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溫達)의 가계(家系)와 출신은 분명하지 않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 시기의 여러 문헌에서 온달은 평양 출신으로 나오나, 『 삼국사기』 「온달전」에 바탕을 둔 이해에 불과하다. 『삼국사기』 「온달전」을 보면 그의 집은 매우 가난해서 걸식(乞食)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온달은 전통적인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다만, 평원왕의 첫째 딸인 평강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에 대형(大兄) 관등을 받았다고 전한다는 점에서 하위 귀족 또는 신흥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온(溫)을 성(姓)으로 보면, 659년 횡산(橫山)에서 당의 설인귀(薛仁貴) 등과 전투하였던 온사문(温沙門)과 같은 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온씨의 시조로 전하고 있다.
온달의 활동은 『삼국사기』 「온달전」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비록 「온달전」은 설화적인 색채가 강하고, 그 원전은 통일신라 이후에 문학 작품의 형태로 정리된 것이었다고 파악되나,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온달전」에 따르면, 온달은 집은 매우 가난해 걸식하고 있었는데, 평원왕의 공주와 혼인하면서 집과 토지, 노비와 우마 및 각종 살림살이를 마련하였고, 국마(國馬)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언덕에서 열리던 수렵대회에 참석해 두각을 나타냈으며, 마침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침범하자 이산(肄山)의 벌판에서 선봉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평원왕의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 관등을 받았다고 한다. 공주의 후원으로 군사적 능력을 함양하고 군인으로 출세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현재 온달이 전공을 세웠다고 한 고구려와 후주의 전쟁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후주는 북주(北周)로 파악되는데, 북주의 무제는 578년 6월 사망하였고, 이때까지 고구려와 북주는 국경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577년 전반까지 고구려의 서방 변경이었던 요서(遼西) 지역에는 북제(北齊)의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고, 580년대 전반까지는 북제의 영주자사(營州刺史)였던 고보령(高寶寜)이 돌궐(突厥)의 지원을 받으면서 북주와 대립하고 있었다.
국제 정세로 보아 북주가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였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삼국사기』 「온달전」에 보이는 고구려와 후주의 전쟁은 고구려와 고보령 세력의 대립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고, 고구려가 고보령 세력을 지원하면서 북주와 대립한 것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온달은 영양왕 대까지 활동하였다. 온달은 영양왕이 즉위하자 출정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빼앗아 간 한강 이북의 영역을 되찾아오겠다고 한 것이다. 온달은 출정에 앞서 계립현(鷄立峴) ·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되찾아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온달이 수복하고자 한 한강 이북의 영역이란 구체적으로 지금의 남한강 유역으로 파악된다. 6세기 중반 신라와 백제 연합군의 북진으로 상실한 영역이었다.
온달은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온달이 전사하였다고 한 아단성의 위치는 논란이 있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으로 보기도 하고,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는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고구려와 신라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북부에서 대립하였다는 점을 중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603년 고구려의 신라 북한산성 공격과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는 「온달전」에서 남한강 유역이 강조되었고, 남한강 상류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남진하였을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온달의 출정과 전사는 한강 유역 수복을 추구하였던 6세기 후반 고구려 사회의 지향이 투영된 것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