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59~590년이다. 양원왕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부왕인 양원왕의 즉위 이래 계속된 내분과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했으나 왕권은 귀족들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았다. 또 남조의 진나라와 북조의 북제·북주가 대치하고 있던 중국 남북조와 다면 외교를 펼쳐 국제관계의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589년에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켜 대륙을 통일한 후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 위협을 가하자 그에 대한 대책을 준비하다가 사망했다.
재위 559년∼590년. 이름은 양성(陽成) 또는 탕(湯). 일명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 · 평강왕(平岡王) · 평국왕(平國王)이라고도 한다. 양원왕의 장자로 태어나 557년(양원왕 13) 태자가 되고, 559년 왕위를 계승하였다. 담력이 있고 승마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560년(평원왕 2) 졸본(卒本)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음식을 줄이고, 백성을 위로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하였으며, 궁실의 수리를 중단하는 등 양원왕의 즉위 이래 계속된 내분과 민심의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의 전제적 권한은 이미 귀족세력들의 발호에 의해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586년에는 지금의 평양 대성산성(大聖山城) 일대에서 장안성(현 평양시가)으로 도읍을 옮겼다.
외교면에서 당시의 중국은 남조의 진(陳)나라와 북조의 북제(北齊) · 북주(北周)가 대치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전통적인 외교정책대로 이들과 두루 교섭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관계의 안정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56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에, 563년에는 진나라로부터 ‘영동장군(寧東將軍)’에 봉해졌다. 또한 580년에는 북주에 조공을 하고 ‘개부의동삼사대장군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에 봉해졌고, 581년에는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가지고 ‘대장군요동군공(大將軍遼東郡公)’의 지위를 받았다.
이같이 중국과는 표면적으로 순탄한 관계를 가진 듯하지만, 양원왕 이래 북조와의 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북주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공격해왔을 때, 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에서 싸웠다.
586년에는 고구려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별부(契丹別部) 출복(出伏) 등이 이탈해 수나라에 투항하였고, 돌궐(突厥)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긴장 상태는 여전하였다. 한편, 한강유역의 점령을 둘러싸고 기존의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빈발하자, 고구려는 이들과 소강상태를 유지한 채 북방과 서방의 변화에 더욱 주목하였다.
589년에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등 전쟁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 수나라 문제는 590년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어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라고 위협을 가하였다. 평원왕은 이러한 수나라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준비하다가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