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예란 ‘대인 관계에서의 바람직한 행위’라는 극히 좁은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의 본래의 의미는 아주 넓고 포괄적이었다. 유교 문화를 예 문화(禮文化)라는 말로 표현하듯이, 예는 유교 문화를 통칭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내용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는 발생사적으로 유교, 나아가서는 중국 사상의 시원(始源)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라는 문자 자체가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禮’자의 ‘示’는 신(神)을 뜻하고 ‘豊’은 豐의 약자로서 제물(祭物)인 ‘{{#159}}’을 상(床)을 표시하는 ‘豆’ 위에 올려놓은 상태를 나타낸다.
즉,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하지 못한 원시시대에 초월적인 신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받들고자 하는 원시적인 의식(儀式)을 문자화한 것이 바로 예(禮)자인 것이다.
원시시대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신의 뜻에 물어서 행하였다. 크게는 대외적인 전쟁을 비롯해 작게는 부족 내부의 질서에 관한 모든 것이 다 예라는 절차를 거쳐 처리되었다.
당시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제정(祭政)이 일치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 시대를 규제하고 통섭한 원리가 예였던 것이니, 예는 고대인의 생활 전반, 즉 종교 · 정치 · 경제 · 법률 등을 망라한 종합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인지(人智)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사물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종래 신비롭게 보았던 많은 대상 가운데서, 어떤 것은 여전히 신비로운 것으로 남았으나, 많은 대상들은 종래의 신비성을 잃고 범상한 존재로 바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출생 · 사망 등은 여전히 신비성을 유지하게 되나, 군신 · 상하간의 계층 관계 및 부족 상호간의 인간 관계 등은 범상한 일상 생활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에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다루는 예에도 필연적으로 분화가 생기게 되었다. 즉, 신성 의례(神聖儀禮)와 세속 의례(世俗儀禮)의 분화이다.
그런데 세속 의례는 다시 국가 생활을 규제하는 부분, 즉 군신 · 상하의 계층 관계 등 국가적인 조직 · 질서 등을 규정하는 부분과 개인 생활을 규제하는 부분, 즉 일반인의 윤리 관계 등을 규정하는 두 부분으로 분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의 발달사를 정리해 둔 것이 오늘날 전하는 삼례(三禮)라는 것이다.
예는 포괄적인 호칭이어서 이를 세분해 표현할 때 삼례라고 한다. 즉, 『주례(周禮)』 · 『의례(儀禮)』 · 『예기(禮記)』가 그것이다. 『주례』는 고대에 국가의 조직 · 제도를 규정한 것으로 세속 의례의 국가 생활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의례』는 관(冠) · 혼(婚) · 상(喪) · 제(祭)를 중심으로 신성시된 여러 의식을 기록한 신성 의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예기』는 예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서 인간 생활에서의 윤리적 생활 원리를 기록한 것이다.
춘추 시대에 공자는 인(仁)을 내세워 유교 사상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는데, 이는 결국 예에 대한 내면적인 의미 부여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최고의 덕인 인을 ‘자기를 이겨서 예로 돌아오는 것(克己復禮)’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사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 질서가 곧 예이다.
유교 사상은 인간 사회와 현실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인간적인 노력으로 질서를 지켜 가고자 하는 사상이다. 그 질서를 규정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곧 예이다. 그러므로 유교 사상의 실질적인 내실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교 문화를 예 문화라고 하는 표현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예 사상에는 공자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이것이 다시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학자인 순자(荀子)에 의해 적극적으로 계승되어, 이론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유교를 관학(官學)으로 삼고 유교적 원리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고대로부터 전래해 온 예제(禮制)를 정비해 앞에서 말한 삼례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후대로 내려와 예는 주로 오례(五禮)로 분류, 정리되었다. 길례(吉禮) · 흉례(凶禮) · 군례(軍禮) · 빈례(賓禮) · 가례(嘉禮)가 그것이다. 길례는 모든 제사에 관한 의식 절차고, 흉례는 사람을 장사 지내는 의식 절차다. 군례는 군사와 관련된 의식 절차고, 빈례는 외교적인 의식 절차며, 가례는 혼인과 관련된 의식 절차다.
중국 사상사는 유교가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유교적 생활 규범인 예는 중국사를 일관해 중국 문화의 외형적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예의 전래는 유교의 전래와 함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언제 전래되었는가를 오늘날 정확하게 규명할 수가 없으니 예의 전래 시기도 명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2년(372)에 이미 태학(太學)이 설치되고, 그 이듬해에 국가 통치의 법률인 율령(律令)이 반포되었다. 따라서 이 때 이미 예제(禮制)의 전래 및 정비는 상당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원시적인 넓은 의미의 예 개념을 적용한다면 태학 제도(太學制度), 율령 격식(律令格式)도 모두 예의 범주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한 법률 및 제도와 구분되는 후대적인 개념으로서의 예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까지의 문헌에는 전하는 바가 없다. 따라서, 삼국시대까지의 예의 실상이 어떠했는가를 구명할 수가 없다.
우리 나라에서 오례(五禮)가 분명하게 제정된 것은 고려시대다. 『고려사』 예지(禮志)에 의하면, 예종 때에 처음으로 예를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전적(典籍)이 전해지지 않고, 의종 때 평장사(平章事)인 최윤의(崔允儀)가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50권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예전(禮典)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런데 이 『상정고금례』도 그 뒤 병화로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 『고려사』의 예지이다.
예지의 내용은 오례로써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길례는 원구(圜丘) · 방택(方擇) · 사직(社稷) · 태묘(太廟) · 적전(籍田)에 제사 지내는 의식 절차 17가지를, 흉례는 나라의 초상[國恤], 위로의 의식[慰儀], 오복 제도(五服制度) 등 11가지 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군례는 장수를 전장에 보내는 의식[遣將出征儀], 군대가 돌아왔을 때의 의식[歸還儀] 등 4가지 의식을, 빈례는 북조의 조사를 맞이하는 의식[迎北朝詔使儀], 명나라의 조사를 맞이하는 의식[迎大明詔使儀] 등 4가지 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례는 태후를 책봉하는 의식[冊太后儀],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冊王妃儀], 태자를 책봉하는 의식[冊太子儀] 등 52가지 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본 예전은 『국조오례의』다. 세종조에 허조(許稠) 등에게 국가의 기본 예제를 편찬하도록 명해,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참작하고, 『두씨통전(杜氏通典)』을 모방, 『국조오례의』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세종조에 완성을 보지 못해 세조조에 강희맹(姜希孟)의 손을 거쳐 성종 5년(1474)에 신숙주(申叔舟) · 정척(鄭陟) 등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 내용은 길례 · 가례 · 빈례 · 군례 · 흉례의 순서로 되어 있다. 길례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는 의식 및 농사와 관계되는 제사 의식 56가지를, 가례는 명절에 하례하는 의식,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등 50가지 의식을, 빈례는 중국 및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 6가지를, 그리고 흉례는 중국의 상사(喪事) 및 국내의 상사를 중심으로 한 의식 91가지를 규정하였다.
이 『국조오례의』를 오래 시행하던 중 예제가 해이해지고, 또 실제와 맞지 않는 점이 점차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1744년(영조 20)에 왕명으로 수정, 보완해 『국조속오례의』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7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에 다시 보완한 것이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다. 이것이 조선의 국가 의식의 기본 예전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기본 예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국가 의식으로서의 오례의고, 다른 하나는 사대부 가정의 의례 준칙으로서의 사가례(私家禮)다. 사가례의 기본 전적으로서는 주희(朱熹)의 『가례』를 들 수 있다.
『가례』는 주희가 재래의 복잡한 가정 의례를 정비해 시대에 맞도록 편찬, 자기 가정에서 시행하는 예라는 뜻으로 『가례』라고 명명하였다. 조선 유학이 주자학을 절대적으로 숭상하게 되자 의례 준칙에 『가례』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조선 유학자들의 행장에 흔히 “철저하게 가례를 지켰다(一遵家禮).”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가례』의 내용은 통례 · 관례 · 혼례 · 상례 · 제례로 구성되어 있다. 종래의 복잡한 예제가 관 · 혼 · 상 · 제의 사례(四禮)로 축소, 정비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예학은 대체로 이 사례를 중심으로 전개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유학은 한마디로 성리학(性理學)이라고 규정된다. 그러나 성리학은 그 학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방편을 위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의 근본 정신이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고 그 수기치인은 윤리 도덕적 완성을 통해 실현된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유학 본래의 목적 실현을 위해 먼저 철학적으로 그 근거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우주적 원리보다는 인간 심성의 내적 움직임을 자세히 천명하였는데, 그 심성의 외적인 표현이 예다. 따라서 예에 대한 구명도 그만큼 자세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성리학과 예학은 표리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조선조 유학자들의 문집 내용이 이기성정(理氣性情)에 관한 논의와 예설(禮說)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조의 저명한 유학자의 문집 치고 예설에 관한 언급이 없는 문집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설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고, 예에 관한 대표적인 업적에 관해서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의 예에 관한 연구로는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들 수 있다. 이 『예기천견록』은 우리 나라의 예학 연구에서 특색 있는 업적이다.
조선의 예설은 대체로 주자의 『가례』를 절대적인 준칙으로 그에 대해 해설하고 거기에 기재되지 않은 변례(變禮)에 관해 여러 문헌을 동원해 논증, 해설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당연히 예경(禮經) 자체에 대한 비판, 검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이 『예기천견록』만이 비판적인 안목으로 『예기』를 검토, 분석하고 재구성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예기천견록』은 11책 26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저술이다. 그가 40세인 1391년에 시작해 54세인 1405년에 완성하였으니 14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이룩된 책인 것이다. 서문에 의하면 이 저술은 그의 스승인 이색(李穡)의 명에 의해 착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예기』는 진시황의 분서(焚書)로 인해 그 원형을 잃어 버리고, 한대에 그 남은 것들을 모아 편찬하였으므로 그 편차(編次)에 정제(整齊)되지 못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잘못된 바를 바로잡아 보려고 시도하였고, 『예기』의 여러 편(篇)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 저술 가운데 다루어진 주요한 몇 가지 작업을 추려서 제시하면, 첫째, 일부의 내용은 한 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경(經)과 전(傳)으로 구분하였다.
㉠ 곡례편(曲禮篇) : 곡례편 상 · 하를 경 1장과 전 10장으로 나누었다. 즉, 곡례편 첫머리의 무불경(毋不敬) · 엄약사(儼若思) · 안정사(安定辭) · 안민재(安民哉)를 경으로 하고, 상편을 전 7장, 하편을 전 3장으로 나누었다.
㉡ 예운편(禮運篇) : 첫머리의 제3절만을 경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전은 후세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고, 공자가 설하였다고 하는 대동(大同)과 소강(小康) 설도 모두 전으로 처리하였다.
㉢ 악기편(樂記篇) : 원래 한 편으로 된 것을 상 · 하 두 편으로 가르고, 상편을 경, 하편을 전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 편의 전을 11절로 분류하였다.
둘째, 다음에 대해서는 일부는 원형을 그대로 인정하고 분절(分節)만을 시도하였다.
㉠ 증자문편(曾子問篇) : 이 편의 30여 항에 걸친 물음은 모두 시기를 달리한 것으로 일관성은 부족하나, 대체로 비슷한 내용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이를 절로 나누어, 제1절은 군상(君喪), 제2절은 사상(私喪), 제3절은 조제(朝祭), 제4절은 관혼(冠婚), 제5절은 외사사행(外事師行) 이하로 하였다. 이 외에 애공문(哀公問) · 중니연거(仲尼燕居) · 공자한거(孔子閑居) 등 여러 편도 모두 이와 비슷하게 다루었다.
㉡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 : 이 편은 과거 연문(衍文)으로 처리하던 주공천조(周公踐阼)의 위치를 바꿔 제2절의 소제목으로 삼은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전체를 5절로 나누고, 각 절의 첫머리를 소제목으로 삼았다.
셋째, 다음에 대해서는 후세의 저작으로 규정하였다.
㉠ 왕제편(王制篇) : 이 편에 대해 당대(唐代)의 학자 공영달(孔穎達)은 진한(秦漢) 연간에 지어진 것으로 보았고, 후한(後漢)의 학자 노식(盧植)은 한나라 문제(文帝) 때 박사(博士)와 제생(諸生)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권근은 그 정확한 제작 연대를 고증하기는 어렵고, 다만 문장과 내용에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후세의 작임은 분명하다고 지적하였다.
㉡ 명당위편(明堂位篇) : 이 편도 한대에 쓰여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문장의 전후 맥락은 닿으나 내용에 잡박한 점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 대전편(大傳篇) : 명당위편과 마찬가지로 한대 학자들의 손에 의해 이룩되었다고 보았다. 그 밖에 분상(奔喪) · 문상(問喪) · 복문(服問) · 삼년문(三年問) 등의 편도 문장에 조리가 있어 모두 후세의 작이라고 보았다.
위에서 본 것처럼 권근은 『예기』의 여러 편에 대해 그 성립 연대를 확정하고 그 내용의 본말(本末)을 분석, 정립하려고 하였다. 마치 주희가 대학편(大學篇)의 장절(章節)을 나누어 재구성한 것과도 같은 장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에 권근의 『예기천견록』은 특색 있는 한 예경 연구였다.
정구(鄭逑)의 예학 연구에서의 업적은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다. 이 저술은 전편 · 후편으로 되었는데, 전편은 8권 3책으로 되었고, 후편은 12권 4책으로 편찬되었다.
오선생이란 정호(程顥) · 정이(程頤) · 사마광(司馬光) · 장재(張載) · 주희를 가리킨다. 이 저술의 내용은 예의 여러 항목에 관한 위 다섯 학자들의 설을 분류, 편찬한 것이다. 전편에서는 천자 · 제후의 예를 다루고, 후편에서는 사대부의 예를 다루었다.
그 내용을 좀더 소개하면, 전편 권1에서는 예총론과 천자 · 제후의 관례와 혼례, 권2·3에서는 상례, 권4∼7에서는 제례, 권8에서는 잡례(雜禮)를 다루었다. 후편의 권1에서는 관혼 총론과 관례 · 혼례를, 권2∼6에서는 상례, 권7∼10에서는 제례, 권11에서는 잡례, 권12에서는 편례(編禮)를 다루었다.
책머리에 다섯 선생의 예설을 인용한 서책명을 기록해 두었는데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정씨외서(程氏外書)』 · 『경설(經說)』 · 『이천문집(伊川文集)』 · 『횡거이굴(橫渠理窟)』 · 『정몽(正蒙)』 · 『가례』 · 『주자대전(朱子大全)』 · 『주자어류(朱子語類)』 · 『회암어록(晦菴語錄)』 · 『주자행장』 · 『주자연보(朱子年譜)』 ·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 ·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 『성리대전(性理大全)』 · 『문헌통고(文獻通考)』 · 『역전(易傳)』 · 『서전(書傳)』 · 『시전(詩傳)』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 『춘추호전(春秋胡傳)』 · 『예기』 · 『주례』 · 『대대례(大戴禮)』 ·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 · 『논어집주(論語集註)』 · 『맹자집주(孟子集註)』 · 『중용장구(中庸章句)』 · 『중용혹문(中庸或問)』 · 『통전(通典)』 ·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 『강감대성(綱鑑大成)』 · 『가례의절(家禮儀節)』 · 『가례회통(家禮會通)』 · 『안씨가훈(顔氏家訓)』 · 『한창려집(韓昌黎集)』 · 『유선생집(柳先生集)』 · 『소학집해』 · 『한위공제식(韓魏公祭式)』 · 『사문유취(事文類聚)』 · 『학림옥로(鶴林玉露)』 · 『향교예집(鄕校禮輯)』 · 『역본의(易本義)』 · 『여씨종법(呂氏宗法)』 · 『장남헌집(張南軒集)』 등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사마광의 서의(書儀)와 본집(本集)을 얻어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또한 시골에서 다른 많은 서적을 참고하지 못했음을 한스럽다고 기술하였다. 나열된 서목을 통해 당시 예학 연구의 기본 전적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그 속에서 예설에 관한 중요한 부분을 빠뜨림 없이 분류한 사실은 높이 평가받을 업적이다.
정구가 이 『오선생예설분류』를 저술한 의도는 그의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그 서문에서 이 책의 편집에 즈음해 주희의 『가례』를 왜 수록하지 않느냐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답하기를, “『가례』는 집집마다 비치되어 있고, 사람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거듭 수록할 필요가 없고, 여러 서책에 산재해 있는 예설을 창졸간에 이용할 수 없으므로 그 편의를 위해 이를 편집했다.”고 하였다.
당시 절대적인 준칙으로 되어 있던 『가례』의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견해를 다각도로 제시함으로써 예에 대한 보다 원만한 이해를 돕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편차의 순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드시 총론에서 먼저 그 예의 근본 뜻을 밝히고 각론에 들어가 세부적인 의미를 밝혔다.
이 저술은 그 제명(題名)이 밝히고 있듯이, 다섯 선생의 예설을 분류, 정리한 것이므로 이를 통해 정구 자신의 예 사상을 자세히 알기는 쉽지 않다. 다만, 서문이나 총론의 서두에서 밝힌 예에 대한 규정 또는 인용문 등을 통해 그의 예 사상을 어느 정도 추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서문에서 “천리(天理)에 따르고 인사(人事)를 본떠서 확산하면 300과 3,000가지로 전개되고, 거두어 들이면 한 몸과 한 마음의 근간으로서 군자가 잠시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도덕과 인의가 이로써 성립되고, 군신과 부자와 형제가 이로써 안정되나니, 옛 사람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가까운 것에서부터 가정과 향리와 국가 등 먼 곳에 이르기까지 그 성경(誠敬)을 다하는 원리가 바로 이 예인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곧 예에 대한 정구 자신의 견해를 단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예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저술의 첫머리에 있는 예총론(禮總論)의 규정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곡례(曲禮)에 예는 마땅함을 좇되 세속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예란 친소(親疏)를 정하고, 혐의(嫌疑)를 결정하고 동이(同異)를 판별하고, 시비(是非)를 밝히는 것이다.”
“도덕과 인의가 예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가르침과 바른 풍속이 예가 아니면 갖추어지지 아니하고 쟁송(爭訟)을 분별함에 있어 예가 아니면 판결되지 아니하고, 학문을 익히고 스승을 섬기는 것도 예가 아니면 친절하지 아니하고, 조정의 반열과 군대의 조련과 관작에 나아가고 법률을 행하는 것도 예가 아니면 위엄이 서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제사지내고 귀신을 받드는 데도 예가 아니면 정성스럽지 못하며 장엄하지 못한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공경하고 절도에 맞게 행동하여 예를 밝혀야 한다. 사람이 예가 있으면 평안하고 예가 없으면 위태한 법이다. 그러므로 예는 배우지 아니할 수 없다. 군자가 예를 행함은 풍속을 바꾸고자 함이 아니니 제사 지내는 예와 초상 치르는 복(服)과 곡읍(哭泣)하는 위치가 모두 그 나라의 옛 법대로 하는 것이니 삼가 그 법을 좇아 행해야 한다.”
“『예기』에 이르기를 예란 의(義)의 실(實)이다. 의에 맞게 하여 행하면 곧 예가 되는 것이니 비록 성왕 때에 없었던 일일지라도 가히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선왕이 예를 정함에 근본[本]도 있고 문채[文]도 있게 하였던 것이니, 충신(忠信)은 예의 근본이고 의리(義理)는 예의 문채다. 근본이 없으면 설 수 없고 문채가 없으면 행하여지지 않는다.”
예의 총론으로 이상의 규정을 열거한 것을 통해 정구의 예에 대한 견해를 짐작할 수 있다. 위의 규정에 내포된 예의 정신은 다음 몇 가지로 다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예는 세속적인 일반성을 지녀야 한다. 둘째, 예는 다양한 인간 사회를 차등짓고 질서짓는 원리이다. 셋째, 예는 인간 사회에 필수적인 것이므로 배우지 않을 수 없다. 넷째, 예는 형식에만 구애될 것이 아니라 그 정신(義)이 존중되어야 하고 따라서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예는 정신과 형식이 함께 갖추어져야 하고 두 가지가 잘 조화되어야 한다.
『오선생예설분류』는 이상의 원리에 입각해서 여러 전적에 수록된 다섯 선생의 예설을 취사 선택하고 분류한 것이다.
김장생(金長生)은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특히 예에 관한 연구가 깊었다. 그의 저술은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이 전하는데, 대부분 예에 관한 의론이다.
예에 관한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권21·22는 『전례문답(典禮問答)』, 권23·24는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권25∼30은 『가례집람』, 권30∼34는 『상례비요(喪禮備要)』, 권35∼42는 『의례문해(疑禮問解)』이다.
『전례문답』은 당시 조정에서 예를 논함에 있어서 잘못된 점을 지적한 내용과 문의에 해답한 내용, 그리고 예설에 대한 고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례집람』은 주희의 『가례』에 나오는 용어와 이론에 대해 고금의 예설을 원용해 이를 주석하고 해명한 것이다. 그 인용된 문헌이 실로 광범하고 그 주석이 더할 수 없이 정밀해 완벽한 『가례』 해설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례집람도설』에서는 『가례집람』에 인용된 전사(殿舍) · 사당(祠堂) · 기용(器用) · 복식(服飾), 의례의 절차 · 서식 등에 관해 160여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곁들었다. 그림의 상세하고 정교함이 또한 이를 데 없다.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가례집람도설』은 조선조 예학의 완성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조 예학든 주자의 『가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가례』에 대한 주석이 『가례집람』에서 일단 완성을 본 셈이다. 그리고 예설이 단순한 이론적 서술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도설로써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끔 도해되었다는 사실 또한 조선조 예학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상례비요』는 사례(四禮) 가운데, 특히 상례에 대한 해설이다. 상례는 사례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또한 예외적인 변례(變禮)가 많다. 『상례비요』도 주희의 『가례』를 해설한 것으로, 그 서술 방식은 『가례』의 본문을 먼저 한 줄로 쓰고 해설은 그 본문 아래에 두 줄로 기록하였다.
문제가 되는 구절에 대해서는 먼저 여러 예설을 인용, 이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의례』 · 『가례』와 당시 시행되던 예식 및 국가에서 제정된 예식 사이에 차이가 나는 점은 이를 일일이 비교, 제시해 참고하도록 했으며, 때로 ‘우(愚)’ 혹은 ‘안(按)’ 자 아래에 저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함께 참고하도록 하였다.
『의례문해』는 이상의 저술에 대해서, 그리고 그 밖의 예에 관한 의문에 대해서 해답한 글을 모은 것이다. 이상의 여러 저술은 『가례』를 중심으로 상호 연관이 있는 저술로서, 『가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조선에 있어서 주희학이 실제의 생활 윤리로서 정착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에 소개한 권근 · 정구 · 김장생은 조선조 예학의 기초를 다진 한편 특색 있게 완성한 예학자라 할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예학자와 예학에 관한 저술이 있다. 이제 이들을 함께 묶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김집(金集) :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로,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에 밝았다. 예에 관한 저술에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와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고금상례이동의』는 상례에서 현행 예와 고례를 비교하되, 주로 현행 예의 불합리한 면을 고례와 비교, 고례의 타당성을 밝혔다. 즉, 현행 예가 형식에 치우쳐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난 것을 고례와 비교하면서 지적하였다. 『의례문해속』은 김장생의 『의례문해』를 계승, 예에 관한 질의에 해답한 것이다.
㉡ 유계(兪棨) : 김장생의 문인으로 예학에 밝아 저서로 『가례원류(家禮源流)』 14권 11책을 남겼다. 『가례』를 중심으로 『주례』 · 『의례』 · 『예기』 등 예경의 설을 먼저 근원적[源]인 것으로 제시하고 그 아래에 후세 학자들의 설을 보조적[流]인 것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가례원류』라 명명했다고 서문에 밝혔다.
이 책이 그 이전의 예서와 다른 점은 후세 학자들의 설로서 중국 학자들만의 설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학자, 즉 이황(李滉) · 이이 · 이언적(李彦迪) · 김장생 · 송익필(宋翼弼) 등의 설을 인용한 사실이다.
㉢ 박세채(朴世采) : 저서에 『남계예설(南溪禮說)』 20권이 있다. 박세채는 예학에 밝아 예에 대한 논급이 많았다. 이를 모아 『가례』의 순서에 따라 편찬한 것이 『남계예설』이다.
그 서술은 「수필록(隨筆錄)」이라 하여 예에 대한 견해를 간간이 수록하고, 대부분은 구체적인 예제에 대한 문답 형식으로 엮어졌다. 박세채의 예 사상은 간간이 기록된 「수필록」에서 더듬어 볼 바가 많다.
㉣ 이형상(李衡祥) : 이형상의 예에 관한 저술은 『가례편고(家禮便考)』 14권, 『가례부록(家禮附錄)』 · 『가례혹문(家禮或問)』이 있다. 이들 저서는 본래 미간본으로서 초고(草稿)로 되어 있었는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병와전서(甁窩全書)』를 간행함으로써 출판되었다.
『가례편고』는 그 서문에서, 주자가 『가례』를 저술한 지 이미 500여 년이 지났고 그 뒤 여러 학자들의 설이 다르게 주장되고 또한 여러 예외적인 사례가 많이 생겨났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 저작이 시도되었다고 밝혔다.
책머리에 인용한 서명으로서 207종의 문헌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 나라 학자들의 저술로서 『국조오례의』 · 『경국대전』, 이언적의 『봉선잡의(奉先雜儀)』, 이황 문인들이 이황과 문답한 『사례문답(四禮問答)』, 정구의 『오선생예설분류』, 정구와 김장생의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김장생의 『가례집람』 · 『의례문해』 · 『상례비요』 등도 들어 있다.
서술 방식은 『가례』의 본문을 먼저 제시하고 운서(韻書)에 의해 용어의 뜻을 일일이 밝혔다. 본문의 큰 주[大註]는 한 자를 낮추고 작은 주[小註]는 두 자를 낮추었으며 인용한 여러 설은 두 줄로 썼다.
『가례부록』은 『가례편고』에서 빠뜨린 부분 혹은 불완전한 부분에 대해 보충한 것을 모았다. 그리고 『가례혹문』은 방대한 저술로서 『가례』의 내용을 문답 형식으로 자세히 설명하였다. 『가례』 이해를 위한 좋은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 이재(李縡) : 예에 관한 저술로서 『사례편람(四禮便覽)』이 있다. 4책으로 되어 있는데, 그 서술에 요령이 있어 실제 생활에 크게 이용된 예서다. 범례에서 밝히기를 “고금의 예서가 상략(詳略)이 같지 않으니, 너무 소상하면 번거로운 것이 탈이고 너무 소략하면 지나치게 간략하게 되는 것이 탈인데, 주자의 『가례』는 고금의 제도를 참작하여 만들어졌으나 거기에도 미비한 점이 있어 『상례비요』를 지었는데 거기에도 미비한 점이 있어 고례를 참작해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
㉥ 유장원(柳長源) : 예에 관한 저술로 『상변통고(常變通攷)』 30권 16책의 방대한 책을 남겼다. 그 내용은 역시 『가례』를 중심으로 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주희의 『가례』는 예의 대체적이고 원칙적인 부분을 밝힌 것이기 대문에 이는 상(常)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 생활은 다양해서 예외적인 것이 많다. 이 예외적인 경우를 규정하는 예를 변(變)이라 한다. 그리하여 서술에서도 『가례』를 본문이자 상으로서 먼저 제시하고 아래에 변례의 경우를 나열하였다.
저술은 예서를 널리 참고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우리 나라 선현들의 문집이 많이 열거되어 있다. 특히, 그는 영남 출신으로서 그 저술에 영남 유학자들의 예설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우리 나라 예학은 김장생에 의해 크게 정리되고, 그 문하의 여러 학자들과 그 계통의 학자들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 예학에 관한 저술은 기호(畿湖) 학자들에 의해 많이 출간되었는데, 영남 지방에서의 예설에 관한 전문적인 저술은 정구 이래 유장원의 『상변통고』가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의조(李宜朝) : 예에 관한 저술로 『가례증해(家禮增解)』 10책이 있다. 책머리에서 “변례를 모아 내용을 더하여[增]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실행하도록 하고, 고례를 인용하여 내용을 풀이하여[解] 사람들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이 책의 저술 목적을 해명한다고 할 수 있다. 서문에서도 상체(常體), 즉 예의 원칙은 쉽고 변함이 없지만 변례는 끝이 없기 때문에, 이 변례를 요약해 일상 실행의 편의에 제공하고자 한다고 서술 목적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한 언명대로 변례에 대한 해설과 예증이 많은 것이 이 책의 좋은 점이라 하겠다.
예설은 예에 대한 이론적 주장이다. 그러나 예설은 단순한 이론적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예는 가까이는 한 개인의 일상적인 행위에서부터 크게는 왕가와 국가의 조직과 규범을 규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적인 중대한 예제나 그 실천에 관해 사람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할 수가 있고, 그러한 의견의 상충이 격화되면 하나의 쟁송(爭訟)으로서 발전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더구나 조선시대처럼 당파가 심하던 때에는 그럴 가능성은 더욱 짙었다. 예 문제와 관련해 이러한 쟁송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를 일러 예송(禮訟)이라고 한다.
예송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 첫번째는,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의 계모인 조 대비(趙大妃)가 효종을 위해 어떤 복(服)을 입어야 하는가의 문제였고, 두번째는 효종의 비(妃)인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가 죽었을 때 역시 그 계모인 조 대비가 무슨 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복제(服制)에 의하면 부모가 맏아들을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고, 나머지 아들들을 위해서는 일년복을 입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문제는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 아들로서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서 왕위에 오르게 된 데에 있다. 왕통(王統)으로 보면 인조를 계승하였으나 가통(家統)으로 보면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인 것이다.
효종이 죽자 당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 우참찬 송준길(宋浚吉) 등이 의논하여 기년복(朞年服), 즉 일년복으로 정해 이를 시행하였다. 그것은 곧 효종을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의 대우한 결과가 된다.
이에 대해 윤휴(尹鑴)가 반론을 제기하였다. 효종은 이미 왕통을 계승하였으니 맏아들로서 대우해 조 대비가 삼년복을 입어야 마땅하거늘 일년복을 입게 함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을 들어 이를 반박하였다. 즉, 비록 종통(宗統)을 계승[體]하였으되, 맏아들이 아닌(不正)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 허목(許穆)이 개입해 윤휴의 설을 지지하였다. 비록, 둘째 아들이라 할지라도 맏이[長男]를 대신해 종통을 이으면 그도 맏이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이부정’이란 ‘서자위후(庶子爲後)’, 즉 서자가 뒤를 이을 때를 말하는데, 그 서자는 곧 첩자(妾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효종은 인조의 적자(嫡子)로서 왕위까지 계승하였는데, 체이부정설로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면 절대로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다시 체이부정에서의 서자의 개념은 장자가 아닌 여러 아들을 뜻하는 것이지 첩의 아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을 일러 인조의 서자라 해서 부당할 것이 무엇이며, 그리고 서자가 첩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전거(典據)가 어디 있느냐고 반박하였다.
이에 허목은 『의례』 상복전주(喪服傳註)에 “적처에서 난 사람을 모두 일러 적자라 한다(嫡妻所生皆名嫡子).”라 하였고, “적처에서 난 둘째 아들을 중자라 한다(嫡妻所生第二長子是衆子).”라고 하였으며, “서자는 첩자를 말한다(庶子妾子之號).”고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맏아들을 위해서는 참최 삼년복을 입고, 둘째 이하의 아들을 위해서는 지팡이를 안 짚는 일년복을 입는다(爲長子斬衰三年 爲衆生不杖朞是也).”고 하였고, “서자를 세워 뒤를 잇되 삼년복을 입지 않는 것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다(立庶子爲後不得三年妾子故也).”라는 기록이 있음을 제시하면서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에 다시 서자 · 중자 · 첩자의 개념을 둘러싸고 논란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송준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소를 올렸다. 그에 의하면, 허목의 주장대로 하면 적처의 아들이 여러 사람일 경우 첫째 아들이 죽은 뒤 그 아버지가 삼년복을 입고, 둘째 아들이 죽은 뒤에 또 삼년복을 입고, 셋째 · 넷째 · 다섯째도 이와 같이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이론이 되니 아마 예의 본뜻이 그런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의례』의 주소(註疏)에 둘째 아들 이하를 서자라고 총칭한다고 명백히 밝힌 바 있다고 주장해 허목의 첩자설을 반박하였다.
송시열 · 송준길의 주장은 『국조오례의』에 규정한 기년설과 예설의 ‘체이부정설’에 근거한 것이다. 효종이 비록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30세가 넘어 죽어 인조가 이미 삼년의 복을 입었기 때문에 효종을 위해 인조의 비가 다시 삼년복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윤휴와 허목은 왕통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비록 둘째 아들이라 할지라도 왕통을 계승하였으면 마땅히 그 대통을 인정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쟁은 어디까지나 주장의 근거를 예설에 의거, 제시하면서 각자의 논리를 전개하는 이론적 논쟁이었다. 그런데 그 논쟁에 윤선도(尹善道)가 개입하여 허목을 지지하면서 송시열과 송준길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것은 다분히 감정이 개입된 비난이었다.
즉 “효종에 대한 대왕대비의 복제는 종통을 확립하기 위해 삼년을 복해야 함이 분명하다. 허목의 말은 예의 대원칙일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한 훌륭한 계책이다. 송시열은 ‘둘째 아들에게 맏아들의 복을 입히면 적통이 엄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이는 효종대왕이 비록 왕위에 올랐더라도 적통이 될 수 없는 결과가 되니 패리(悖理)가 분명하다.”
“둘째 아들이 부명(父命)을 받고 천명(天命)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였는데도 적통이 될 수 없다면, 이는 가세자(假世子)란 말인가? 섭정왕(攝政王)이란 말인가? 왕위를 계승한 둘째 아들은 이미 죽은 맏아들의 자손에게는 임금이 되지 않으며, 또 그 자손은 왕위를 이은 둘째 아들에게 신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시열(時烈)의 뜻은 왕위를 계승한 임금에게는 종통을 돌리고, 이미 죽은 맏아들에게는 적통을 인정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면 종통과 적통이 둘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는 없는 것이다.”는 소를 올렸다.
이 격렬한 상소로 인해 예를 중심한 논쟁은 정치적인 분쟁으로 변하고 그로 인해 파직 · 유배 등의 정치적인 처단이 가해졌다. 그러나 효종을 위한 조 대비의 복상은 송시열의 원안대로 일년복으로 시행되었다. 이것이 첫번째의 예송이다.
첫번째의 예송이 있은 지 15년 후인 1674년(현종 15) 2월에 효종의 비이고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죽었는데 이때 시어머니되는 조 대비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리하여 또 조 대비가 장씨를 위해 무슨 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처음 예조판서 조형(趙珩)이 기년복으로 안을 세웠으나 조정에서는 대공복(大功服), 즉 구개월의 복으로 정하였다. 이는 서인들의 주장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영남 유생인 도신징(都愼徵)이 소를 올려, “대왕대비의 복을 대공으로 고친 것은 어느 전례(典禮)에 의거한 것인가? 맏아들과 맏며느리의 복을 모두 일년으로 한다는 것은 『국조오례의』에 분명한데 효종의 상에는 대왕대비에게 일년의 복을 입도록 하고, 이제와서는 중서부(衆庶婦)의 복인 대공으로 한다 하니 앞뒤가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효종은 10년간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신데 어찌하여 그 배우자인 장 대비는 맏며느리의 복[嫡長婦服]을 입지 않는 것인가? 예로부터 왕통을 이은 임금이 적(嫡)이 되지 못하고 중서(衆庶)로 일컫는 일이 어디에 있었던가?”라고 하였다.
현종은 이 소를 보고 의논하도록 명하고 기해복제(己亥服制), 즉 효종을 위한 조 대비의 복은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른 것인데 이번 복제는 그렇지 않은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이번 복제는 국제(國制)에 따른 것이 아니고 고례에 따른 것임을 보고하였다.
이에 현종은 다시 “전번은 국제에 따르고 이번은 고례를 따라 중서부의 복을 입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추궁하였다. 이에 대신들은 전에 송시열이 주장한 체이부정설을 인용해 효종이 맏아들이 아닌 까닭임을 아뢰었다.
이에 현종은 선왕을 체이부정으로 규정함은 박한 처사라 하면서, 장 대비의 복을 국제에 따라 일년복으로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장 대비의 복은 남인인 유생의 소로 인해 서인들이 의논해 정한 대공복 대신에 일년복으로 번복되었다.
(4) 요약
우리 나라 예학의 이러한 전개를 간략히 요약하면, 삼국 시대까지는 문헌이 부족하여 예학이 어떤 형태로 전래되고 생활화되었던가를 알 길이 없고, 고려에서는 비록 완전한 형태로 전하지는 못하나 『오례의』가 국가 통치의 중요한 전례(典禮)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에서는 예가 국가 통치의 기본적인 전례임은 물론이고, 국민 일반의 생활의 준칙이 되었기 때문에 예학도 그 이전에 비해 두드러진 발달을 보게 되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유학을 관학으로 삼았는데, 특히 주자학을 숭상해 주자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고,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가례』를 행위의 준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예학은 『가례』를 중심한 예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근의 『예기천견록』은 예경 자체에 대한 연구, 즉 원전(原典)에 대한 비판 또는 재구성을 시도하는 연구로서, 조선조 예학 연구에서는 예외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적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권근이 생존했던 시기는 고려 말에서 조선의 건국 초기로서 주자학이 아직 그 독존적(獨尊的) 권위를 굳히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가례』 이전의 예경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또 이에 대한 연구가 자유로웠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정구의 『오선생예설분류』도 『가례』의 절대적 권위에 얽매이지 않은 예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이미 『가례』는 집집마다 비치되고 사람마다 익히는 예서이기는 하나, 다섯 선생의 예설을 새로이 수집함은 『가례』를 보족하려 한다고 하였으니, 그의 예학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김장생의 『가례집람』 · 『가례집람도설』 · 『상례비요』 · 『의례문해』에 이르러 『가례』의 권위가 절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술은 『가례』를 주석하고 해설하고, 부연함으로써 『가례』를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김장생에 이르러 확립된 『가례』의 권위는 그 뒤 변함 없이 조선조 예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유계의 『가례원류』, 이형상의 『가례편고』 · 『가례부록』 · 『가례혹문』, 이의조의 『가례증해』 등 예에 대한 저술이 모두 『가례』를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 저술 가운데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내용적 변화가 깃들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가례』를 근간으로 변례에 대한 연구가 자세하게 전개되었다. 인간의 생활 양상은 다양해서 『가례』에 규정된 예의 적용만으로는 흡족할 수가 없고, 자연히 예외적인 경우에 적용해야 할 변태적인 예, 즉 변례가 모색되고 연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례는 자연히 예의 정신을 체득한 학자들에 의해 모색되고 규정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후대로 내려오면서 예의 연구는 『가례』를 중심으로 하되 우리 나라 예학자들의 견해가 많이 수록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예의 현실적 적용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논쟁을 거듭했던 이른바 예송은 당쟁과 결부됨으로써 학문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예송은 예의 이론적 연마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통을 중시하느냐 적통을 중시하느냐의 문제를 철저하게 구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조선조의 유학이 주자학으로 한정되었듯이 조선조의 예학도 주자적 예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가례』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