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무(高延武)의 가계 및 생몰 연도는 분명하지 않다.
고연무는 670년 3월 신라의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각각 정병(精兵)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까지 진격하였다. 옥골은 오골성(烏骨城)으로,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파악된다. 고연무와 신라 설오유의 군대가 옥골에 도착하였을 때 말갈 군대가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양측의 군대는 670년 4월 4일에 전투하였는데, 고연무와 신라 설오유의 군대가 대승하였다. 그런데 당의 군대가 이어서 도착하자 고연무와 신라 설오유의 군대는 퇴각해 백성(白城)에서 지켰다고 한다. 현재 백성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압록강 이북의 백석성(白石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670년 3~4월 고연무와 신라 사찬 설오유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서 말갈 및 당의 군대와 전투한 것은 나당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주목되고 있다. 이 전투에서 고연무는 제2관등인 태대형(太大兄)이었다고 하는데, 고연무가 지휘한 정병 1만 명이 신라 설오유의 군대와 구분되었다는 점에서 멸망 이전부터 고구려의 장군으로 일정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자리하였던 한성(漢城)의 욕살(褥薩)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680년 5월 보덕국왕 안승(安勝)의 명으로 신라 문무왕에게 표문을 전달했다. 문무왕이 생질을 안승의 왕비로 맞이하게 해준 데 대한 감사의 표문이었다. 이때 고연무는 대장군 태대형이었다. 보덕국의 최고위 무관이었다. 이로 보아 670년 3~4월의 전투 이후 고연무는 안승과 함께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였고, 보덕국 건립과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