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90~618년이며, 평원왕의 장자이다. 고구려의 역사서인 『신집』 5권이 편찬되었고, 승려 혜자와 담징이 일본으로 가서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는 등 일본에 많은 문화를 전파했다. 한강유역 탈환을 둘러싸고 신라와 공방이 이어졌고 수나라와 접근하던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수나라와는 초기에 화전 양면 전술을 취하다가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어 총 4차례에 걸친 수의 공격을 받았다. 특히 130만 대군으로 이루어진 2차 공격을 을지문덕 등의 활약으로 격퇴했다.
재위 590년∼618년. 일명 평양왕(平陽王)이라 하며,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준수하고 제세안민(濟世이民)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565년(평원왕 7)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평원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정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600년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을 시켜 종래의 『유기(留記)』 100권을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이라는 역사서를 내게 한 것이 주목된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도 역사서를 편찬한 왕들은 왕조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군주들임을 생각할 때, 영양왕대의 역사서편찬은 부왕인 평원왕 이래의 국가의 안정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결실을 계승, 발전시킨 국력의 바탕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영양왕의 위치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원적인 축에 의해서 유지되어온 6세기 무렵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589년 수나라의 중국통일로 재편성되어가는 와중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왕은 즉위와 더불어 수나라 문제(文帝)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에 봉해졌고, 또한 부왕이 가지고 있던 요동군공(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계승하였다. 한편, 조공을 통해 수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모색을 시도하였다. 반면에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말갈족 · 거란족들을 조종하여 자기편에 넣고 돌궐족과의 제휴도 모색하였다.
이와 같이 화전양면에 대비하면서 노력하면서 왕은 598년에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는 국력을 총집결해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제1차 침입은 598년에 있었다. 앞서 요서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발로 수나라의 30만 군사가 쳐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기근 · 질병 · 장마 등으로 인해 스스로 퇴각하였다.
제2차 침입은 612년에 있었다. 양제(煬帝)가 국력을 경주하여 130만 대군으로 수륙 양면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동성(遼東城)에서 지구전을 펴 수군의 침략예봉을 꺾고, 또 대동강에서는 침략군의 수군을 대파하였다. 수나라는 별동대를 구성해 평양성 가까이 진격했으나 군량의 부족으로 후퇴하던 중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에 의해 살수(薩水)에서 참패를 당해 총퇴각하였다.
제3차 침입도 613년에 있었으나 요동성 · 신성(新城) 등에서 고구려군이 선전하였고, 또한 수에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게 되었다. 제4차 침입은 614년에 있었다. 이때는 수나라의 내부적 혼란과 평화교섭을 원했던 고구려의 이해가 맞물려 철군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수나라는 곧 멸망하였으나, 고구려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장군 온달(溫達)이 아단성(阿旦城)을 공격하는가 하면, 603년과 608년에는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압박을 받던 신라는 적극적으로 수나라와의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백제와의 관계도 만만치 않았다. 백제가 수나라와 접근책을 쓰므로 598년과 607년에 이를 공격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수나라와의 대결을 대비하여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도 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595년 일본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된 혜자(惠慈)가 도일하였고, 610년 담징(曇徵) · 법정(法定) 등을 파견하는 등 일본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