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은 668년 평양성 함락 이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유민의 제반 활동이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었지만, 당나라에 불만을 품고 저항한 유민도 나타났다. 검모잠과 안승은 한성을 중심으로 왕국의 재건을 추구하였다. 두만강과 송화강 유역 그리고 요동 지역의 고구려 주요 거점에서도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 한성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673년 말까지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임진강 유역에서 대패하며 재기하지 못하였다. 각지의 부흥운동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었지만, 일부 지역은 신라와 당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저항을 지속하였다. 당나라에 투항하였지만, 당나라의 관인(官人)을 중심으로 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지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저항한 유민도 나타났다. 669년 5월 당나라가 2만 8천 이상의 민호를 사민하였는데, 이반자(離叛者)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한층 거세진 것이다.
유민의 저항은 고구려 각지에서 나타났는데, 왕국의 재건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유민의 저항과 부흥을 위한 제반 활동을 부흥운동이라고 한다.
우선 검모잠(劍牟岑) 세력이 주목된다. 그는 수림성(水臨城) 출신의 대형(大兄)이었는데, 유민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에서 패강(浿江)의 남쪽까지 왔다. 패강 남쪽에서 당나라의 관인과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는데, 서해 사야도(史也島)에서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하였고 군주로 추대하였다. 이때 한성은 지금의 황해도 재령으로 국내성(國內城)과 함께 고구려 후기의 별도(別都) 중 하나였다.
검모잠과 안승은 고구려의 옛 중심지에서 왕국의 재건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안승은 보장왕의 아들 또는 외손(外孫)이었다고 하고, 혹은 연정토의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연정토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외손으로 본다. 고구려 왕실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검모잠과 안승은 670년 6월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670년 8월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하였다. 신라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신라와 당나라는 적대 관계로 변화하고 있었다. 670년 3월 신라의 사찬 설오유는 고구려의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정병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고, 4월에 오골성(烏骨城) 즉, 지금의 요령성 봉황산성(鳳凰山城) 부근에서 말갈 및 당나라의 군대와 전투하였다.
흔히 이 전투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고연무는 신라와 구분되는 고구려의 정병 1만을 지휘하였다는 점에서 전투가 있기 전부터 부흥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연무는 안승의 보덕국에서 대장군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한성에서 검모잠과 안승, 그리고 고연무가 함께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성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서북부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한성 이외의 지역에서도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668년 당의 검교동책주도독부(檢校東冊州都督府) 장사(長史)였던 양현기(楊玄基)는 반수령(反首領) 고정문(高定問)을 주살하였다고 한다. 동책주도독부는 두만강 유역의 책성(柵城)에 설치된 안동도호부 예하의 기미부(羈縻府)였다. 고정문은 두만강 유역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책성 욕살(褥薩)을 역임하다가 당에 투항하였던 이타인(李他仁)은 평양성 함락 이후 부여(夫餘)로 진격해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부여성(扶餘城) 지역을 가리킨다. 송화강 유역에서 역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671년 7월 당나라군은 안시성에서 고구려 반병(叛兵)을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안시성을 비롯해 요동 지역의 일부 성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벌노성(伐奴城)에서는 고구려가 이끈 말갈의 군대를 맞아 방어에 성공하였다고 하였다. 현재 벌노성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요동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검모잠 등의 거병에 당나라는 670년 4월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 등을 파견하였다.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비롯한 각지의 부흥운동 세력을 제압하고 신라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당나라군의 파견과 남진에 고구려부흥운동 세력 내부에서는 분열이 발생하였다.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성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은 적어도 673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공세에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672년 7월에는 평양을 내주었고, 672년 8월에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빼앗겼다. 이어 신라군의 지원을 받아 백수성(白水城)에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는데, 그들을 추격하다가 석문(石門)에서 대패하였다. 주요 전투의 지명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평양 남쪽의 황해도 일원에서 전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673년 고구려부흥군은 우잠성(牛岑城)을 비롯해 황해도 일대의 주요 거점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신라군과 함께 임진강 유역에서 전투하였지만 대패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부흥군은 재기할 수 없었고, 연이어 신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대략 4년 동안 고구려 각지와 한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한 것이다.
신라로 망명한 안승과 유민은 금마저(金馬渚)에 설치된 보덕국(報德國)에서 왕국의 형태를 유지하며 활동하였지만, 684년 11월 반란을 도모하다가 진압되어 결국 해체되었다. 677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에 임명된 보장왕은 말갈을 포섭해 부흥을 도모하였지만, 681년 일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고구려 부흥을 재개한 것은 대조영(大祚榮) 등 발해의 건국 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