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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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관서.
이칭
이칭
주관, 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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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관서.
내용

육조(六曹)의 하나이다. 추관(秋官) 또는 추조(秋曹)라고도 한다. 의금부·한성부와 아울려 삼법사(三法司)라고 일컬어지고,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성(三省)이라해 의금부에서 국문(鞠問)할 때는 삼성이 동참하기도 하였다.

법률·상언(詳讞 : 죄를 살펴 의논함)·사송(詞訟 : 소송), 노예에 관한 정사(政事)를 관장하던 고려시대의 형부(刑部)가 전법사(典法司)로 격하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형조로 개칭된 것이 그대로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육조는 당초 단순한 실무집행기관이었다. 그러나 1404년(태종 5) 관제개혁 때 정2품 아문(衙門)으로 승격하면서 실무뿐 아니라 정책 수립의 권한도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이 개혁을 토대로 정비, 발전된 형조는 ≪경국대전≫에 상복사(詳覆司)·고율사(考律司)·장금사(掌禁司)·장례사(掌隷司) 등 4사의 체제로 나타나 있다.

위의 각 사는 정랑 4인이 분장하였다. 상복사는 중죄의 복심(覆審)을, 고율사는 율령(律令)의 조사·심의를, 장금사는 형옥과 금령(禁令)의 일을, 장례사는 노예의 부적(簿籍)과 포로 등의 일을 각각 관장하였다.

초기에는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이 상복사의 정랑을 겸임했는데, 이것은 4사 가운데 상복사의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뒤에 폐지되고 검상청(檢詳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추관지 秋官志≫에 따르면, 위 4사는 다시 각 2방(房)으로 나뉘고 별방으로서 형방(刑房)과 함께 9방 체제로 운영되었다.

상복사는 상일방(詳一房)·상이방(詳二房)으로 나누어 지방과 서울의 중죄 복심을 각각 맡았다. 고율사는 사무의 분장 없이 고일방(考一房)·고이방(考二房)으로 나누고, 장금사 역시 사무분장 없이 금일방(禁一房)·금이방(禁二房)으로 나누고, 장례사는 예일방(隷一房)·예이방(隷二房)으로 나누어 외노비(外奴婢)와 경노비(京奴婢)의 일을 각각 분장하였다.

또한, 형방은 죄수를 다루는 일을 맡았다. 9방 체제는 위의 각 소임 외에 각 관서로부터 이관되는 문서와 8도에서 보내오는 장첩(狀牒)을 받아 구관(句管)하는 조직으로도 활용되었다.

예컨대, 상일방이 의정부·중추부·사옹원·사복시·선공감·중학(中學)·북부·남부·현릉(顯陵)·희릉(禧陵)·효릉(孝陵)·함경도 등으로부터의 이첩을 담당했듯이, 각 방에 대한 배정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초기의 관원은 판서 1인, 참판 1인, 참의 1인, 정랑 4인, 좌랑 4인, 율학교수(律學敎授) 1인, 별제(別提) 2인, 명률(明律) 1인, 심률(審律) 2인, 율학훈도 12인, 검률(檢律) 2인 등이 있었다. 태조 1년(1392)의 관제에서는 최고책임자로 전서(典書) 2인을 두었으나, 1403년에 1인으로 감하고 이름도 판서로 고치고 정2품으로 하였다.

정랑·좌랑은 본래 생원·진사 출신의 음직(蔭職)으로서 초기는 각 4인이었으나, 영조대의 ≪속대전≫에서 각 1인씩으로 감해졌다. 정랑 1인은 1749년(영조 25)에 문신으로 한정하다는 새 규정이 세워지고, 이어 1756년에 좌랑 1인은 무신으로 하도록 정하였다.

조선 후기에 율학교수 이하는 형조의 속사(屬司)로서 율학청(律學廳) 소속으로 편성되었으며, 그 중 별제 1인은 ≪속대전≫에서 줄였다가 ≪대전회통≫에서 복구되었다. 심률 1인, 검률 1인도 ≪대전회통≫에서는 종6품의 겸교수(兼敎授) 1인을 증원하였다.

율학교수는 의금부의 일을 겸했으며, 이 밖에도 승정원·병조·사헌부·규장각·개성부·강화부 등에 율관(律官)을 파견했으며, 8도에도 검률 각 1인을 파견하였다.

속사로는 율학청 외에 전옥서(典獄署)·장례원·보민사(保民司)·좌우포청(左右捕廳)·좌우순청(左右巡廳) 등이 있었다. 이속(吏屬)으로는 서리(書吏) 75인, 고직(考職) 1인, 대청직(大廳直) 1인, 사령(司令) 46인, 방직(房直) 3인이 배정되었다.

1418년 세종의 즉위에 따라 서열이 다섯 번째로 정해져 조선시대 내내 큰 변동 없이 존속하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전회통(大典會通)』
『추관지(秋官志)』
집필자
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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