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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헌
조선시대 때의 문신 · 학자, 김우옹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61년에 간행한 시문집.
정의
조선시대 때의 문신 · 학자, 김우옹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61년에 간행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661년(현종 2) 김우옹의 문인들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1846년(헌종 12) 이 판본을 대본으로 편차를 약간 달리하여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서 중간되었다. 권두에 허목(許穆)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현일(李玄逸)의 발문이 있다.

서지적 사항

목판본. 본집 17권 8책, 부록 4권 2책, 합 21권 10책. 장서각 도서와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권1에 시 58수, 사(詞) 2편, 부(賦) 3편, 권2∼5에 소(疏) 46편, 권6∼10에 차(箚) 28편, 계사(啓辭) 23편, 의(議) 2편, 교서(敎書) 2편, 전(箋) 1편, 권11∼14에 경연강의(經筵講義), 권15에 잠(箴) 2편, 권16에 서(書) 15편, 잡저(雜著) 2편, 제문(祭文) 8편, 권17에 비지(碑誌) 2편, 행장(行狀) 2편, 유사(遺事) 1편이 실려 있으며, 부록의 권1∼4에 행장·사제문(賜祭文)·제문·만사(輓詞)·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신도비명(神道碑銘)·시장(諡狀)·연보(年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주로 자연의 산수를 읊은 것이 많으며, 「임진오월문왜적대거입구경성불수(壬辰五月聞倭賊大擧入寇京城不守)」 등과 같이 임진왜란 때의 처절한 상황을 그린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또한, 스승 조식(曺植)과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곽준(郭䞭)·조종도(趙宗道)에 대한 만사도 들어 있다. 시의 분량은 많지 않으나 조격이 높고, 탈속의 고고함을 보여준다.

사 가운데 「남풍사(南風詞)」는 승문원(承文院)의 면신례(免新禮) 때 지은 것이며, 「황화사(黃華詞)」는 1590년(선조 23) 회령(會寧)의 유배지에서 국화를 노래한 작품이다.

소 가운데 「논황랍소(論黃蠟疏)」는 궁중에서 과도하게 밀을 들여가 불사(佛事)에 사용한다는 소문이 있어 이를 경계하고, 아울러 임금의 치도책(治道策)을 역설한 것이다. 「논상제소(論喪制疏)」와 「걸상례범권급재감청단소(乞喪禮泛權及裁減聽斷疏)」는 선조가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의 상을 당하자 병약한 체질에 무리가 될 것을 걱정하여 상례에 지나치게 구애되지 말고 간편하게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청백모시사소(請白帽視事疏)」에서는 국상 중에 백관이 백모를 쓰고 일을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요구하였고, 「걸억부조전사류소(乞抑浮躁全士類疏)」에서는 당시 이미 붕당이 갈라져 사류들이 함부로 남을 탄핵·모함하는 풍조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억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진언소(進言疏)」는 정유재란 때 나라의 대책을 제시한 것으로, 임금이 직접 삼군을 거느리고 친정할 것을 개진하였으며, 「신구영의정유성룡소(伸救領議政柳成龍疏)」는 당시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된 영의정 유성룡을 신구(伸救)하는 상소이다.

차(箚)는 붕당(朋黨)·시무(時務)·인물·제도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 가운데 「옥당시폐차(玉堂時弊箚)」·「옥당붕당차(玉堂朋黨箚)」·「논시사차(論時事箚)」 등은 붕당에 관한 것으로, 대체로 동인(東人)을 비호하고 서인(西人)을 지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이(李珥)와는 의기가 서로 통하였기에 「논송응형의차(論宋應泂擬箚)」에서는 송응형이 이이를 비방한 것에 대하여 이이가 실언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이이의 본의는 아닐 것이라며 도리어 송응형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하지만 점차 붕당이 노골화되자 이이에 대한 김우옹의 감정도 서서히 달라져갔다.

「헌부칠조차(憲府七條箚)」는 김우옹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사욕을 이기고 백성을 보호할 것 등의 7조를 열거하여 임금이 당장 실천해야 할 일을 개진하고 있다. 「중흥시무차(中興時務箚)」와 「진시무십육조차(陳時務十六條箚)」에서는 주로 국방과 인재등용에 대한 의견을 상세히 개진하고 있다.

옥당 동료들과 함께 올린 「옥당논김효원의사간차(玉堂論金孝元擬司諫箚)」와 「옥당논한경록차(玉堂論韓景祿箚)」, 그리고 「논심의겸차(論沈義謙箚)」는 모두 인물을 논하는 차자로, 김효원을 두둔하고 한경록과 심의겸을 매도하고 있다. 희정당의 수리를 그만둘 것을 청하는 「청정희정당수리차(請停熙政堂修理箚)」, 일본사신을 대함에 있어 여악(女樂)을 연주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청예연물용여악차(請禮宴勿用女樂箚)」, 언론을 자유롭게 개방하라는 「청광개언로차(請廣開言路箚)」 등은 모두 제도에 대해 논한 것들이다.

계사로는 박근원(朴謹元)·허봉(許篈)·송응개(宋應漑)·김응남에 대한 처벌을 가벼이 해주기를 바라는 내용의 「논삼찬인급김응남계(論三竄人及金應南啓)」, 이경률(李景㟳)·이징(李徵)·정철(鄭澈)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의 「논이경률이징정철계(論李景㟳李徵鄭澈啓)」, 최영경(崔永慶)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요구하는 내용의 「청최영경신원계(請崔永慶伸寃啓)」 등이 있다.

제도에 대해 언급한 「성균관학제칠조계(成均館學制七條啓)」는 성균관대사성으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학령(學令)·독법(讀法)·치경행재(置經行齋)·택사유(擇師儒)·선생도(選生徒)·공사(貢士)·취사(取士) 등의 7조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의(議) 가운데 「비변사헌의(備邊司獻議)」는 임진왜란 때 올린 것이고, 「중흥요무사의(中興要務私議)」는 정유재란 때 올린 것인데, 모두 전란에 대처하기 위한 계책들이다. 「비변사헌의」는 7조로 되어 있고, 「중흥요무사의」는 8조로 되어 있으며, 모두 먼저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왕의 확고한 의지가 확립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구체적인 대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교서에서는 「교서(敎書)」와 「전지(傳旨)」가 각 1편씩으로, 「교서」는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은 교서이고, 「전지」는 정철의 삭탈관직에 관한 전지이다. 「경연강의」는 1573년(선조 6) 9월 21일을 처음으로 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해진 것을 기록한 것으로, 치국(治國)의 요도, 학문의 요체, 인물의 평가 등을 광범위하게 언급하며 유가(儒家) 본연의 도덕정치를 강조하였다.

잠 가운데 「성학육잠(聖學六箴)」은 1574년 경연에서 임금으로부터 학문하는 요령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고 지어올린 것이며, 「존심양성잠(存心養性箴)」은 부수찬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선조가 ‘존심양성’이라는 네 글자를 홍문관에 내려 보내 그 뜻을 밝히라고 하여 지은 것으로, 유학적인 수양의 원리를 밝혔다. 서(書) 가운데 오건(吳健)·정구(鄭逑)·유성룡·김성일(金誠一) 외 9인 및 명나라 사신 원황(袁黃)과의 서신은 주로 임진왜란에 관한 내용이다.

잡저 가운데 「천군전(天君傳)」은 스승 조식이 「신명사도(神明舍圖)」를 만든 후 짓게 한 것으로, 마음과 육체의 관계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맞추어 풀이하였다. 행장 중에는 조식에 대한 행장이 있다. 부록의 행장은 정구가 찬한 것이며, 신도비명은 이현일(李玄逸)이 찬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전후의 정치·경제·역사·당쟁사 및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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