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백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81년(선조 14)에 태어나 1660년(현종 즉위년)에 사망했다.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연양군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에 수원방어사로 인조를 강화도로 인도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수어사로 인조를 맞이하였다. 소현세자 사후에 이경여와 함께 원손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효종이 즉위한 후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연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김육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다음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이천으로 달려가서 향병을 모집해 길목을 지켰다. 그러나 이괄이 다른 길을 택해 곧바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안현(鞍峴)에서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하기도 하였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관직을 떠났으나, 곧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 · 강화유수가 되었다.
1633년 병조참판,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맞이했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고, 다음 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638년 병조판서 때, 척화신(斥和臣)으로서 청의 강압에 못이겨 심양(瀋陽)에 아들 이유(李愉) 대신 서자를 볼모로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다음 해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고,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 ·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와 중신들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을 것을 희망했으나,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46년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휴가를 받아 공주로 성묘 가던 중 호서에 토적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와 토벌을 자원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토평되어 그대로 돌아왔다. 1649년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또 세자를 소개하면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 하며 위로했다 한다.
그 해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 · 좌참찬이 되고, 1650년(효종 1)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김자점(金自點)의 모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165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를 다녀와 언사(言事)로 견책을 받은 조석윤(趙錫胤) 등을 신구(伸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수원에 능을 정하자고 건의했으나, 이시백이 교통이 빈번해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하였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청빈해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 한다. 장유(張維) · 최명길(崔鳴吉) · 조익(趙翼)과 교유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