려는 마지막 단계에서 오히려 급하게 반격을 받아 순절하게 되었다(공양왕 4년).
이러한 충격을 안은 채 같은해 7월 고려는 망하고 근세 조선조의 새로운 창업을 보게 된다.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는 많은 유학자들이 고려 수절신(守節臣)으로 충절을 지켰으니 이들을 ‘두문동(杜門洞) 72현’이라고 일컫는다. 이로 보아 고려에 대한 국가적 인식과 궁극적 신뢰가 아직도 두꺼운 지층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사류는 양분되고 골이 깊어졌다. 그들은 모두 주자학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신진 사류였지만,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 · 조준 · 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을 형성하였다.
이제 고려시대의 유교를 돌이켜 보면서 총괄적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고려 태조는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 · 도교적 습속과 민간신앙 · 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국가의 차원에서 정치 · 교육 · 윤리적 측면과 경사(經史)와 문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문화의 발달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태조∼의종)를 유교문화의 진흥기요 융성기라 한다면, 고려 후기(명종∼공양왕)는 유교문화의 퇴락 · 침체기를 거쳐 주자학 시대가 열리는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조선조 창건 1세기를 놓고 볼 때 태조 · 태종의 30년 간은 조선이 건국되어 정치적 · 사회적 안정을 다지는 창업기(創業期)였고, 세종 · 세조 · 성종의 70년간은 나라의 발전을 이룩한 수성기(守成期)였고, 제2세기를 맞은 연산군 · 중종 · 명종의 70년간은 국정이 허물어지고 진통을 겪는 사화(士禍)의 시기였다.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한 사공파(事功派)와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義理派)가 맥을 달리했고, 세조의 즉위 후 훈구파(勳舊派)와 그에 반대했던 절의파(節義派)는 서로 어긋나게 되었다. 사공파는 훈구파에 연결되었고 의리파와 절의파는 비판의식으로 합치하였다. 건국 1세기 동안 세조의 찬탈이라는 정변을 겪으면서도 국가를 발전시키고 선치(善治)를 베풀어서 중흥을 이루었다.
한편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 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중종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16세기 성리학의 발달은 한국철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창업 및 수성 과정에 있었던 주요 사항을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교 이념에 입각한 법전의 편찬이다. 이이(李珥)는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태조가 국운을 열고, 세종이 수성해 비로소 『경제육전』을 활용했으며, 성종조에 이르러 『경국대전』을 간행하였다. 그 뒤에도 수시로 입법하여 ‘속록’이라 이름 붙인 것은 그 시대를 따른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법전편찬왕조’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다. 태조대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을 제진했고, 다시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지었다. 조준 · 하륜(河崙) 등은 『경제육전』(1397)을 편찬하였다.
태종대에는 원(元) 『속육전(續六典)』(1413), 세종대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1433)이 나왔다. 성종대에는 『경국대전』(1471)이 완성되었고, 『대전속록(大典續錄)』(1492)이 나왔다. 중종대에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1543), 명종대에 『경국대전주해』(1555), 숙종대에 『수교집록(受敎輯錄)』(1698) 및 『전록통고(典錄通考)』(1706), 영조대에 『속대전』(1746), 정조대에 『대전통편』, 그리고 고종대에 『대전회통』(1865) 등이 나왔다. 그 밖에도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만들어 조선조의 실정에 맞도록 의용(依用)하였다.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조는 유교 입국으로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보더라도 유교의 왕도정치적 이념이 가득 차 있다. 특히, 전문(前文)인 ‘정보위(正寶位)’와 ‘헌전총서(憲典摠序)’의 내용에는 유교의 경전사상이 주자학적 해석으로 서술되어 있다. 생민(生民)을 위한 인정(仁政)을 주자의 ‘인설(仁說)’에 의해 해명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경국대전』 서(序)에는 법전의 제작이 천지(天地)와 사시(四時)에 비길 수 있고, 주관(周官), 『주례』와 표리가 된다고 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의 『대전회통』 서에도 역시 육전(六典)의 명칭이 『주례』에서 비롯되었고, 그 명칭이 수 천년이 되도록 바뀌지 않았던 것은 천지 사시에서 그 상(象)을 취해 관직헌장(官職憲章)에 적용했기 때문이며, ‘육(六)’은 ‘자연의 수(數)’이고 ‘전(典)’은 ‘당연의 칙(則)’이라고 하였다.
유교가 어떻게 국가적 · 사회적으로 응용될 수 있었는가를 고찰하는 데 법전의 탐구는 필수적 요소이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준거가 되었다.
둘째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 · 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중앙에 국자감과 지방에 향학을 두었지만, 고려 말에 다시 확장 · 발전되었다. 조선조가 창건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태조 7년(1398)에 국도(國都)의 동북쪽에 성균관을 낙성하였다. 문묘에는 중국의 제현을 중국식 제도에 따라 종향했고, 동국의 제현은 고려 제도에 의해 종사(從祀)하였다. 태조 스스로 문성왕묘(文成王廟)에 친사했고 전례와 악기를 익히도록 하였다. 문묘 북쪽에는 명륜당(明倫堂)을 세우고, 성균관제조 정도전과 권근으로 하여금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하도록 하였다. 양현고도 다시 세워 유생의 공궤(供饋)를 담당하게 하였다.
태종은 허조(許稠)로 하여금 석전의(釋奠儀)를 바로잡도록 하였고 알성례(謁聖禮)를 행하였다. 세종은 즉위 초에 곤면복(袞冕服)으로 알성례를 행했고, 1421년(세종 3)에는 왕세자의 입학례(入學禮)를 행해 이것이 상례가 되었다. 1475년(성종 6)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奠經閣)을 두어 오경사서(五經四書) 등의 전적을 비치했고, 1477년에는 친히 석전례(釋奠禮)를 드리고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1478년에도 ‘문선왕(文宣王)’에게 헌작하고 역시 대사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종의 알성은 1474 · 1475 · 1477 · 1478 · 1480 · 1482 · 1485 · 1487 · 1488 · 1492 · 1493년에 걸쳐 보인다. 성균관은 고려시대의 국자감을 계승했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인 의미와 비중이 훨씬 심대하였다. 국도에는 성균관 이외에 중 · 동 · 서 · 남 · 북의 5부학당(五部學堂)이 국초부터 설치되어 국고의 지원을 받았는데, 북학만은 세종대에 폐지되어 사부학당으로 남게 되었다.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 제주(諸州)에 학(學)을 세워 교도를 널리 행한데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의종 이후 국정이 문란해 학제가 퇴폐했지만, 충숙왕 때 다시 부흥시켰다. 조선조에 이르러 1392년(태조 1) 학교의 흥폐(興廢)로 지방관의 고과(考課)를 정하는 법을 세우자 교학이 쇄신되기 시작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향학(鄕學)을 부 · 목 · 군 · 현에 1개교씩 설치해 교수 또는 훈도(訓導)를 두고, 교생의 정원은 부 · 목 90, 도호부 70, 군 50, 현 30으로 되어 있었다. 1918년의 조사에 의하면 향교의 총수는 335개로 집계되어 있다. 향교는 성균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공자묘인 대성전과 강당인 명륜당으로 되어 있는 점이 같다.
성균관과 향교는 성리학으로 학생들을 양성해 그들이 국가의 동량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그러나 중기에는 국정이 문란해져 향교는 마치 과거 준비장소처럼 변질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원이 발달하였다.
셋째 조선 전기에 이룩된 학술 문화의 원리로서의 유교사상과 주자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조의 창업과 더불어 참여와 충절로 갈라지고 이것이 사공파와 의리파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지만, 유교 국가를 건설하자는 뜻은 마찬가지였다. 조선조의 입장에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 인정할 수 있었고, 고려 충신의 자제와 제자도 조선조에 출사하였다.
① 먼저 사공파의 경우이다. 정도전은 고려 말 유배시에(1375) 「심문천답(心問天答)」이라는 짧은 글을 써서 천인관계(天人關係)와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을 강조해 선악응보를 넘어선 유가의 의리 정신을 기술하였다. 조선조가 창건된 뒤에 다시 「심기리편(心氣理篇)」(1394)과 「불씨잡변(佛氏雜辨)」(1398)을 지어 ‘이단’을 비판하였다. 「불씨잡변」에서는 불교의 윤회 · 인과 · 심성 · 훼기인륜(毁棄人倫) · 지옥 · 화복 · 걸식 · 유불동이 · 벽이단(闢異端) 등 15편에 걸쳐 비판 이론을 전개하였다.
권근은 위의 두 책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붙였다. 그는 「불씨잡변」의 서에서 정도전은 맹자를 계승한 사람으로 “독립불구(獨立不懼)하며 정일자신(精一自信)하여 보통 사람 보다 크게 뛰어난 인재”라고 평하면서 스스로 존경심을 품고 배우고자 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 『경제문감』 등을 저술해 유교적 정교론(政敎論)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불씨잡변」 등으로 이단을 비판하고 유교 이념을 천명하였다. 이와 같은 이론 구성은 전적으로 주자의 성리철학에 기초한 것이다.
권근은 이색(李穡)의 제자이며, 조선조에 벼슬해 주로 문한(文翰)의 직에 있으면서 경국(經國)과 외교에 학술적으로 기여하였다. 『 양촌집(陽村集)』과 더불어 『입학도설(入學圖說)』 ·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 『동국사략(東國史略)』 ·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등을 저술하였으며, 경학과 사학 그리고 성리학을 겸통한 석학이었다. 그는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은 후세에 두고두고 영향을 주었다. 정도전이 실질적인 경세론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권근은 조선 초기에 있어서 학술적으로 크게 이바지하였다.
권근의 문인 권우(權遇) · 변계량(卞季良) · 맹사성(孟思誠) · 허조(許稠) · 김반(金泮) · 김종리(金從理) 등은 태종 · 세종대에 활동하였다. 김반은 조용(趙庸)의 문인 윤상(尹祥)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들 가운데 신숙주(申叔舟) · 이석형(李錫亨) 등은 세종 · 세조조의 문신으로 활약하였다. 김반은 『성리대전』 · 『이학제요(理學提要)』 · 『역상도설(易象圖說)』 · 『사서장도(四書章圖)』 등의 문헌을 읽어서 저술했는데 『속입학도설(續入學圖說)』일 것으로 추정된다. 권채(權採)는 『입학도설』이야말로 이학(理學)의 연원을 열어준 것으로 간주, 그것을 본떠 『작성도(作聖圖)』와 『도설(圖說)』을 지었다. 권근의 『입학도설』은 후세의 정지운(鄭之雲) · 김인후(金麟厚) · 이황(李滉) · 기대승(奇大升) 등에 의해 작성된 각종의 천명도(天命圖)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②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 김숙자―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 길재는 권근의 제자였지만 정몽주에게도 배웠고, 학풍으로 보아 정몽주를 계승한 의리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가 건국되자 은퇴하여 세상의 영욕에서 벗어나 향리에서 사숙(私塾)을 열어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는 유교의 기본 덕목인 효 · 제 · 충 · 신 · 예의 · 염치를 중시해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조선조 의리사상의 귀감으로 높이 추앙을 받았다.
김숙자는 길재의 문인으로 세종조에 성균관사예에 이르렀다.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세종에게 척불소(斥佛疏)를 올려 불교를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했고, ‘학규(學規)’를 지어 학문의 순차를 순서 있게 규정함으로써 정통적 유교 교육의 준범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김숙자는 강호로 돌아갔으나 그의 학문은 아들 종직에게 계승되었다. 김종직의 높은 문명은 특히 성종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 · 정여창(鄭汝昌)을 비롯해 김일손(金馹孫) · 남효온(南孝溫) · 강희맹(姜希孟) 같은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성종의 호문숭유(好文崇儒)에 힘입어 출사하였다. 이에 기존의 훈구파와 대립하는 형국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몽주와 길재의 문하였던 조용과 그의 제자 윤상은 성균관의 박사 및 장관으로 수 십년 간 재임하며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③ 세종조에는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학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다. 세종은 성왕이자 학자였다. 1420년 왕립연구소인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 · 사회 · 자연 · 과학을 망라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세종은 개인적 차원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불전도 간행했지만, 유교 국가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이는 그의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세종의 성스러우심은 전조(前朝)에 없었던 바이다. 국가를 안정시켜 정사가 때에 잘 맞았다. 유교를 숭상해(崇儒重道) 인재를 양육했으며, 예악을 제작해 후손에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니, 우리 나라의 다스림이 여기서 융성하였다. 오늘에 이르도록 그 유택(遺澤)이 남아 있으니, 우리 나라 만년의 운이 세종에게서 처음 그 기틀이 잡힌 것이다.”고 하여 세종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
세종대에는 계파와 학맥에 관계없이 모두 합심해 국가 발전과 학술 문화의 진흥에 힘썼다. 실제로 세종은 경사(經史)와 제자서를 두루 읽었으며, 그 가운데서 사서오경을 중시하였다. 세종은 경연에서 “나는 제자백가의 글을 원하지 않고, 다만 사서오경과 『통감강목』만을 돌려가면서 강독하기 바란다(세종실록 5년 9월).”고 하였다. 또한 『주역』 · 『성리대전』과 관련한 경연의 기사가 나오고, 또 세종 스스로 “여러 차례……그 내용을 읽어보면 자세하고 정밀해 실로 남김이 없다. ……특히 궁리 공부에는 사서오경과 『성리대전』이 더할 나위 없다.”고 하면서 중국에까지 종이와 먹을 보내 인쇄해올 방도를 강구하였다.
과거에도 사서오경 및 그 주석과 성리서가 들어와 탐구되었지만, 그와 같이 방대하게 체계적으로 집대성된 성리서가 전해온 것은 세종 초년에 이르러서였다. 명나라의 성조인 영락제(永樂帝) 13년(1415)에 『영락대전(永樂大全)』(일명 五經大全 · 四書大全 · 性理大全)이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처음 조선에 전해진 것은 4년 뒤인 세종 1년(1419) 12월 7일이었다.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던 경녕군(敬寧君)이 찬성 정역(鄭易), 형조판서 홍여방(洪汝方) 등과 함께 가지고 왔던 것이다.
세종 초기부터 유학 연구에 종전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집현전의 직제는 정1품으로부터 정9품에 이르며, 영전사(領殿事) 정1품, 대제학 정2품, 제학 종2품(이상 겸관), 그리고 부제학 정3품으로 했을 만큼 권위와 비중을 두었다. 세종대로부터 세조 2년에 이르기까지 집현전의 경력을 가진 학자가 90여 명에 달하고 있으니 당대의 명인들 대부분이 집현전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세종조에 이루어진 사업으로서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 · 서적의 편찬 · 음률의 제정 · 인정(仁政)의 실시 · 경사 · 천문 · 지리 · 의학 등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잘 짜여진 구조 원리에 입각한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이었다. 훈민정음은 사람의 발음기관의 “형상을 본떴으되 글자 모양은 고전(古篆)과 같게 하였다(象形而字倣古篆).”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하면, 그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학에 기본하고 있다.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④ 세조의 즉위와 관련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성종 연간에는 세종조의 치적을 계승해 중요한 치적을 많이 남겼다. 세조 때에 시작해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과 최초의 통사(通史)인 『동국통감』이 간행(1484)되었다. 세조대에는 『국조보감』 · 『동국지도(東國地圖)』의 편찬, 호적제도와 보법(保法)에 의한 국방 체제의 정비, 직전법(職田法)의 실시,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와 『오륜록(五倫錄)』의 찬수 및 기타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성종대에도 성균관에 존경각과 양현고를 설치하고, 향교에 지원을 확충했고, 세조 때에 없어진 집현전을 대신할 수 있도록 홍문관을 개편해 신진 사류를 영입하였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 『악학궤범』 · 『국조오례의』 · 『삼국사절요』 · 『동문선』 등을 찬술하는 등 건국 이래의 문화 전통을 집대성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현실주의적 훈신구가(勳臣舊家)들은 국가로부터 예우와 은전을 받았으며, 뒷날 훈구파를 형성하였다. 정인지(鄭麟趾) · 최항(崔恒) · 어효첨(魚孝瞻) · 신숙주 · 이석형(李石亨) · 양성지(梁誠之) · 권람(權擥) · 정창손(鄭昌孫) · 서거정 · 이극감(李克堪) · 한계희(韓繼喜) · 노사신(盧思愼) 등이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한편 계유정난에 이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고(1455), 단종의 복위가 실패함으로써 사육신과 70여 명의 연류된 피죄인이 나오게 되었다. 온갖 희생과 죽음으로 항거한 사육신으로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 하위지(河緯地) · 이개(李塏) · 유성원(柳誠源) · 유응부(兪應孚), 그리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생육신으로 김시습(金時習) ·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 조려(趙旅) · 성담수(成聃壽) · 남효온 등이 있다. 그들 절의파의 불 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조선 전기 훈구파들의 실무적 공적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현실주의적인 처신은 도덕적 비판의 여지를 안고 있었다. 훈구파의 맞은 편에는 고려말 이래 의리파와 세조 이후 절의파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조선조 전기의 나머지 70년 간, 즉 연산군∼명종 연간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훈구 및 사림의 대립과 4대 사화 발생하였다. 세종∼성종 연간에 이루어진 유교 문화의 성취는 연산군대에 와서 크게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무오사화(1498)는 공신계열인 훈구파와 의리를 주장했던 사림파가 대립에서 발생하였다.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편입했던 것을 빌미로 훈구파인 이극돈(李克墩)이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연산군을 자극해 의리파를 숙청하였다. 갑자사화는 왕실의 인척인 임사홍(任士洪)과 신수근(愼守勤)에 의해 일어났다. 그들은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의 사사(賜死)를 들추어 정부의 훈구 제신과 잔존 사림까지를 잔혹하게 처치하였다. 의리파를 무력하게 만든 상황에서 연산군의 횡음(橫淫)은 극에 달하였다. 성균관은 연락(宴樂)의 장소가 되었고 원각사는 기생들의 거처가 되었다.
중종반정이 전직 및 현직 훈구 대신에 의해 일어났다. 중종은 피화자(被禍者)를 신원했고 사림을 등용해 무너진 기강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신진 사류에 의한 도학정치(道學政治)가 실시되어 나라는 일시에 중흥지세(中興之勢)로 나아갔다. 그러나 남곤(南袞) · 심정(沈貞) · 홍경주(洪景舟) 등에 의해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일시의 사류가 희생되었다. 전대미문의 ‘지치중흥의 성업(聖業)’은 꺾이고 말았다.
기묘사화 이후 심정과 김안로(金安老)가 번갈아 전횡하고 난 뒤 중종 만년에는 기묘명현 등의 사림이 다시 복권되었다. 김정국(金正國) · 이언적(李彦迪) · 이황 등 사림파가 진출했고, 조광조의 직(職)도 추복(追復)되었다. 또한 현량과도 다시 설치하는 등 유풍(儒風)을 회복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명종 즉위 년에는 윤임(尹任) · 윤원형(尹元衡)의 정쟁으로 말미암아 비판 세력이었던 사림은 또 다시 수난을 당하였다.
외척인 윤원형의 주모로 정순붕(鄭順朋) · 이기(李芑) · 임백령(林百齡) · 허자(許磁)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유관(柳灌) · 유인숙(柳仁淑) 등 수많은 사류가 죽었다. 그 뒤 5, 6년에 걸쳐 100여 명에 달하는 사인(士人)이 죽거나 쫓겨났다. 따라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의 20년 간을 암흑시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기묘 · 을사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은 뜻을 펴지 못하고 향촌에 물러나서 학문을 닦았다. 이것을 계기로 16세기에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둘째 도학사상과 성리학의 발달이다. 도학은 넓은 의미에서 송대 성리학을 일컫는 것이다. 유교의 정통적 의미에서의 진유(眞儒)란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을 아우른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성취한 자를 뜻한다. 이이는 ‘행도(行道)와 수교(垂敎)’의 진퇴론(進退論)으로 진유를 규정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도학의 시작은 조광조이며, 이황에 와서 유자의 모습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조광조는 김종직 · 김굉필의 학맥을 이었고, 성균관에서는 유숭조(柳崇祖)에게 수학하였다.
김굉필은 실천 위주의 학문에 힘썼다. 스스로를 신칙하고, 후생을 훈도하고, 유도를 흥기시키는데 힘썼다. 입조(立朝)해서는 바른말을 하다가 무오사화로 유배당했고, 또 갑자사화로 희생되었다. 김굉필의 문하에는 조광조 이외에 김안국(金安國) · 김정국 · 이장곤(李長坤) 등이 있었다. 유숭조는 성균관의 사장(師長)으로서 후학을 계도했고 도학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이론을 전개하다가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 그는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와 『대학잠(大學箴)』 등을 저술해 이기사칠론(理氣四七論)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조광조는 청년 학자로서 사림의 영수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성리학과 도학 정신을 현실 정치에 실현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이이는 그의 『경연일기』에서 “문정(文正)이 비록 진퇴의 기(幾)에는 투철하지 못했지만, 이로부터 이학(理學)이 으뜸이며, 왕도가 귀하고 패도가 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유교(斯道)에 불멸(不滅)의 공이 있다. 후인들이 우러러봄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다.”, “우리 나라에 이학이 전함이 없더니 전조(前朝)의 정몽주가 비로소 그 단서를 열었고 아조(我朝)의 김굉필이 실마리를 잡았지만 크게 갖추지는 못하였다. 조광조가 창도(倡道)하매 학자들이 다함께 추존(推尊)하였다. 오늘의 성리학이 있는 것은 광조의 힘이다.”고 하였다. 이이의 말처럼 조광조는 우리 나라 도학의 ‘태산북두’였다. 조광조는 도학을 진작시키기 위해 김굉필 · 정여창 등을 추숭(推崇)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언적은 유교의 경학과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논술한 대학자였다. 그는 『대학장구보유』 · 「속대학혹문」 ·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 『구인록(求仁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일찍이 도가적 입장에 서 있는 조한보(曺漢輔)와 무극태극 논변을 통해 유교의 본령을 성리학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언적이 유도를 천명해 후세에 드리운(立言垂後) 공을 높게 평가하였다.
서경덕(徐敬德)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기철학자이다. 그는 성리학이 왕성한 시대에 기(氣)의 실재성을 강조했고, 기의 사실성을 떠난 관념만의 추상화를 부정했던 유기론자였다. 그는 「원이기(原理氣)」 · 「이기설(理氣說)」 · 「태허설(太虛說)」 ·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의 철학적 저술을 하였다. 그의 기수지학(氣數之學)을 포함한 자연철학은 자득(自得)한 경지가 있지만, 이황은 그의 자득한 바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의 철학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황은 우리 나라의 위대한 성리학자로 숭앙받고 있다. 그의 생애는 대부분 사화로 점철되었다. 출생 3년 전에 무오사화, 4세에 갑자사화, 19세에 기묘사화, 45세에 을사사화가 있었다. 또한 명종 20년간의 어두운 세월을 지냈다. 그는 조정에 서기보다는 물러나 학문을 닦고자 하였다. 50세 이후에는 학문에 주력해 수많은 저술과 편찬을 남겼다.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은 그의 역저이다.
그는 주자학에 거슬리는 학문에 대해 이단사설(異端邪說)을 논해 배척하였다. 「비이기위일물변증(非理氣爲一物辨證)」 ·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 ·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 등이 그것이다. 만년에 기대승과 7년에 걸쳐 사칠 논변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황은 후세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던 ‘이발이기수(理發而氣隨)’와 ‘기발이이승(氣發而理乘)’의 호발설(互發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성의 존귀성을 확신해 이존설(理尊說)을 주장하였다. 68세에 선조에게 도학사상이 담긴 『성학십도』를 제진했는데 여기에서 이황은 천인합일에 바탕해 경(敬思想)을 수양의 핵심으로 삼았다.
공맹 · 정주(程朱) · 조선조의 주자학적 전통을 종합하였던 그는 정치 현장에 나아가기 보다 학문과 교육을 통해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또한 이황은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는 서신왕래를 하여 감화를 주었고, 당대의 조야와 사림으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그로부터 많은 제자들이 나와 나중에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황과 동시대 학자로서 조식(曺植)을 들 수 있다. 그는 산림처사로서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선비의 청고(淸高)한 지조와 세사(世事)의 오류를 추상같이 질타하는 늠름한 기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리학 밖에도 노장을 포함해 경사자집을 섭렵하였다. 학술적 저작으로는 『학기유편(學記類編)』을 남겼다. 그의 문하에서 오건(吳健) · 정구(鄭逑) · 최영경(崔永慶) · 김우옹(金宇顒) · 정인홍(鄭仁弘) 등이 나왔다.
이항(李恒) · 김인후 · 노수신(盧守愼) · 기대승 등은 이황과 함께 이기심성설 등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이기(理氣)와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일원적으로 보느냐 이원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주장을 달리하였다. 혹은 출처와 인격을 두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성혼(成渾)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은 ‘성덕군자(成德君子)’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유교의 덕행인 ‘입덕(立德) · 입공(立功) · 입언(立言)’을 실천하였다. 이이는 “학문은 서경덕이 깊고 덕기(德器)는 성수침이 넉넉하다.”고 했고, 성혼은 “일세의 인물로서는 성수침이 제일이다.”고 하였다.
조선조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조선조 창건 170년이 지난 선조조에 이르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명종 말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쫓겨나 죽음을 당함으로써 정세가 급변하고, 을사사화 이후의 피죄인들이 소방(疏放)되었다. 명종 21년(1566)에는 정여창의 남계서원(籃溪書院)에 사액했고, 이황이 상경하였다. 선조가 즉위(1567)하면서 사림 정치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선조의 즉위 년 8월 을사사화 이래 피죄되었던 유희춘(柳希春) · 노수신(盧守愼) 등을 서용했고, 이듬해에는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추서하였다. 또한 남곤에게 주어졌던 관작을 삭탈하고 현량과를 복설(復設)하였다. 이황이 일시 대제학에 취임했고, 제왕지학의 진수로서 『성학십도』를 제진하였다. 1569년에는 이이의 『동호문답』이 제진되었고, 1570년에는 유관 · 유인숙 등의 역명신원(逆名伸寃)이 전개되는 등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선조 즉위 년을 전후해 이황 · 김인후 · 성수침 · 조식 · 이준경 등 석학숙유(碩學宿儒)들이 죽음에 따라 국기(國基)를 튼튼히 할 새로운 인재가 요청되었다. 이이는 『경연일기』에서 “아조(我朝)가 입국한 지 거의 200년에 달해 중쇠기(中衰期)가 되었는데 권간(權姦)들의 혼탁한 영향이 심해 오늘에는 마치 노인과 같이 원기가 다해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성상이 나타나셨으니 이때야말로 다스려지느냐 망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에 발분진흥하시면 우리 나라는 억만년 무한한 행복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궤멸에 이르러 구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또한 「상퇴계선생서(上退溪先生書)」에서 “국가가 고질에 빠진 지 20여년 남짓 모두 인순(因循)하여 조금도 개혁함이 없습니다. 오늘날 백성의 힘이 이미 다했고 나라의 저축도 비었으니, 만약 경장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어려워질 것입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지적하였다.
선조 이후 사림 정치가 열려 재래의 의리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 초이래 훈구파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와 훈구 대 사림의 시대를 지나, 사림이 완전한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선조조 처음 30년간은 서둘러 경장하지 않으면 국가의 장래를 보장할 수 없는 중대한 시기였다. 그러나 선조 8년(1575) 사림은 동서로 갈라지고, 이이의 중재는 수포로 돌아갔다. 사대부들이 국가적 위기를 절감하지 못하고 민생과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 · 명나라 · 일본 등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던 임진 · 정유의 왜란으로부터 조선은 많은 폐해를 입었다.
선조 말년과 광해군에 걸쳐 전후복구에 힘쓰면서 변동하는 국제 관계에 대응했다. 한편 무너진 문묘를 다시 세웠고(1602), 종묘를 중건했으며(1608), 사림의 숙망이었던 오현(五賢 :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 이언적 · 이황)의 문묘종사도 성취하였다. 이이가 죽은 뒤 국정은 붕당 정치의 양상을 띠었다. 선조조와 광해군 때 중심 세력이었던 동인(東人)들은 남인 · 북인으로 갈라졌고, 나중에는 대북 · 소북으로 파당을 지었다.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사라지기 전에 여진족은 후금(後金)을 세워(1616) 명나라와 대립했고, 조선은 명나라를 위하여 출병하게 되는 등 외교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또한 광해군의 멸륜난상과 인조반정(1623), 이괄(李适)의 난(1624), 그리고 10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같은 국가적 위난이 몰아닥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관군(官軍)과 명군의 정규군에 더해 선비들이 이끄는 의병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항복과 항전의 의견이 대립해 국논을 통일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몰락했고, 서인은 반정의 참여여부에 따라 공서(功西, 또는 勳西)와 청서(淸西)로 구분되었다. 그 뒤 정치적 갈등으로 노서(老西)와 소서(小西)로 갈리기도 했지만,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다시 하나가 되었다. 효종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북벌계획은 효종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현종대에는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간의 예송(禮訟)이 일어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였다. 유교는 의례를 매우 중시한다. 『국조오례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복제도(五服制度)는 상당히 복잡해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 논의해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 정쟁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숙종조 50년 간 당쟁은 치열해졌다. 숙종도 일관성을 잃어 궁중(宮中) · 부중(府中)에 많은 분규와 참화를 빚었다. 수많은 선비가 있었지만 옥석(玉石)을 가리지 못해 수난을 겪었다. 남인은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졌고 서인은 노론 · 소론으로 분열하였다. 숙종 말년에는 노론이, 경종대에는 소론이 집권하였지만 경종 초년의 임인옥은 조선조 중기의 말미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런 국난을 구제하기 위한 많은 노력 또한 있었다.
조선조 중기에는 유학의 도를 밝혀 선현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이 세워졌다. 주세붕(周世鵬)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효시로(1542), 이황이 서원을 중시해 국가의 지원을 받도록 함에 따라 크게 번창하였다. 한편 지역 사회의 미풍양속을 이루고자 향약이 권장되었다. 이황의 「예안향약」, 이이의 「서원향약」과 「해주향약」이 만들어졌다. 서원과 향약은 성리학을 전파하고 민풍(民風)을 순화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사회가 변동함에 따라 새로운 학풍이 대두하였다. 이이의 문하에 조헌(趙憲) · 김장생(金長生) 같은 인물이 나와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이황의 제자 유성룡(柳成龍) · 김성일(金誠一) · 조목(趙穆) · 정구 등은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초기 실학자인 한백겸(韓百謙) · 이수광(李睟光) · 유형원(柳馨遠) · 박세당(朴世堂)도 당대의 인물들이고, 이익(李瀷)도 숙종조에 태어났다. 양명학의 소질을 갖춘 최명길(崔鳴吉)과 장유(張維), 그리고 양명학의 태두인 정제두(鄭齊斗)도 당시의 인물이다. 성리학적 의리학파였던 조헌 · 김상헌(金尙憲) · 송시열, 예학자였던 김장생 · 김집(金集) · 박세채(朴世采) · 정구 · 정경세(鄭經世) 등이 있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과 관련해 권상하(權尙夏) · 이간(李柬) · 한원진(韓元震) · 이휘일(李徽逸) · 이숭일(李嵩逸)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에는 학파에 따라 여러 분야로 세분화되었다. 조선 중기의 유학사상과 학풍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이의 학문적 특징과 사상사적 위치이다. 이이는 이황보다 35년 뒤에 태어났다. 이이가 30세를 전후해 진출할 때는 명종 말년과 선조 초년이었다. 명종시대까지의 조선 전기를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는 정몽주 이래 조광조와 이황으로 내려온 의리파의 도맥(道脈)을 존숭하고, 국초 이래 사공파의 공적을 흡수해 그 이념성과 현실성을 통합적으로 인식하였다. 이황 · 성혼(成渾) · 송익필(宋翼弼) 등과 교류하며 학문과 도의를 논하였다.
철학적으로는 서경덕의 주기론(主氣論)과 이황의 이존설(理尊說)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이통기국(理通氣局)’과 ‘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내놓았다. 이기(理氣)를 분석해 현상으로서의 ‘소연(所然)’과 근저로서의 ‘소이연(所以然)’을 밝히고, 양자를 동시에 긍정해 이기불가리(理氣不可離)의 묘처(妙處)를 드러내었다. 이황은 사단칠정을 이발(理發) · 기발(氣發)의 호발(互發)로 보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분속(分屬)시켰지만, 이이는 ‘칠정(七情)’과 ‘기발’의 개념을 보다 확충적으로 파악해 사칠 및 인심 · 도심을 모두 그 속에 포함시켰다. 인간의 신체적 활동과 이성 및 심령의 작용이 현실을 떠나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의 관계에 대해서도 본연지성이 기질지성을 매개로 사단지정(四端之情)이 발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개인의 기질 변화와 사회 개혁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우국지성(憂國之誠)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개혁에 대한 많은 상소문을 올렸다. 또한 『동호문답』 · 『격몽요결(擊蒙要訣)』 · 『성학집요』 · 『학교모범(學校模範)』 · 『만언봉사(萬言封事)』 · 『경연일기』 등을 저술해 교학과 치세의 귀감이 되었다. 조선조 성리학은 이황 · 이이를 배출한 16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황은 단순히 주자학을 답습하지 않고 이존설을 주장해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내적 성찰의 방법을 통해 천명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인간적 고귀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이이의 우인(友人)으로서 성혼과 송익필을 들 수 있다. 이이의 성리학 연구는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증대되었다. 성혼은 독실궁행하는 도덕 실천에 근기(根基)를 두었으며, 송익필은 예학에 밝아 『예문답(禮問答)』 · 『가례주설(家禮註說)』을 지었고, 성리학 관계 논문인 「태극문(太極問)」을 지었다. 이이는 오직 송익필 형제만이 그 당시 성리학을 올바로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세 사람의 교류에 힘입어 이이의 제자들 중에는 일찍이 성혼과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도 많았다. 이이 · 성혼 · 송익필 문하에는 조헌 · 김장생 · 김집 · 안방준 · 김상헌 · 송시열 · 송준길 · 박세채 · 권상하 · 김창협 · 이간 · 한원진 · 조성기(趙聖期) · 임영(林泳) 등이 있었는데 나중에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둘째 이황의 문하와 조식 문하이다. 이황은 을사사화 이후 조정과 관직을 떠나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는 입조해 벼슬한 이도 많았다. 그 중 유성룡은 재상으로서 임진왜란을 치러내기도 했고, 김성일은 부제학과 경상도관찰사에 이르렀다. 또한 정구는 대사헌이 되었고, 이황을 오래 사사한 조목은 늦은 나이에 공조참판을 지냈다. 나중에 유성룡 계통은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중심으로 병파(屛派, 또는 屛論)를, 김성일 계통은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중심으로 호파(虎派, 또는 虎論)를 형성하였다. 병파는 정경세를 거쳐 유진(柳袗)― 유원지(柳元之)로 이어졌고, 호파는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 유치명(柳致明)―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졌다.
그 밖에도 퇴계학파로서 정경세 등의 예학이 발달하였다. 영남의 남인계로서 유성룡 · 김성일 이외에 정구와 장현광의 유파로서 ‘사소분파(四小分派)’를 이루었다. 정구의 문하에서는 이후경(李厚慶) · 서사원(徐思遠) · 황종해(黃宗海) · 허목(許穆) 등이 나왔고, 장현광의 문하에서는 김응상(金應相) · 정극후(鄭克後) · 유진 등이 나왔다. 퇴계학파는 대개 남인계열이 되었다.
은일한 산림처사로 기개와 절의로 의연한 풍모를 보여 주었던 조식 문인들 중 다수가 정계에 진출하였다. 동인이 남 · 북으로 갈릴 때 북인에는 이발(李潑) · 정인홍 · 최영경 · 정여립(鄭汝立) · 이산해(李山海) · 이이첨(李爾瞻) · 홍여순(洪汝諄) · 남이공(南以恭) 등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 조식의 문인이 많았다. 북인은 남인에 비해 정치적 입장이 강경해 낭패를 보기도 했지만,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다. 북인 계열은 선조 · 광해군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으로 활동적이며 과감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황과 조식은 정치현실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인조반정 이전까지 그들 문하의 제자들이 정계에 진출해 남인 · 북인의 시대를 형성하였다.
셋째 조선 중기의 의리사상과 충렬정신이다. 조광조 · 이황을 거쳐 이이에게 이어진 성리학적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외침에 저항하는 의리학파의 충렬 정신이 두드러졌다. 고려 말 정몽주의 충절, 조선 전기의 의리파, 사육신 · 생육신의 절의파, 사화기 시절 사림의 도학정신 등이 의리파의 범주에 속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의 의병 활동도 그러한 정신에서 이루어졌다. “춘추시대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었다.”고 하듯이 의리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거부한다. 동양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무고한 전쟁에 대해서 연합군을 형성해 토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과 명나라가 비록 대국과 소방(小邦)의 구별(分)은 있었지만 인도를 높이고 불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춘추의리의 이념에 있어서는 같았다. 화이론이나 존주론(尊周論)의 근본 정신도 여기에 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당해 조선이 국내외적으로 응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의리학에 연원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과 저항 정신에서, 그리고 효종대의 북벌론과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에서 의리학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 정병 10만을 양성하자는 이이의 주장이 있었지만, “아무런 일이 없을 때 병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를 키우는 것(養禍).”이라고 하여 거부되었다. 또한 5 · 6년 전부터 왜란에 대비하도록 극간한 조헌은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 조선 군대는 장비와 훈련 면에서 왜군을 당하기 어려웠다. 당시 일본에서는 100년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10도(十島)를 통일했었고, 도요토미(豊臣秀吉)는 단련된 군대를 이끌고 인도까지 정벌할 야망를 품었다고 한다. 조선은 개전 초부터 군사적으로 열세였지만, 불멸의 애국혼을 발휘하였다.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충천의 기개로써 항전하며 위국진절(爲國盡節)의 의기를 보여주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선비들을 중심으로 의군(義軍)이 일어났다. 영남의 곽재우(郭再祐), 호서의 조헌, 장흥의 고경명(高敬命), 광주의 김천일(金千鎰), 보성의 임계영(林啓英), 담양의 김덕령(金德齡), 연안의 이정암(李廷馣), 봉산의 김만수(金萬壽), 중화의 김진수(金進壽), 평양의 양덕록(楊德祿), 경성의 이붕수(李鵬壽) 등의 의병은 승군(僧軍)이나 관군과 연합하면서 각지에서 항전하였다. 이들 모두는 유명 · 무명을 가릴 것 없이 겨레의 의기(義氣)를 실증한 충렬정신의 화신이자 민족혼의 정화였다.
조헌의 경우 임진왜란을 앞두고 국내외의 대국(大局)을 간파해 백방으로 대응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국내적으로 자주 정신을 고취해 왜란에 대비하도록 하고, 국제적으로 춘추정신에 입각해 중국 및 동남아시아 제국과의 연합군을 형성해서 일본을 포위할 것을 건의하는 등 탁월한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으로서 왜적과 싸우다가 칠백의사와 더불어 부자가 함께 전사하였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중에 3부자가 함께 전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안방준(安邦俊)은 『항의신편(抗義新編)』과 『임진록』을 찬술하였다.
인조 14년(1636)에 돌발한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정월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의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었다. 청나라와 군신의 의를 맺는 11개 조항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고,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워야 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은 인질이 되었고, 주전론을 주장했던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 홍익한(洪翼漢) 등 삼학사는 심양으로 잡혀가서 죽었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의 임금은 9층 단하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을 청해 민족적 치욕을 당했지만, 전세의 상황은 항전이 어려웠다. 명나라를 치기 위한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반대했던 김상헌과, 명나라와 내밀하게 통교하였던 최명길은 각각 심양으로 잡혀가 구금되었다. 최명길은 인조 23년(1645)에야 소현세자 · 봉림대군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항복은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청나라에 대해 사대의 예를 행했지만, 실제로는 명나라를 은혜로 알고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숭명배청의 경향이 굳어지고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22만 군을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국세가 기울어 청나라가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중에 효종은 북벌 계획을 추진했지만, 10년 만에 죽게 되자 계획으로 그치고 말았다. 임진 · 병자의 양난 동안 흥기했던 의리사상은 송시열에 의해 계승되었다. 기호학파였던 송시열은 당대의 거유(巨儒)이자 사림의 종장이었다. 그는 정몽주와 조광조를 비롯해 이황과 이이를 모두 존숭하였다. 성리학과 예학에도 밝았다. 만년 노 · 소로 나뉘어 있던 당쟁의 와중에서 기사환국 때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효종의 총애를 받아 북벌 계획에 참여한 적도 있었던 송시열은 의리지학을 중시하였다. 『주자대전』에 비길만한 대작 『송자대전』을 남겼는데, 그 안에는 의리학에 관련된 위국순절한 인물들에 대해 상당 부분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정몽주의 신도비와 조광조의 능주정암선생적려유허비, 박팽년의 회덕박선생유허비, 성삼문의 홍주성선생유허비 및 연산성선생유허비를 지었다. 임진왜란에 즈음해 조헌의 중봉조선생행장, 이순신의 남해노량이공묘비, 송상현의 천곡송공상현신도비명, 신립의 도순변사증영의정신공묘갈명, 권율의 도원수권공묘표음기를 지었다. 병자호란과 관련해 김상헌의 석실서원묘정비 및 석실김선생묘지명, 윤집의 교리증부제학묘갈명, 홍익한의 장령홍공묘갈명, 윤집 등 3인의 「삼학사전(三學士傳)」, 임경업(林慶業)의 「임장군경업전」 등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숙종 30년(1704)에는 충청북도 화양동에 송시열의 유명(遺命)으로 만동묘를 지어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의 신종과 마지막 임금 의종을 추념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모두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연호에서도 사사(私事)에서는 모두 청나라의 것을 쓰지 않고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를 써서 ‘숭정후모년(崇禎後某年)’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인의 반청 의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조 의리학의 전통은 송시열에 이르러 다시 확증되면서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넷째 조선 중기에는 ‘예학의 시대’라 할 만큼 예학이 발달하고 많은 논저가 나왔다. 임진 · 병자 양 난을 전후해 무너진 기강과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순후한 민풍을 일으키는데 예학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성리학적 정신이 국가의 혼란기에 의리학적 행동으로 나타났듯이 일상 생활에서는 행동을 바르게 하는 예를 통해 실현되었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예전(禮典)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국초부터 예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수행되었다.
고려 말에 정몽주가 『주자가례』를 여행(勵行)케 하여 불교식 법속을 유교 의례로 바꾸도록 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사례를 중시하여 관례(冠禮) · 혼인 · 상제 · 가묘 등을 논술하였다. 그 뒤 그는 『경국대전』을 비롯, 『대전통편』과 『대전회통』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는 국초부터 『주자가례』를 간행하고 의례상정도감(儀禮詳定都監)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조오례의』를 찬정하였다. 이는 뒷 날 예송이 일었을 때 논의를 판정하는 준거가 되었다.
성리학파로서 저명한 학자들은 대부분 예학과 관계가 있었다. 권근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필두로 김인후 · 이언적 · 이이 · 송익필 · 이항복(李恒福) · 유성룡 · 김성일 등은 모두 예에 관한 논저를 남겼다. 17세기에 들어들면 이황의 문인 정구와 이이의 문인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로서 쌍벽을 이루었다. 예학의 대종(大宗)으로 일컬어지는 김장생은 이이로부터 성리학을, 송익필로부터 예학을 배웠다. 저술로서는 『가례집람(家禮輯覽)』 · 『의례문해(疑禮問解)』 · 『상례비요(喪禮備要)』(校正本) · 『가례편람(家禮便覽)』이 있다.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과 송시열에게 전해졌다.
김집의 학은 송준길 · 유계(兪棨) · 이유태(李惟泰) · 윤선거(尹宣擧)를 거쳐 윤증(尹拯)으로 계승되었다. 송시열의 학은 이단하(李端夏)를 거쳐 김원행(金元行) · 박윤원(朴胤源) · 권상하 · 한원진 등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은 다시 송능상(宋能相) · 이의조(李宜朝) · 김창협 · 이재(李縡)로 연결되었다. 송준길로부터 민유중(閔維重)이, 그 밖에 김상헌으로부터 박세채가 나왔다.
정구는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 ·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 ·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 『심의제도(深衣制度)』 등을 지어 이황 문하의 예학 대가가 되었다. 정구를 거쳐 장현광 · 허목 · 황종해(黃宗海) · 이론(李論) 등이 나왔으며, 유성룡의 후계로서는 정경세를 거쳐 정종로(鄭宗魯) · 조호익(曺好益) 등의 예론가가 배출되었다. 조선조 후기까지 예학은 계속 탐구되어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 그리고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실학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유교는 일상 행위를 통해서 떳떳한 이치를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유교의 13경 가운데 ‘삼례(三禮)’에 해당하는 『주례』 · 『의례』 · 『예기』 등의 예경(禮經)이 있다. 본래 종교적 제의(祭儀)에서 유래했던 예는 규범화되어 인간 생활의 풍속 · 관습 · 범식(範式)이 되었다. 이러한 고대적 습속으로서의 예 개념을 혁신시켰던 유교의 예는 타율적 구속력에 의존하기 보다 인간의 자율적 주체성에 호소한다. 때문에 예는 보편적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절문(節文)’이며 인정에 맞는 ‘의칙(儀則)’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안회(顔回)가 인을 물었을 때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하였다. 인의 마음은 예의 실천으로 나타난다고 볼 때, 인은 정신이요 예는 그것을 담는 그릇이다. 유교의 특징인 구체적 현실성은 인간의 진실된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예법을 필수적으로 요청하였다. 가정과 국가,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를 성립시키는 도리로서의 예는 인간 생활을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보았다. 마음은 진실해야 하고 표현 방법은 적합해야 한다. 인과 예는 내외본말의 관계이며, 진실성과 합리성은 예의 바람직한 실상이다.
유교의 의례에는 관혼상제의 사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상례에는 오복제도가 있어서 친소(親疎)에 따라 그 복제와 상기(喪期)가 5가지로 구분된다. 생자와 망자의 관계에 따라 인정이 다르고 친소경중(親疎輕重)의 차이에 따라 충정(衷情)의 표현 방법이 달랐다. 상례는 동양의 뿌리깊은 종법 사회를 유지시키는 원리였다. 의례의 생활화는 곧 유교가 완전히 뿌리내림을 뜻한다.
오복제도는 그 원리가 간단하지만 그 적용은 복잡 다양하였다. 이른 바 조선 중기의 예송에서도 문제의 초점은 예제의 내용상의 혼돈에 있지 않고, ‘대통(大統)’과 ‘적통(嫡統)’을 어떻게 관계지을 것인가에 있었다. 예송은 정치적 당쟁으로까지 이어졌지만, 정신과 형식의 균형 조화를 존중하는 유교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이념 논쟁이기도 하였다. 예학은 학술적 연구를 통해 조선인의 사습(士習)과 민풍이 훈습되고 미풍양속을 이루는 계기였다.
다섯째 조선 중기에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였다. 우리 나라 실학의 전성기는 영정조 이후지만 이미 중기에 들어서면서 실학의 풍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이수광 · 허균(許筠) · 유형원, 그리고 박세당 등이 그러한 인물이다. 유교는 “고명(高明)을 다하되 중용을 말미암는다(極高明而道中庸).”고 했듯이 일상적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학의 성격을 띤다. 주자학에서도 노불(老佛)을 공허하다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유학이 수기치인과 경세제민을 근본으로 하는 점은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조선조 학풍의 기조를 이루었던 주자학은 순수철학과 사회철학의 양면이 있었다. 전기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철학이 크게 발달했고, 후기에는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이용후생을 위주로 한 실학이 발달하였다.
영조조의 오광운(吳光運)은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서(序)에서 실학의 필요성과 그 사상사적 의의를 밝히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도덕은 하늘에 근원하고 정제(政制)는 땅에 근본하는 것이니, 하늘만을 스승으로 하여 땅을 알지 못하거나 땅을 스승으로 하여 하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옳으리오.”라고 하면서 주체적인 인륜 도덕과 사회적인 정치 제도를 『주역』의 건곤(乾坤)이나 형상형하(形上形下)의 도기론(道器論)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삼대(三代)에는 천 · 지와 도 · 기가 분리되지 않았지만 주말(周末) 이래로 도와 기가 함께 무너졌는데, 기가 더욱 심하게 무너졌다고 하였다. 정주와 같은 대현이 나와 삼대의 다스림에 뜻을 두었지만 먼저 도를 밝히기에 급했기에 힘쓸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한 훗날의 군자가 정주자(程朱子)의 학문을 보완해 기에 힘쓰기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재래의 도덕주의와 이기심성론에 치중했던 정주학적 학풍에 대한 반성이며, 당시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와 『기전고(箕田考)』를 지어 실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수광은 그의 『지봉유설』에서 무실론(懋實論)을 펼치고 천주학과 양명학까지를 포함, 서학과 중국 문물을 다양하게 소개하는 등 실학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박세당은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경전을 해석하였다. 특히 그는 『노자도덕경』과 『장자남화경』 등 노장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해 『색경(穡經)』과 같은 농서도 지었다. 또한 홍만선(洪萬選)은 『산림경제』를 써서 농예(農藝) · 의약 · 구황(救荒)에 관한 저술을 남기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도 지적하듯이 조선 중기에 무실적 태도를 가장 뚜렷이 보였던 사람은 이이와 유형원이었다. 이익은 “국초 이래로 식무(識務)한 이는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이공(二公)뿐이었다.”고 하였다. 이이와 유형원은 모두 성리학적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은 공허하지 않고 이기와 인심도심을 밀접한 관계에서 파악하였다.
이이는 많은 소문(疏文)을 지어 경장론 및 경세론을 폈다. 그의 제안대로 3년 간 실시해 “나라가 진흥하지 않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고 군대가 정예로워지지 않을 때에는”, “끓는 가마에 넣고 도끼로 버히는 형벌을 내리더라도 사양치 않을 것”이라고 격절(激切)히 논의하였다(萬言封事 및 陳時弊疏). 유형원은 그의 『반계수록』을 통해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하는 일종의 ‘국가론’을 전개하였다. 『반계수록』은 전제(田制) · 교선(敎選) · 임관(任官) · 직관(職官) · 녹제(祿制) · 병제(兵制) 등 거의 모든 제도를 망라해 당장 시행할 수 있도록 기술하였다. 그의 저술은 매우 종합적이고 체계적이며, 후세에 실용적 · 실증적 학문을 여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섯째 양명학의 이해와 사상적 영향이다. 조선조는 유교로 나라를 세웠고, 주자학은 조선시대를 통해 정신 문화와 사회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유교와 주자학은 국시가 되었으며 도 · 불은 물론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유교와 주자학에 배치되면 용납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하여 재래의 침체를 타파하고, 격치성정(格致誠正)과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를 펼치려고 하였다. 한편 양명학은 불교의 선학에 가깝다고 판단되어 당시의 사회 통념에 의해 배척당하였다. 왕수인(王守仁)은 선학(禪學)이라고 비판받던 육구연(陸九淵)에 대해 불교의 선학과 다르다고 변호했지만, 조선시대의 학자들의 일반적 인식은 전혀 달랐다. 이이만 해도 불교는 외구(外寇)와 같아서 뚜렷이 알 수 있지만, 육학(陸學)은 반드시 공맹과 효제(孝弟)를 일컫는 까닭에 마치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왕수인(王守仁)은 중국 명대 유학인 양명학의 창시자로서 주자학과 대립하는 뚜렷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육구연과 왕수인이 모두 문묘에 종사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육왕학이 인정받을 수 없었음은 물론, 오히려 명나라의 문묘종사는 조선 사신들의 힐난을 받았다. 그러나 양명의 학설이 조선에 전래된 것은 상당히 빨랐다. 왕수인과 제자들의 문답인 『전습록(傳習錄)』이 중국에서 간행된 것은 1518년이었는데 3년 뒤인 1521년(중종 16) 박상(朴祥)과 김세필(金世弼) 사이에 주고받은 글 가운데서 양명학을 선학으로 보아 비평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또한 이황과 같은 대가가 「전습록논변」을 지어 양명의 ‘친민설(親民說)’ · ‘심즉리설(心卽理說)’ ·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등을 논해 배척함에 따라 양명학은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학문과 인품이 온건하고 포용력이 있는 이황으로서도 이단사설(異端邪說)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하게 경계하였다. 그리고 조목 · 유성룡 등 후학들은 사설(師說)에 의거하여 양명학을 계속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수입 초기부터 영남 · 기호를 막론하고 주관주의철학으로 인식되어 거부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사정이 달랐다. 명나라의 사신으로 온 황홍헌(黃洪憲)은 양명학자였고, 임진왜란 때 명군의 경리(經理)인 만세덕(萬世德)은 육구연과 왕수인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도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성룡에 의하면, 당시 남언경(南彦經)으로부터 배운 사람들 가운데 양명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요(李瑤)는 그 한 사람으로 선조와의 대화에서 양명학의 주지(主旨)를 설명했고, 선조 역시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요점을 간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성룡도 이론적으로는 양명학을 비판하였지만 “양명의 설은 상산(象山)과는 다르다. 대개 양명은 ‘운용처(運用處)’가 많이 있다.”고 하여 양명학을 일부 인정하였다.
이이도 육학(陸學)의 선학적 경향과 그 폐단에 대해 비평했지만, 육학이나 양명학 자체를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이이는 명나라 사신 황홍헌에게 준 「극기복례설(克己復禮說)」에서, “소방(小邦)의 사람이 식견이 고루해 오직 정주(程朱)의 설을 지킬 뿐 다른 도리로써 펴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비록 움 속에서 벗어나려 해도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전문(全文)을 참조하면 정주의 설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타학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에는 양명학에 대한 비평이 계속되면서도, 한편으로 국내외의 자극과 관심으로 인해 양명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중기 17세기 전반에 활약한 인물 가운데 양명학에 대한 이해와 견식을 가지고 영향을 받았던 선비로서 장유와 최명길을 들 수 있다. 이수광 · 허균 · 조익(趙瀷) · 이시백(李時白) 등은 중국을 오가며 양명학을 이해했고, 학설과 생활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장유는 『계곡만필(谿谷漫筆)』에서 당시 조선의 학문이 정주학에 편중되어 있고, 형식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중국에는 정학(正學) · 선학(禪學) · 단학(丹學)이 있고 정주를 배우는 자와 육왕을 배우는 자가 있어서 들어가는 문이 하나가 아니라고 하면서, 조선의 학자들이 활발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는 ‘정학’과 ‘정주’를 말하면서도 양지설(良知說) 및 지행합일설 등 양명학을 옹호하였다. 그는 양명학의 본지가 한갓 정태적 관념론이 아닌 용공실처(用功實處)와 성찰확충(省察擴充)의 동적 세계에 있음을 밝히고, 양명이야말로 또 하나의 길을 개척한 사람(別立門徑)이라고 하였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온몸을 바친 애국적인 인물이다. 후일 남구만(南九萬)은 신도비를 써서 생사와 훼거(毁擧)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라와 백성을 구해낸 그의 충성과 재주와 용기를 칭찬하였다. 최명길의 평생 행적은 그의 수많은 소차(疏箚)에 반영되어 있고, 그의 사상적 편린(片麟)이 문집의 서한과 잡저 가운데 보인다. 그는 당시의 학인들과 다름없는 학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양명학으로부터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아들 후량(後亮)이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잡혀갔고, 후일 자신도 잡혀가게 되었다. 그는 멀리 있는 아들에게 양명의 가르침이 담긴 편지를 통해 비록 영어(囹圄)중에 있더라도 수양하고 자립해 마음의 본체로써 진리를 체증(體證)할 것을 간곡하게 권하였다. 자기 스스로도 “평생에 조우한 환난을 당함이 하나 둘이 아니었지만 바로 그것에 힘입어 큰 낭패에 이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아들에게 준 사신(私信)이기는 하지만 “양명의 글에 이르기를(陽明書云)”, “양명의 고명으로서도 이와 같은 근심이 있었는데 하물며(以陽明之高明 猶有是夏 況)……”라고 하여 그의 사상이 양명학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생사와 영욕을 돌보지 않고 국가적 환란을 돌파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 주체적인 판단과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 · 사상마련(事上磨練)을 주지로 하는 양명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양명학의 태두가 된 학자는 정제두이다. 그는 88세의 생애를 오직 학문에 종사하였다. 학덕이 높아 조야의 존경을 받았고 조정으로부터 30여 차례나 부름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소론가(少論家)에 속하였지만 당쟁과 관계없이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였다. 박세채 · 최석정 · 윤증 · 민이승(閔以升) · 박대숙(朴大叔)과 같은 사우들이 양명학에 경도(傾倒)함을 충고 · 비판하였지만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기의 학문 세계를 성취하였다. 그는 이미 성리학적 지식을 습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양명학의 주지를 음미해 이룩한 자신의 철학적 규준에 의거해 정주와 퇴율의 이기심성설을 근본적으로 재비평하였다.
특히 정제두는 사서오경을 깊이 연구하여 양명학을 주안(主眼)으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또한 천문 · 역법 · 지리 · 조석(潮汐) · 병학(兵學) · 의학에 이르기까지 실제적 방면에서도 학문을 논하였다. 경학을 근본으로 박실(樸實)한 학문에 종사했던 그의 학풍은 후기 실학의 한 축이었던 하곡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던 한국 양명학은 중국의 양명학과 달리 선학의 풍을 띠지도 않았고 반주자(反朱子)를 표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실사(實事)와 실공(實功)을 중시했던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일곱째 조선 중기의 후반에 인물성동이론 및 인간의 미발심체(未發心體)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조선 중기에 겪었던 국내외적 환란으로 실학 · 예학 · 의리학 · 양명학 등이 현실지향적 성격을 띤 학문이 성행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주체적 위상과 심성의 본질에 대한 논의도 전개되었다. ‘인물성동이론’과 ‘미발심체’에 관한 논쟁은 추상적이며 공소한 이론이라고 비평받기도 하지만, 성리학적 심성론이 심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리학은 우주 만물과 인간 만사를 원리적으로 해명하려 시도한다. 특히 한국 성리학은 인성론(人性論)을 중요시하였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인성(人性)의 문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그 첫째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 문제로 나타났고, 둘째가 미발(未發) 시의 심성문제로 깊어졌다. 인물성동이론은 『중용』 수장(首章)과 『맹자』 ‘생지위성(生之爲性)’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서 발단되었다. 이른바 ‘건순오상(建順五常)’ 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성이 사람과 동물에게서 같은 형태로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였다.
호락논쟁으로 불리는 인물성동이론의 본격적 논쟁은 권상하의 문인이었던 한원진과 이간의 입장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동론과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거주지가 달랐는데 이에 따라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호락논쟁에서 이간은 인물성 동론을, 한원진은 인물성 이론을 폈다. 이들의 주장이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리학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양론은 모두 인간만이 ‘정통(正通)’한 기운 또는 오행의 ‘수기(秀氣)’를 갖추었다는 기본 입장에는 차이나지 않는다.
호락론에서 성론(性論)의 차이는, 성(性)이 기질에 내재적인가 초월적인가에 있다. 이간은 성의 초월적 측면에서 ‘이통성(理通性)’을 지적해 동론을 주장했고, 한원진은 성의 내재적 측면에서 ‘기국성(氣局性)’을 지적하여 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변론은 성리학에서 불명확하였던 부분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간은 ‘천명 · 오상 · 태극 · 본연’은 그 이름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 일원(一原)의 이(理)에 근본하기 때문에 내용상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와 천지만물이 오상을 보편적으로 구비하기 때문에 인 · 물의 성은 같다고 하였다. 한원진은 이에 반해 ‘천명의 이’는 형기(形氣)를 초월한 것이고, ‘오상의 성’은 기질로 인해 이름 붙인 것이므로 인 · 물의 성은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
이간은 본성이 초월적 · 근원적이어야 한다고 보았고, 한원진은 성의 개념은 기(氣)를 말미암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간은 본연지성이 부여되는 일원처(一原處)에서 인물성의 동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기질의 정통편색(正通偏塞)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인 · 물의 기질적 차이는 인정하였다. 한원진의 경우 성(性)이란 형기를 초월한 이(理)와는 달리 이가 기에 ‘떨어져 있는 것(墮在)’을 일컫는 것이므로, 기를 떠나서는 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기의 편전으로 인해 인성과 물성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인성은 인 · 의 · 예 · 지 · 신의 오상을 완전히 갖추고 있지만, 물성은 그렇지 못해 미소(微少)하거나 전무하다고 보았다.
한원진의 주장이 인물성의 차이를 주장하지만, 인성과 물성이 유래한 궁극적 근원은 ‘일원무대(一原無對)’의 ‘태극천명(太極天命)’이라고 한 점에서 이간의 일원지리(一原之理)와 다르지 않다. 이간은 일원이체(一原異體) 또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주장하고, 한원진은 초형기(超形氣) · 인기질(因氣質) · 잡기질(雜氣質)이라는 성삼층설을 주장했지만 양자 모두 일원만수(一原萬殊)라는 공통적 인식을 깔고 있다.
또한 호락논쟁에서는 성리학의 기본 명제인 순선(純善)한 본연지성과 선악을 겸한 기질지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간은 본연지성이 구극적 원리인 천도나 태극지리(太極之理)와 동일한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였다. 형이상의 이(理)인 본연지성은 마치 ‘도(道)’가 ‘기(器)’에서 생하거나 ‘태극’이 ‘음양’에서 생하지 않듯이 “성리의 선은 심기(心氣)에 근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선(性善)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성리 자체에 있지 않고 심기(心氣)의 선악에 관련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심(心)이 부정한데 성이 스스로 중(中)하거나, 기(氣)는 불순한데 이가 스스로 화(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간은 순수 형이상의 성리를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형이하의 심기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간에 의하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모두 외물에 의해 촉발되지 않은 미발지성(未發之性)이다. 미발에도 깊고 얕음(深淺)이 있다. 깊은 것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하고 담연허명(湛然虛明)한 명덕본체(明德本體)의 본연지심이기 때문에 ‘중저미발(中底未發)’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얕은 것은 기품(氣稟)에 구애되어 혼매잡요(昏昧雜擾)한 기질지심이므로 ‘부중저미발(不中底未發)’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이발(已發)의 정(情)으로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발시의 순선한 본연지심과 선악을 모두 겸한 기질지심으로 분류하였다. 이간은 인성을 논할 때 선악을 모두 겸한 기질지성 보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인간의 진정한 본성으로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미발시의 허령불매한 본연지심(本然之心)을 중시해 확보하려고 하였다.
한원진의 경우도 이간과 마찬가지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모두 마음의 미발 상태인데, 본연지성은 순선하고 기질지성은 선악을 겸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원진은 이(理)와 기(氣)는 분리될 수 없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두 개의 성이 아니라는 전제에 철저하였다. 허령(虛靈)한 마음(心)의 이(理)만을 가리키면(單指) 본연지성이고, 마음에 있는 기품(氣稟)의 청탁미악(淸濁美惡)을 겸하면(兼指) 기질지성이라고 보았다.
허령한 마음의 본연지성은 성범을 막론하고 동일하지만, 성인과 범인의 차이가 있는 것은 심의 허령에 기인하지 않고 기품에 연유한다고 생각하였다. 기품의 부제(不齊)에 구애받는 것이 중인(衆人)이고, 그것에 구애받지 않아 본래적 허령상태의 본연지성을 드러내면 성인이라고 보았다. 실질적으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기질의 청탁미악인 까닭에 한원진은 선악을 겸한 기질지성의 현실성에 즉해 선을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원진은 단지(單指) · 겸지(兼指) · 분간(分看) · 합간(合看) · 불리(不離) · 부잡(不雜) 등의 방법으로 미발심체의 이론을 보다 논리적으로 구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중기에 제기된 인물성동이론은 김창협 · 김창업(金昌業) 형제 · 이재 · 윤봉구(尹鳳九) · 이현익(李顯益) · 박필주(朴弼周) 등 많은 학자들에게서 자유롭게 토론됨으로써 하나의 학풍을 이루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임성주(任聖周)와 기정진(奇正鎭)을 거쳐 전우 · 곽종석(郭鍾錫) 등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에 걸쳐 성리학의 주요 논점이 되었다. 호락논쟁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영남학파에서는 이휘일과 정시한(丁時翰)이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했고, 이승일과 이식은 구동론(俱同論)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기호 · 영남을 막론하고 인물성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는 밖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정치 · 문화적으로 변화와 충격을 받으면서 근대로 접어드는 복잡한 시대였다. 영 · 정조시대의 약 80년 간은 침체했던 국운을 쇄신해 융성을 도모했던 세종∼성종조에 비길 수 있는 문예 부흥기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완화시켰고,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당색과 계층에 관계없이 학자들을 모아 국정과 학술문화에 기여하였다.
영조조에는 『속대전』 · 『동국문헌비고』 · 『속오례의』 ·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 『국조악장』 등의 전적이 간행되었고, 선기옥형(璿機玉衡)과 측우기 같은 천문기상기구 및 각종 도량형이 정비되었다. 정조조에는 『대전통편』 · 『문원보불(文苑黼黻)』 · 『동문휘고(同文彙攷)』 · 『추관지(秋官志)』 · 『탁지지(度支志)』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해동농서(海東農書)』 · 『전운옥편(全韻玉篇)』 등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천문 · 지리에 걸쳐 다양한 문헌이 편찬되었다.
일반 학계에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조조에는 이익의 성호학파가 나왔고, 정조조에는 중국의 연경을 오가며 청조문화(淸朝文化)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北學派)가 형성되었다. 조선의 영 · 정조시대는 청나라의 옹정(雍正) · 건륭(乾隆)의 융성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당시 청나라에는 천주교와 자연과학 등 서양 문화가 들어와서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영 · 정조시대에는 실학과 함께 천주교가 들어와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서 비판하거나, 유교와 천주교를 절충해 이해하거나, 천주교를 신봉해 유교 의례를 거부하는 등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서학이 들어와 논쟁이 벌어지고 사회 문제화 되었던 것은 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영 · 정조시대를 지나 순조로부터 철종대까지의 60여 년은 왕실의 인척에 의해 세도 정치가 행해졌던 어려운 시대였다. 순조는 11세, 헌종은 7세, 그리고 철종은 19세에 즉위하였다. 순조조에는 안동 김씨, 헌종조에는 풍양 조씨, 철종조에는 다시 안동 김씨 등이 세도를 부리는 동안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국정은 극도로 황폐화되었다. 또한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還穀) 등 삼정(三政)의 문란은 민생을 곤궁하게 하였다. 순조 11년(18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고 철종 13년(1862) 진주민란이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도둑떼가 들끓었다.
한편 천주교의 신봉자들은 날로 늘어났다. 이승훈(李承薰)은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후 1784년에 귀국해 이벽(李檗) · 권철신(權哲身)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정조 15년(1791) 윤지충(尹持忠) · 권상연(權尙然)은 상제(喪祭)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름으로써 일어났던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처형되었다. 순조조부터는 대규모의 교옥(敎獄)이 일어났다. 순조 때의 신유사옥(1801)과 헌종 때의 기해사옥(1839)이 그것이다. 김대건(金大建)은 헌종 11년(1845)에 마카오에서 신부가 되어 돌아와 그 다음 해에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계속 번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金正喜) 같은 대실학자가 탄생했고, 위정척사와 척양척왜를 주장하는 이항로(李恒老) 및 그를 계승한 화서학파(華西學派)가 형성되었다.
고종 · 순종조의 약 60년간은 조선 말기의 풍운이 겹치는 시대였다. 1910년 급기야 국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고종이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섭정을 시작하는 등 정세가 변화무쌍하였다. 고종 3년의 교옥,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 강화도조약(1876),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1887), 동학의 봉기와 갑오개혁(1894), 청일전쟁(1894∼1895),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대한제국의 성립(1897), 러일전쟁(1904), 을사조약(1905), 고종퇴위(1907) 등 여러 사건이 있어났다.
이러한 난국에 대해 당시의 지성들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보수적 의리학파는 주권 수호를 위해 이념적 · 정치적으로 외세를 배격했고, 개화파는 국제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에 나타났던 유교사상의 실학적 입장과 의리학적 입장, 그리고 양명학이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실학은 성호학파 · 북학파, 그리고 정약용과 김정희의 사상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성호학파: 이익은 기호학파 남인 학자로서 18세기 실학의 최대 사상가였다. 그는 평생을 학문에 종사하였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및 예학에 일가견을 가졌고, 경세치용의 실학을 중심으로 양명학과 서학에 이르기까지 고금중외(古今中外)의 학문에 폭넓은 관심을 보여 『성호사설』을 비롯한 수많은 논저를 남겼다. 그는 유교의 경전인 『근사록』 · 『심경』 · 『가례』 등 주요 문헌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질서(疾書)’라는 명칭의 방대한 논술 속에 담았으며, 『사칠신편(四七新編)』이라는 성리서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이익은 이학(理學)에 있어서는 이황을 존숭해 『이자수어(李子粹語)』라는 퇴계선집을 냈고, 경세적 무실론에서는 이이를 높이 보았다. 그러나 선유의 설을 참고하면서도 자기의 독자적 견해를 가지고 서술하였다. 특히 그의 저술인 『곽우록(藿憂錄)』에서는 토지제도와 관련해 영업전(永業田)을 논하는 등 정치 · 군사 · 경제 · 교육 및 기타 현실 문제를 전반적으로 비평하고, 구체적 제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삼얼(三孽)’의 폐해를 들어서 존군억신(尊君抑臣)의 전제주의, 인재 등용에서의 문벌주의, 그리고 문사(文辭) 위주의 과거제도를 비판하였다.
이익은 서학과 관련해 천당지옥설과 같은 종교적 신앙을 부정했지만, 수양론이나 윤리사상에 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서양의 자연과학과 정밀한 학술에 대해서도 찬탄하였다. 이익은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모두 포용하면서 백과사전적인 폭넓은 지식을 추구하였다.
이익의 후학들은 보다 개방적 자세를 취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 · 『열조통기(列朝通紀)』 · 『고사지리(考思地理)』를 지어 우리 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등 후기 실학자의 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경사(經史)를 근본으로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이황을 높이 존숭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공맹의 말은 왕조의 법령과 같고, 정주의 말은 엄사(嚴師)와 칙려(勅勵)와 같으며, 퇴계의 말은 자부(慈父)의 훈계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지어 천주교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을 보였다.
신후담(愼後聃)도 일찍이 「서학변(西學辨)」을 지어 전통 유학의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서인 『영언여작(靈言蠡勺)』 · 『천주실의(天主實義)』 · 『직방외기(職方外記)』 등을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에 있어서 서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로서는 최초의 것이며, 대서학 논쟁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한편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면서도 천주교에 기울었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의 제자 권철신과 종손 이가환(李家煥) 같은 학자들은 천주교인이 되었고 신유사옥 때 순교하였다. 또한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이익 문하의 신서파(信西派)들과 교유하였다. 정약용의 매부가 이승훈의 아우 치훈(致薰)이며, 형인 정약현(丁若鉉)의 사위가 황사영(黃嗣永)인 점으로 보아 성호학파의 한 계통이 천주교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② 북학파: 북학파란 18세기 후반에 사행(使行)으로 연경에 오가며 청조 문물에 자극을 받아 북학론을 폈던 일군의 소장층 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주로 노론 계통이었는데 특히 정조의 총애 속에서 활발한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학파는 재래의 도학 일변도의 전통에서 벗어나 보다 시야를 넓혀 외래 문화를 수입해 이용후생의 실용적 학풍을 진작하고, 관념적이며 중세기적인 독단을 버리고 자연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사고방식을 수용하였다. 또한 『춘추』의 의미를 재해석해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로부터 벗어나 지역적 차이를 두지 않고 개별적 자주성을 존중하였다.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서(湛軒書)』에서 북학파의 새로운 사고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경전을 해석할 때 주자설만을 취해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포용해 탐구자의 기본 자세와 자유로운 학문 방법을 주창하였다. 학문에서도 의리학을 근본으로 하되, 경세(經世)와 사장(詞章)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세 가지는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공자와 주자를 존숭하면서도 왕수인을 높이 평가하였다. 홍대용은 과학적 사고방식, 자주적 역사의식, 실용적 학술의 중시, 선진문물의 섭취 등 진취적 태도를 취했던 북학파의 선구였다.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 · 「양반전」 · 「허생전(許生傳)」 등에서 그의 사회 의식과 경제 의식을 보여준다. 그는 시대적 모순을 풍자하면서 일체의 형식주의적 허위를 버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성인들이 한갓 옛 글만 읽고 있을 것이 아니라, 농공상 등 민생에 필요한 것이면 청조의 것이라도 충분히 배워올 것을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정덕 · 이용 · 후생의 삼덕에 대해, “이용을 이룬 다음에 후생을 할 수 있고, 후생한 다음에 정덕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사회적 · 경제적 여건의 조성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특히 농업과 공업의 진흥책을 제언하였다.
박제가(朴齊家)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청조의 문물을 빠짐없이 소개하고, 이용후생의 정신을 보다 정밀하게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공상을 모두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에도 이덕무(李德懋) · 유득공(柳得恭) · 이서구(李書九) 등의 논저에서도 실학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북학파의 청조 문물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청국과 우호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북학파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계승 · 발전시켰던 청나라의 실제적 우수성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청나라는 문화적으로 이미 성리학을 비롯한 유교의 자원을 폭넓게 활용하고 있었다. 청나라 문물의 수입은 성리학의 부정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실제적 유학의 추구를 의미하였다. 박지원의 『연행록(燕行錄)』과 『북학의』 서문을 보면 중국의 전통 문화를 발전시켰던 청나라의 문명에 대한 북학파의 인식을 알 수 있다.
청나라에는 전통적 성곽 · 궁실 · 인민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정덕 · 이용 · 후생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주정장주(周程張朱)의 학문이 보존되었고, 한당송명(漢唐宋明)의 양속미제(良俗美制)가 계승되었다. 비록 청나라는 오랑캐 민족이었지만, 중화문화(中華文化)를 계승하고 서양의 과학 기술 등을 수용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따라서 북학파는 중화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 실용적 태도를 중시했다고 판단된다.
③ 조선 말기의 실학사상(정약용과 김정희) : 정약용은 조선 후기 최대의 실학자로 불린다. 그의 학문 규모와 방대한 저술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할만하다. 그는 기호학파 남인으로 성호계통의 신서파(信西派)이고, 그의 여러 형제들이 순교하거나 귀양살이하였다. 그의 사상적 기반은 천주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육경사서(六經四書)의 경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했고, 1표2서(一表二書 : 經世遺表 · 牧民心書 · 欽欽新書)를 지어 운용의 학을 기술하였다.
「오학론(五學論)」에 보이듯이 그는 도 · 불은 물론 공자와 맹자를 제외한 유교의 어느 학파에도 심열성복(心悅誠服)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서학에 대한 자발적 비판은 보기 어렵다. 그의 방대한 저술은 경학에 관한 것이 제일 많고, 정치 조직 · 지방 행정 · 형정(刑政) 등에 관한 경세론, 그 밖에 의학 · 농학 및 기타 과학 기술에 관한 것이 있다. 도학 또는 성리에 대해서는 주자와 퇴율을 절충해 이해했지만, 기본적으로 성리학의 이론 체계에서 벗어나 보다 경험주의적인 접근을 보였다. 경학의 전개에서도 양명학적 해석 방법을 원용하였다.
정약용은 천주교의 이해를 바탕으로 경전 속의 상제사상(上帝思想)을 농도있게 서술함으로써 유교를 종교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정약용이 보는 상제는 ‘하천지총(荷天之寵)’의 인격천(人格天)이자 ‘영명주재지천(靈明主宰之天)’으로서, 성리학 태극이나 다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영명무형지체(靈明無形之體)를 부여받았으니, 그것이 도심이고 도심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라고 생각하였다. 정약용은 정치사상에서 민주 · 민권 의식을 고취하였다. 모든 사람이 양반이 됨으로써 양반이 없어져야 할 것이라든가, 임금을 정함에 있어서도 하향적 권위주의(上而下)를 지양하고, 상향적으로 뽑아올리는 것(下而上)이 원리에 맞는 것이라고 하는 등의 민주주의적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정약용에게 이미 근대적 정신이 깃들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정희는 일찍이 박제가를 사사하였다. 그는 연경에 가서 청대 실학의 거유이며 고증학의 대가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남으로써 학문적 자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김정희의 학문적 범위는 경학 · 사학 · 시문으로부터 금석 · 고증 · 서화를 포함해 매우 광범위하였다. 성호계통의 학문을 이어받은 정약용이 천주교의 소양을 갖춘 대학자였다면, 김정희는 통유(通儒)이면서도 불교적 소양을 겸하고 있었다. 완당 김정희에서 실학의 주지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그는 과거의 전통적 학문을 배제하는 입장이 아니라, 각기의 진수를 올바로 파악해 상보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을 가리켜 한송절충론(漢宋折衷論) 또는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는 의리지학과 고정지학(考訂之學)을 동시에 취하였다. “학문하는 도리는 한학과 송학의 경계를 반드시 나눌 것이 없고, 정현(鄭玄)과 왕필(王弼), 정자와 주자의 장단을 비교할 필요도 없으며, 주자 · 육상산 · 설문정(薛文靖) · 왕양명의 문호를 다툴 것도 아니다. 다만 심기를 편안히 가라앉히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배우는 가운데, 오로지 ‘실사구시’라는 한 마디에 힘써 행해야 한다(實事求是說).”고 하였다. 그러나 학문에는 선후본말이 있다고 보아 고증을 수단으로 의리를 목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김정희는 모든 학문에 개방적이면서도 공허한 이론(空疎之術)이나 선입견(先入之言)을 배제하고, “오직 실사에서 옳은 것을 구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김정희의 사상은 한국 실학의 방법론을 매우 의미 있고 완미(完美)하게 귀결시킨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전통을 널리 포용하면서도 예를 중시하고 전인성(全人性)을 추구했던 완당 김정희의 실학은 근본 유교의 본지에 상당히 접근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조선 후기 실학자로 일찍이 경사에 밝고 한송(漢宋)을 함께 존숭했던 『존주휘편(尊周彙編)』의 저자 성해응(成海應)과, 말기에 『기측체의(氣測體義)』를 써서 유교 이론을 경험론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근대적이며 실증적인 정신을 발휘했던 최한기(崔漢綺)를 꼽을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역사 · 지리 · 어문 · 금석 등 과거에는 묻혀 있던 국학 분야를 탐구해 수많은 저술을 내었다. 역사 방면으로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치윤의 『해동역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이 있다. 지리에는 이중환의 『택리지』,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 성해응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어학에는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諺文志)』가 있다. 금석학에는 김정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 있고, 농림생물에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가 있다. 의학에는 정약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등이 있다.
둘째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의리사상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순조 때부터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60여 년은 세도 정치가 행해지고 민란으로 소요를 겪었으며, 천주교의 거듭된 교옥과 동학의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당하는 등 나라 안팎으로 환란이 거듭되었다.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시대를 거쳐 정약용과 김정희 같은 석학이 유배 중에 학문을 닦았던 것을 제외하곤 사상적으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을 때 후기 성리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홍직필(洪直弼) · 임성주(任聖周) · 이항로(李恒老) · 기정진(奇正鎭) 등이 이 시대의 인물이며, 그 뒤를 이어 이진상(李震相) · 전우 · 곽종석(郭鍾錫) 등 영남 · 기호를 막론하고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 또한 서세동점(西勢東漸)과 한민족의 국가적 위기 앞에서 뚜렷한 이념과 행동으로 대응해 의리학의 학통을 이루었던 화서학파가 있었다. 이항로는 화서학파의 종사(宗師)였다. 그의 문하에서 김평묵(金平默) · 유중교(柳重敎) · 최익현(崔益鉉) · 유인석(柳麟錫)과 같은 구국 항쟁의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19세기 성리학적 전통을 지켜온 조선은 정치적으로 서양과 일본의 위협을 받았고, 사상적으로 서학(천주교)과 부딪쳤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는 성리학자의 태도 역시 다양하였다. 실학파가 청나라와 교섭하면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주장을 폈고, 한말에는 개화파가 그 정신을 계승하면서 서양 및 일본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자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외부로부터의 위압과 이들 개화파의 주장에 의해 조선은 결국 문호를 개방하였다. 또한 일본 및 구미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국가 체제를 근대적으로 변경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조약―갑신정변―갑오경장―을미사변―을사조약 등으로 마침내 국권은 상실되었고, 개화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김옥균(金玉均)은 상해에서 피살되었다. 유길준(兪吉濬)은 국권 상실 이후 죽었고, 박영효(朴泳孝)는 일본국 후작을 거쳐 귀족원 위원이 되었다. 비록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의 박은식(朴殷植)은 3 · 1운동 후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했지만, 결국 개화파의 노력은 결국 국권 상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화서학파는 유교의 의리사상에 입각해 외민족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노력하였다. 화서학파의 기본 논리는 척사위정과 척양척왜였다. 이항로는 「벽사록변(闢邪錄辨)」을 썼고, 문인 유중교와 김평묵은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찬하였다. 이항로는 서세(西勢)로 말미암은 문화적 · 사상적 위협과 군사적 · 경제적 침략에 근본적으로 항거할 것을 주창하였다. 그는 서양의 정치 군사적 침략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반윤리적 · 반국가적 사상으로 배척하였다.
1839년의 기해사옥과 1866년의 병인양요를 경험한 적 있었던 이항로는 『일성록』에서 말하기를, “서양인들이 들어와 사학(邪學)을 전파하는 이유는 자기의 동정자를 심어놓고, 그들과 표리상응해 우리 나라의 허실을 정탐하고,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아름다운 우리의 풍속을 진창 속에 쓸어 넣고, 우리의 재물을 약탈해, 한량없는 탐욕을 채우려는 데 있다.”고 하였다. 또한 “만약 교통의 길이 한번 열리면 2∼3년에 전하의 백성은 서양화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요……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서양물건을 찾아내서 이를 거리에서 불태우고, 그 뒤 무역하는 자에 대해서는 외적과 교통하였다는 형률로 시행하게 하오(호군 이항로 진시무).”라고 말하였다.
그 뒤 1871년(고종 8)에는 신미양요가 발생해 외세의 파고(波高)는 더욱 높아지고 시대의 상황이 급박하였다. 김평묵과 유중교의 척양론(斥洋論)은 더욱 강경하였다. 유중교에게 양이(洋夷)는 이적(夷狄) 보다 못한 금수와 귀매(鬼魅)였다. 그는 「어양론(禦洋論)」에서 “사단(四端)의 덕과 오품(五品)의 윤(倫)과 예악형정의 교(敎)야말로 사람이 사람 되고 나라가 나라 되는 까닭이며 천하가 천하 되는 근거이다.……이것이야말로 인도이며 서양의 가르침은 금수의 도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갑신년의 변복령(變服令)에 대해 그것이 군령(君令)이라 하더라고 좇을 수 없다고 하였다. 강화도조약에 즈음해 김평묵은 일본은 양인(洋人)의 앞잡이고, 이제 양인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그는 척화론(斥和論)을 펴다가 지도(智島)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최익현과 유인석에 이르면, 사상적 논의의 단계를 지나 행동적 의거의 단계에 이른다. 최익현은 임진왜란 직전 조헌이 그랬던 것처럼 도끼를 들고 대궐에 나아가 “왜의 구적(寇賊)은 과연 어떻게 보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인가? 양적(洋賊)의 앞잡이임을 아는 것이다. ……오늘날 왜인이 오는 것을 보면 양복을 입고 양포(洋砲)를 쓰며, 양선(洋船)을 타고 다니니 이것은 다 왜양(倭洋)이 일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고 하며 5가지 조목을 들어 상소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일본에게 약세인 상태에서 그들과 화의를 한다는 것은 눈앞만 보는 고식적 계책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교역을 하면 상대방의 공업 생산품을 우리의 원자재와 교역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교역은 우리의 경제적 파탄을 일으키게 된다. 셋째 일본은 겉으로는 왜이지만, 실제는 양적이니 이들과 교류하면 천주교가 들어와 백성들이 사학에 빠져 인륜이 무너지게 된다. 넷째 왜인들이 상륙하면 우리 재물과 부녀를 짓밟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된다. 다섯째 병자호란 때의 굴욕적 화평은 청나라가 중국의 법도를 따랐기에 우리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으나, 일본은 재화와 여색만 알고 의리를 모르는 금수이므로 경우가 전혀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일본과의 화의는 결국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논파했고, 그 이후에 발생할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규탄하였다. 갑신정변과 갑오경장, 을미사변과 을사조약으로 연결되어감에 따라 최익현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비판하고 일본의 배반을 규탄해 의병을 일으켰지만, 대마도로 붙들려가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하였다.
유인석은 조선은 이미 국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아 그 대응 방법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의병을 일으켜 역당(逆黨)을 깨끗이 쓸어내는 것(擧義掃淸), 둘째 떠나가서 옛 제도를 지키는 것(去之守舊), 셋째 목숨을 버려 뜻을 이루는 것(致命遂志)으로 되어 있다. 그는 중국 · 소련 등 국내외에 기지를 만들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인석은 『우주문답(宇宙問答)』에서 “남의 나라를 뺏으려면 먼저 남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다. 마음을 빼앗으면 토지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여 민족의 자주 정신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은 항상 서법(西法)을 가지고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이니, 먼저 열모(悅慕)하는 마음을 얻어서 개화하고, 개화함으로써 독립하게 하나니, 독립이란 보호를 뜻하고 보호는 합방을 뜻하는 것이다. 대개 시작할 때에는 이(利)로써 유인하고 끝에 가서는 위압으로써 강압하는 것이니, 겉으로는 서법의 이름을 빌리고 안으로는 무한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유인석은 13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가 되었고, 나라를 잃자 고종을 모셔다가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만주에서 항일전을 펴면서 국권 회복을 위해 진력하다가 서거하였다.
최근세의 한국은 서양이 침투하면서 대혼란의 시대를 겪었다. 이러한 격변기를 맞이해 조선 후기의 실학과 의리학 그리고 근대 의식이 단합된 역량으로 포용 · 승화되었더라면 새로운 철학을 창출하고 나라 발전을 이룩해 민족의 앞날을 개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성취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렀다. 이제 후세들은 선조들의 저력과 가능성을 거울삼아 남아 있는 과제들을 풀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