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모잠은 삼국시대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한 지도자이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대동강 남쪽으로 옮겨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670년 4월에 거병하고 6월에 한성(漢城)을 거점으로 부흥세력을 결집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에 자리를 잡은 검모잠은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항쟁이 계속되자 당나라에서 병사를 보내 진압하였다. 당나라의 진압에 대처하는 방안을 놓고 안승과 대립하였다가 그에게 피살되었다.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출신으로 관등은 대형(大兄)이다. 수림성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임진성(臨津城)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검모잠의 활동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평양 이북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 뒤인 670년 유민 등을 규합해서 당나라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浿水 : 대동강] 남쪽으로 옮겨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검모잠의 거병 시기에 대해서는 중국측 기록에는 670년 4월의 일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6월의 일이라고 한다.
670년 4월 이전에 거병하고 6월에 남하해 한성을 거점으로 부흥세력을 결집시킨 것으로 보인다. 669년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행한 대규모 사민(徙民)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긴 것과 연결해서 거병시기를 669년으로 보는 설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
최초 활동 지역인 궁모성은 현재 경기도 연천시 연천읍 공목달현(功木達縣)으로 비정하기도 하나 대동강 북안의 평양 인근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궁모성을 서해의 수군 기지로 보고 고려시대에 궁구문(弓口門)이라 불리던 평안북도 의주로 비정하려는 견해도 있으며, 최근에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요동과 한반도를 연계해 파악하여 개모성(蓋牟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새로이 제기되었다.
검모잠은 한성[漢城 : 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자리를 잡고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가 있던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문무왕은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계속된 항쟁이 이어지자 670년 4월 당나라에서는 좌감문대장군(左監門大將軍)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우령군위대장군(右領軍衛大將軍) 이근행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삼아 병사를 보내 진압하게 하였다.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놓고 의견 대립으로 안승에게 피살되었다. 검모잠의 피살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670년 7월 말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