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는 276년(서천왕 7) 왕이 이곳을 순시하였다고 한다. 봉상왕 때 모용외(慕容廆)가 변경을 침입하자 국상(國相)인 창조리(倉助利)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노자(高奴子)를 신성의 태수로 삼아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고국원왕 때 신성의 북쪽을 수축하였으며, 339년(고국원왕 9) 연나라 왕이 침입한 적이 있었으나 고국원왕이 성을 다시 튼튼히 쌓은 뒤 환도하였다고 한다.
신성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을 때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의 하나였으나 667년(보장왕 26) 9월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에게 함락되었다. 당나라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봉천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설치하고 옛 고구려 영토를 관할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부여융(扶餘隆)을 이곳에 데려와 안동도호부를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부여융이 죽은 뒤에는 이곳이 발해 · 말갈 등 여러 나라에 점령되어 이곳에 설치하였던 신성주(新城州)도 함께 없어졌다고 한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신성이 동북방면의 요충지로 군사상 중요한 곳이라 하였고, 고구려도 이곳이 국도와 연결되는 국방상의 요해지로 중요시하던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