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

대동강
대동강
자연지리
지명
평안남도 북동부 낭림산맥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남서류하다가 남포특별시 부근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이칭
이칭
열수(洌水), 패수(浿水), 패강(浿江), 왕성강(王城江)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평안남도 북동부 낭림산맥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남서류하다가 남포특별시 부근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개관

길이는 438㎞이고, 유역면적은 1만 6673㎢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이다. 좌안에 지류가 많은 비대칭적 하계로, 총 443개의 지류가 있으며 그중에서 길이 15㎞ 이상 되는 지류가 26개이다. 주요 지류로는 좌안에 마탄강, 비류강, 곤양강, 황주천, 재령강 등이, 우안에 보통강, 송화강 등이 있다.

대동강 유역은 북쪽에 묘향산맥, 남쪽에 멸악산맥, 동쪽에 낭림산맥이 둘러 있어, 평안남도의 대부분 지역과 황해도의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관서지방의 중앙부를 차지한다.

대동강은 고조선시대에는 열수(洌水), 고구려시대에는 패수(浿水) ·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라고 불려오다가 고려시대 이래로 대동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때에는 왕성강이라고도 하였는데, 고종 때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는 그의 시구에 “여러 물이 모여서 돌아 흐르므로 이름이 대동강이 되었다(衆水所匯名爲大同).”라고 그 이름의 유래를 밝혔다.

대동강은 중생대 중부삼첩기의 송림구조운동과 중부-상부 쥐라기의 대보구조운동에 의하여 하천의 기본형태가 이루어졌다. 그 후 신생대의 지각운동과 침식작용으로 많은 지류가 형성되었다.

대동강은 낭림산맥의 동백산(東白山)과 소백산(小白山)에서 발원하여 대체로 요동(遼東) 방향의 산계(山系)를 따라 남서류한다. 본류는 덕천 부근에서 마탄강(馬灘江, 52.6㎞)과 합류한다.

북창 부근에 이르러 지질구조선(地質構造線)을 따라 급전하면서 남류한다. 순천 부근에서 장선강(長鮮江), 성천 부근에서 비류강(沸流江, 132.7㎞)을 합류하면서 다시 남서 방향으로 흐른다.

중 · 하류에 이르러 남강(南江, 185.4㎞)이 합류되면서 하폭이 넓어지고 유량이 급증하여 대하천이 되고, 주변에 넓은 평야가 발달한다. 하류에서는 황주천(黃州川) · 재령강(載寧江, 129㎞)과 합류하여 남포 서쪽에서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유역의 자연
지질 · 지형

대동강 유역의 대부분은 퇴적암과 퇴적변성암지대이며 이 밖에도 화강편마암, 결정편암, 화강암지대 등 복잡한 지질구조대로 형성되어 있다. 크고 작은 단열대를 따라 본류와 지류들이 흐르기 때문에 강줄기들이 직각에 가까운 모양으로 구부러진 격자상 수지형 하계를 이루기도 한다.

중 · 상류 지역에는 하부 고생대층인 조선계(朝鮮系)의 석회암과 상부 고생대층인 평안계(平安系)의 육성층(陸成層)들이 주로 분포한다. 이에 반하여, 중 · 하류 지역에는 이들 암석들 외에도 황해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상원계(祥原系)의 석회암 · 규암 · 천매암 등이 있고, 하구 주변은 화강암 · 화강편마암 · 변성퇴적암 등이 복잡하게 분포하고 있다.

지형은 사방에서 대동강을 향하여 점점 낮아지는데, 대체로 상류의 산지, 중류의 구릉지, 하류의 대평원지대로 구분할 수 있다.

상류 산지는 평안남도 영원 · 맹산 · 양덕 등 3개 군과 황해도 곡산군 북부 및 수안군 북부에 걸친 지역으로서, 1,000m 이상의 높은 산지가 중첩 분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700∼800m의 높이를 이룬다. 이곳은 골짜기 폭이 좁고 곳곳에 급류와 협곡이 많으나 영원 · 맹산 · 양덕 · 곡산 등에 산간 분지가 있다.

중류는 덕천 · 순천 · 성천 · 중화 · 서흥 · 봉산 · 평산 · 재령 등에 걸친 지역으로 석회암이 넓게 분포하고 있어 전체가 석회암 구릉지이다. 덕천 · 순천 · 성천 · 강동 등은 석회암의 용식분지(溶蝕盆地)가 발달하였는데, 가장 큰 것은 순천분지이다.

곳곳에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하여 가수굴(佳殊窟, 중화군) · 청계굴(淸溪窟, 강동군) 등의 동굴과 서흥 · 신막(新幕) 일대의 돌리네(doline: 석회암 토지의 움푹 패인 땅) 군(群)이 나타난다.

하류 유역은 20∼50m 높이의 낮은 기복을 가진 침식된 석회암 대지(karst) 준평원이다. 중생대말에 형성된 석회암의 산악지대가 오랜 세월 용식작용을 받아 평평하게 된 곳으로, 일본인 나카무라(中村新太郎)가 낙랑 준평원(樂浪準平原)이라 이름지었다. 대체로 대동강을 경계로 북쪽의 평양 준평원과 남쪽 황주강 유역의 황주 준평원으로 나눌 수 있다.

평양평야는 준평원과 충적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저평한 준평원 상에도 평양사동구릉(平壤寺洞丘陵) · 중화구릉(中和丘陵) 등이 50∼80m의 야산지를 이루기도 한다. 구릉지는 혈암(頁岩) · 점판암 등으로 구성된 이질적인 소지층군들이다.

평원상을 흐르는 대동강에는 기반암이 측방침식(側方浸蝕)을 받아 형성된 절벽과 물 흐름의 이동과 퇴적으로 형성된 하중도(河中島)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평양 부근의 모란대(牡丹臺)는 하안에 형성된 절벽이고, 능라도(綾羅島) · 양각도(羊角島) · 봉래도(蓬萊島) 등은 하중도로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더불어 일대 절경을 이룬다.

남부 재령강 유역의 재령평야는 전국적으로도 대표적인 대평야로 본래 해안선이 완만하게 육지 쪽으로 휘어든 곳이었는데 그 뒤 퇴적과 융기로 육지화된 충적평야이다. 하구 부근은 익곡(溺谷)이 발달하여 하천 기폭이 넓고 수심이 깊다.

서해안의 다른 대하천과 마찬가지로 대동강도 감조하천(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는 하천)이어서 조수의 영향이 평양시의 사동 부근까지 미친다. 하구에서의 간만의 차는 약 6m이고, 평양 부근에서는 약 1m에 달한다.

대동강은 관서지방의 중앙부를 흐르며 주변에 넓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어, 그 유역은 일찍이 우리 조상들의 삶의 무대였고 역사의 중심지로 이어져왔다. 유역 내에는 농업의 발달은 물론 풍부한 수자원, 지하자원 및 임산자원과 편리한 내륙수운을 이용하여 일찍부터 근대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기후

강의 연안은 대륙에 인접하고 반도의 서쪽에 위치하여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강하다. 같은 위도의 반도동안(半島東岸)보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강수량도 적다. 겨울철에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으로 연평균기온은 8∼11℃,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은 -8∼-10℃로 동해안 지역보다 3∼4℃ 가량 낮다.

8월 평균기온은 24℃ 내외로 동해안보다 약간 높다. 무상기일(無霜期日)은 180∼190일이며, 기온은 북으로 갈수록, 또 내륙으로 갈수록 대체로 낮아진다. 연평균강수량은 강의 중 · 하류지역이 700∼900㎜로 우리나라 3대 과우지역(寡雨地域)의 하나가 된다.

이는 연안에 한류가 흐르는 데다 지형적인 요인으로 강수량이 적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 · 상류지역은 지형성강수의 영향으로 연평균강수량이 1,000∼1,200㎜에 달한다.

이처럼 강연안은 대체로 강수량이 적은 데 반하여 일조율은 62∼63%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어서 하구 연안은 천일제염, 산악지역은 감자 · 조 · 옥수수 · 콩 등을 재배하는 데 유리하다. 대동강의 결빙기간은 12월 초순 내지 중순부터 2월말에서 3월초까지로 대략 83일 정도이다.

식생(植生: 일정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의 집단)과 관련이 깊은 기후지수로 볼 때 연안 지역은 온량지수(溫量指數) 90∼100, 한랭지수 -30∼-40, 최대증발산량(最大蒸發散量) 650∼700㎜ 내외에 속한다.

생태

연안의 식물상을 보면 상류의 대략 1,000m 이상 되는 고산지대는 한대림으로 이깔나무 · 가문비나무 · 분비나무 · 전나무 · 잣나무 등의 침엽수와 자작나무 · 신갈나무 · 새양버들 등의 낙엽 활엽수가 대삼림을 형성하고 있다. 이밖에도 낭림산맥의 서쪽 사면에는 수수꽃다리 · 산팽나무 · 빈추나무 · 장구밤나무 같은 특이한 수종들이 분포한다.

중 · 하류유역의 삼림으로는 신갈나무 · 떡갈나무 · 버드나무 · 참나무류 · 소나무 · 비술나무 등이 분포하여 냉온대 북부 삼림대를 이룬다. 식물구계(植物區系)로 볼 때 연안 지역은 관서아구(關西亞區)에 속하여 남만주(南滿洲) 지방과 관계가 깊은 만주흑송 · 수수꽃다리 · 몽고뽕나무 · 지모 등이 주종을 이룬다.

동물상은 상류의 고지 동물상과 중 · 하류의 저지 동물상으로 대별되는데, 특히 고지 동물로는 사슴 · 노루 · 곰 · 범 · 시라소니 · 산양 · 대륙멧돼지 등이 만주지방과 연결되어 분포하고 있다. 한편, 강에는 숭어 · 잉어 · 붕어 · 농어 · 뱀장어 · 메기 · 쏘가리 · 누치 · 산천어 · 열목어 등 68종의 담수어들이 서식하고 있다.

토양은 주로 회갈색 삼림토인데, 중 · 하류 일대의 석회암지대에는 석회암이 변한 테라로사(terra rossa)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 토양은 적색 내지 적갈색의 식질양토(埴質壤土)로 보수력(保水力)이 높기 때문에 건조하고 증발이 심한 이 지방에서는 농작물의 생육에 매우 유리한 토양이다.

역사와 문화유적

평안남도의 중심부를 흘러 서해로 유입하는 대동강 유역은 한반도에 인류가 거주한 이래 주요한 생활 근거지가 되어왔다. 고조선의 건국에서부터 고구려 ·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에서 차지하는 대동강 유역의 비중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큰 것이었다.

대동강 유역에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켜온 것은, 이곳에서 발굴된 여러 유적에서 잘 알 수 있다. 평양 동남쪽에 있는 상원의 검은모루동굴에서는 큰곰 · 동굴곰 · 하이에나 · 코뿔소 · 큰뿔사슴 · 물소 · 원숭이 · 말 등의 많은 크고 작은 짐승뼈가 발굴되었다.

덕천군 승리산의 석회암 동굴에서도 직립원인(直立猿人, Homo erectus)과 네안데르탈인(Homo sapiens neanderthalensis)의 중간형태로 보이는 소녀의 두개골이 발굴되었다.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한반도의 신석기시대에서 서해안지방의 표식적(標識的) 유물이 출토된 곳도 이 대동강 유역이다.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궁산리에서 출토된 토기는 서해안 지방의 빗살무늬토기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신석기시대 후기(서기전 2000∼1000년경)에 속하는 평양의 금탄리 유적에서는 많은 어망추(漁網錘)가 발굴되어, 이곳에서 활발한 어로활동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 이들의 집터는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가 4∼5m 정도였다.

특히, 평양의 남경리에서는 탄화된 조가 발견되어 일찍부터 이 지역에서 농경이 실시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점은 청동기시대의 층위에서 쌀 · 보리 · 콩이 발견됨으로써 다시 확인되었다. 초기 철기시대(서기전 300∼0)에 이르면, 대동강 유역에는 요령(遼寧)지방 양식과 다른, 세형동검 · 정문식세문경(精文式細文鏡) · 철제무기 · 농구 · 공구 등이 나타나게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왕검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준왕(準王) 때 위만(衛滿)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준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평양이 지금의 대동강 유역이라면, 위만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였던 고조선과는 달리 대동강 유역의 철기문화의 토대 위에서 최초의 국가형태를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강 유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요하(遼河) 유역이 그 중심 무대였음이 지적되고 있어, 고조선의 실체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요청된다. 위만조선은 서기전 108년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되고 한사군이 설치되는데, 그 중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것이 이른바 낙랑군이라 한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의 평양위치설에 반대하여 최근에는 평양지방이 아니라 요동지방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지금의 평양에 있던 낙랑은 몇 개의 낙랑 중의 하나라는 전제하에 종래 이곳에서 발굴·출토된 낙랑유물도 한사군의 낙랑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나아가 그 유물 자체의 사실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이, 발굴된 유적이나 그 유물의 이해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동강 유역,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는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의 많은 유적이 산재한다.

먼저 평양에서 대동강 남쪽 강가에는 토성지(土城址)가 있다. 이 토성은 지름이 700×600m의 둥근꼴이며, 성안에서 관청명 · 길상문(吉祥文) 등의 문자명 와당(文字銘 瓦當)과 봉니(封泥)가 발견되었다. 이 봉니에는 낙랑군의 관직명과 각 현의 관명 등이 찍혀 있어, 이곳이 낙랑과 관련된 곳이라는 종래의 주장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나, 그 사실성에 의문을 가지는 학자도 많다.

성 주위 약 8㎢의 지역에는 약 1,200여기의 고분이 산재하는데, 크게 목곽분(木槨墳)과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나눌 수 있다. 목곽분은 지하의 움 안에 나무 각재로 네모진 형태의 곽을 만들었고, 봉토는 방대형이다. 목곽분에서는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는데, 그것은 칠기 · 목기 · 청동기 · 철기 · 토기 등의 다양한 종류이다.

벽돌무덤은 목곽분보다 뒤진 시기의 것으로 봉토는 역시 방대형이다. 묘실은 단실(單室)과 전 · 후의 2실이 있으며, 대체로 ㄱ자형이다. 특히, 평양 역전의 영화(永和) 9년명 벽돌무덤은 ㄱ자형의 묘실로서, 아래는 벽돌, 위는 돌로 쌓아져 벽돌무덤에서 석실무덤으로 옮아가는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다.

4세기가 되면 고구려가 새로 대동강 유역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군현 및 중국 세력과의 투쟁과정에서 성장하던 고구려는 313년(미천왕 14) 낙랑을 정복하고, 다음해 남쪽에 있었다는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고구려가 이들 전 낙랑 · 대방 지역을 차지함에 따라 대동강 유역은 고구려의 관할 아래 들어가고 그 뒤 고구려의 발전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활발한 영토의 확장을 실현한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 때는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남방진출을 보다 적극화하기 위하여, 그때까지의 수도였던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國內城)을 떠나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427년(장수왕 15) 이후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가 되면서, 대동강 유역은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고구려의 핵심지역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는 고구려 시대의 수많은 유적 · 유물이 산재하여 당시의 문화유산을 전해주고 있다.

평양천도 때의 도성으로 조영된 것은 대성산성(大城山城)과 안학궁(安鶴宮)으로, 산성과 평지성(平地城)의 조화를 이룬 고구려 도성제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성은 유사시에 사용되었으며, 평시에는 거주하지 않고 평지성에서 생활하였다. 안학궁지는 1958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 결과, 남북 방향의 주축선상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남궁 · 중궁 · 북궁이 있고, 북궁의 좌우에는 다시 동궁 · 서궁이 배치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궁지의 사방은 대략 각각 622m의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성산의 기슭에 있으며, 성내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형세로, 이곳에서 수많은 건물터 및 유물이 발굴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586년(평원왕 28) 도성을 다시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장안성은 대성산성과 안학궁의 남서쪽에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668년(보장왕 27)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평양성이 함락되기까지 이곳에 정도(定都)하게 되었다.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한 뒤 고구려인의 생활풍습이나 여러 문화요소를 보다 잘 살필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에 분포하는 벽화고분을 통해서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63기의 고구려 벽화분 중 43기가 평양과 그 부근에 존재한다.

고구려 벽화분으로서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것은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에서 발견된 이른바 동수묘(冬壽墓)이다. 이 무덤은 방대형의 봉토 안에 전실 · 후실, 그리고 연실(羨室)로 구성되고, 전실 · 후실의 네 벽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에는 인물 · 관직명 · 외양간 · 부엌 · 무악도(舞樂圖) 및 묘 주인의 생전의 출행(出行) 모습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묘는 낙랑이 망한 뒤 이곳의 중국계 주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일본 · 중국 학계의 견해와, 동수는 다만 무덤축조 책임자이며, 주인은 미천왕이라고 하는 북한학자들의 주장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밖에도 대동강 유역에 존재하는 주요한 고구려시대 벽화분으로는 평양시 삼석구역의 개마총(鎧馬塚), 용강군의 쌍영총, 평안남도 중화군의 진파리 고분, 강서군의 강서대묘와 강서면 덕흥리 고분 등 다수의 벽화분이 있다.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세력과 남방의 백제 · 신라와의 투쟁을 계속하던 고구려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는데, 특히 수 · 당과의 몇 차례 전쟁을 겪은 뒤,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갔다.

수나라 다음에 등장한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먼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하던 고구려의 영토는 대부분 당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일부가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신라가 고구려의 일부 유민과 함께 당군 축출에 나서자 곧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군이 평양을 떠난 뒤 이 지역이 바로 신라의 영향권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에 이르게 된 것은 735년이며, 그 뒤에야 이 지역에 대한 경영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30여 년이 지나 그곳에 건국된 발해가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하자, 자연히 남쪽의 신라와도 충돌이 발생하고, 그 결과 대동강에서 동해안의 원산만을 잇는 선이 이들 양국의 경계가 되었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은 자연히 남북의 세력이 대치하는 긴장 지역이 되었다. 발해 측에서 이러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남쪽의 신라에서는 일련의 방비책을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735년(성덕왕 34)에 대동강 이남의 영유를 확인한 뒤, 736년 관리의 파견, 748년(경덕왕 7) 14군현의 설치, 762년의 6성(城) 수축 등 8세기 중엽 대동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의 발해에 대한 신라 측의 일련의 경영과 방비가 행하여졌다.

신라 측의 이 지역에 대한 이러한 경영이 일단락되는 것은 8세기 후반(782)에 이르러 이곳에 민호(民戶)를 옮겨 이전의 군사적 조처와 함께 행정적 조처를 취하면서부터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훌륭한 문화를 형성하고 풍요를 구가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권을 둘러싼 다툼이 격화되고, 지방에서는 중앙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성장하면서 점차 동요되기 시작하여, 결국 후삼국의 출현을 맞게 되었다.

그 가운데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의지와 함께 북방 제민족의 침략을 저지하고 북방개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고려 태조의 이러한 의도에서 중시된 곳이 평양지방이었다.

태조는 당나라의 침략 이후 황폐화된 이 지역에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고, 922년(태조 5) 도성의 수축을 명하여 6년 만에 재성(在城)을 완성하고, 938년 나성(羅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평양[西京]에는 중앙과 거의 같은 관제와 시설을 설치하는 등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두었다. 그러나 고려 초기의 이러한 서경중시입장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묘청(妙淸)의 난 때문이었다.

묘청은 1135년(인종 13) 이곳에서 거병하여,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해 개경에서 파견된 김부식(金富軾) 등에게 패퇴하여 반란이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격하되고, 왕의 순주(巡駐)는 중지되었으며, 서경의 직제도 대폭 축소되는 등 큰 변혁을 겪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축조된 이 유역의 문화유적으로는 대동강변에 있는 부벽루(浮碧樓)가 있다.

그 뒤 고려에 이어 건국된 조선은 이곳에 관찰사를 두어 관할하게 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는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황해도 황주 남쪽 약 12㎞ 지점의 정방산(正方山) 위에 있는 정방산성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1627년(인조 5)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가 약 7,400m, 높이가 4.5m이다. 그리고 1811년(순조 11) 부근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발생함에 따라 대동강 유역은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부패한 세도정치와 붕당으로 소외된 서북인(西北人)에 대한 차별대우와 계속된 기근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홍경래의 난은 4개월간이나 지속될 정도로 그 규모와 저항이 완강하였다. 대동강 유역은 19세기 중엽에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당시 서구열강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조선에도 개항과 무역을 요구하였다.

특히, 1866년(고종 3)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Gene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교역을 요구하였는데, 평양의 관민이 이를 거절하자 양측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충돌 속에서 셔먼호가 불타버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1871년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의 북부지방 중심지로서, 수많은 학교가 세워지고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문학ㆍ예술에 나타난 모습

대동강은 일찍부터 문학의 소재로서, 또 문학적 발상의 계기로서 역대의 문학작품 가운데 두루 나타나고 있다. 문학의 원초적 형태라고 할 신화에서 이미 대동강은 그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는 아침에 인간 세상에 내려와 정사를 살피고, 저녁에 천궁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대동강 한가운데 조천석(朝天石)이 있는데, 해모수의 아들 동명왕이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부벽루 뒤편에 있는 기린굴(麒麟窟)로 들어가 땅 밑을 거쳐 조천석으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조천석은 대동강 가운데 있는 반석으로 기린마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영명사(永明寺) 자리에 신화적 영웅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 있었다는 설화도 있다. 대동강가에 있는 부벽루는 옛날부터 많은 시인묵객이 찾아와 음영(吟詠)을 남긴 곳이다. 고려 때 왕이 서경(지금의 평양)에 행차하면 대개 이곳에서 시회를 가졌다.

김황원(金黃元)이 부벽루에 올라가 고금의 제영(題詠)을 살펴보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스스로 고심 끝에 지은 것이 “긴 성 한쪽은 넘쳐 흐르는 물이요/큰 들 동쪽 끝은 점점 산이로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의 두 글귀뿐이었다. 천하의 절승 앞에서 시상이 막혀 더 이상 시구를 이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황원의 시는 미완성인 채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내려오고 있다.

1120년(예종 15) 8월 고려 예종은 서경에 순행하여 대동강가 영명사 남헌에서 군신들과 연음(燕飮)하면서 많은 시편을 지은 것이 악부에 전하였다. 정지상(鄭知常)은 평양 사람으로 일찍이 대동강에서 떠노는 오리를 두고, “뉘라서 붓을 잡아/‘새을’자 물 위에 그렸던고(何人把新筆乙字寫江波).”라고 읊은 바 있다.

또, 별리의 정을 읊은 시 「송인(送人)」은 널리 사람의 입에 올랐다. “비 그친 둑에 풀빛 새롭고/그대를 남포로 보내니 슬픈 노래 절로 이네/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다하리/이별의 눈물 해마다 강물에 더하네(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김부식도 부벽루에서 바라본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전략) 아득히 산봉우리 줄지어 늘어서고/성 아래 찬 강은 만만히 흐르도다/버들 우거진 저 집은 술 파는 집 아닌가/달밝은 이 밤 고기잡는 배는 어느 곳에 머무던고(후략) (雲邊列岫重重出 城下寒江漫漫流 柳暗誰家?酒店 月明何處釣魚舟).”

이색(李穡)도 시 「부벽루」에서 “어제 영명사 지나다/잠시 부벽루 올랐더니/옛 성은 비었는데 달만 한 조각/오래된 조천석엔 천추의 구름이라/기린마 한번 가고 돌아오지 않으니/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고/긴 휘파람에 돌층계 기대서니/산 푸르고 강 절로 흐르도다(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라고 읊었다.

이밖에도 김극기(金克己) · 조간(趙簡) · 권한공(權漢功) · 이숭인(李崇仁) · 정도전(鄭道傳) · 정포(鄭鋪) · 정몽주(鄭夢周) · 윤택(尹澤) · 권근(權近) · 진가유(陳嘉猷) · 장녕(張寧) · 장성(張珹) · 장근(張瑾) · 동월(董越) · 당고(唐皐) · 사도(史道) 등이 부벽루에 제영(題詠)한 가운데 대동강을 읊었다.

대동강을 제재로 한 한문 작품으로, 최자의 부(賦)가 있고, 정도전의 사(辭)가 있다. 한시로는 김인존(金仁存) · 김극기 · 김식(金湜) · 장녕 · 진가유 · 기순(祁順) · 고윤(高閏)의 시가 전한다.

여류의 한시로는, 김부용당(金芙蓉堂)의 「늦봄에 배 타고 패강을 내려가다(暮春舟下浿江)」 · 「연광정(練光亭)」 등이 대동강을 노래하였다.

평양 명기 국색(國色)은 “대동강에서 정든 임을 보내거니/실실이 늘어진 버들가지로도 임을 매어두지 못하네/서로 바라보는 눈에는 눈물이 글썽/애끊는 마음과 마음 하릴없어라/언덕에 서서 임 가는 곳 바라보니/아슬한 난간 밑 강물만 흐르네/여기 가까이 신선의 굴 있건만/하필 먼 바다 봉영 찾아갈 게 무언가(大同江上送情人 楊柳千絲未繫人 含淚眼看含淚眼 斷腸人對斷腸人 步上層厓欲盡頭 危欄千尺俯長流 此間自有神仙窟 何必蓬瀛海外求).”라고 읊었다.

평양 기생 황화(黃花)의 한시 「노 어사에게 드리다(贈盧御史)」는 “(전략) 대동강물이 다한들/이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寧使川原江水盡 此心終不負初盟).”라고, 임 향한 굳은 마음을 대동강물에 빗대어 노래하였다.

고려가요 「대동강」은 대동강을 황하(黃河), 영명령(永明嶺)을 숭산(嵩山)에 각각 비유하여 임금을 송축(頌祝)한 노래였다고 하나,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고려속요 「서경별곡(西京別曲)」 제2연에서 그 배경이 다음과 같이 대동강으로 설정되어 있다. “(전략) 대동강 아즐가 대동강 너븐디 몰라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배내여 아즐가 배내여 노한다 샤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중략)/대동강 아즐가 대동강 건넌편 고즐여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배타들면 아즐가 배타들면 것고리이다 나난/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서도잡가 가운데 「수심가」에, “(전략) 우수 경칩에/대동강 풀리드니/정든 임 말씀에/요내 속 풀리누나(후략)”, 「엮음수심가」에 “(전략) 임으로 하여 지는 눈물이/대동강 웃턱의/백은탄이 되리로다/(중략)/평양의 부벽루/연광정에 붙는 불은/어느 정관이 다 꺼주리란 말가(후략).” 등의 구절이 있다.

대동강을 노래하거나 소재로 삼은 시조로 윤유(尹遊)의 작품 2수, 그리고 이면승(李勉昇), 실명씨 2인, 기녀 구지(求之) 등의 작품이 각 1수씩 전하고 있다.

서도잡가 「배따라기」에도 대동강이 등장하고 있다. “파도소리는 천지를 뒤집는데/동서남북이 어디로 붙었으며/평양 대동강은/어디로 간단 말인가/(중략)/가마여울을 넘어/부벽루 모란봉 돌아들제/연광정 바라보니/비회심사 울울한대/팔다리는 늘어지고 (후략).”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들어 있는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대동강을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 홍생(洪生)의 부벽루에서의 환유(幻遊)를 다루고 있다. 대동강변 덕암(德巖) 위에 서 있는 연광정은 예로부터 시인묵객의 자취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고전소설에서는 흔히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장소로 설정되고 있다.

『옥단춘전(玉丹春傳)』은 평양감사로 있는 친구 김진희를 찾아갔던 이혈룡이 모멸과 핍박을 당하고 나서 크게 발분하여 대과급제, 암행어사가 되어 김진희를 응징하고 설치(雪恥)하는데, 그 계기적 사건은 연광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오유란전(烏有蘭傳)』도 연광정에서의 감사 연회가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춘풍전(李春風傳)』도 평양으로 장삿길을 떠난 이춘풍의 희비극을 그렸는데, 그에게 있어 대동강은 운명의 강이 되고 있다.

고전소설에서 평양은 매력있는 고장으로 등장하며, 이에 따라 대동강은 풍류객과 가인(佳人)과의 인연을 설정하는 매력있는 배경이 되고 있다. 평양 특유의 익살스러운 민담의 주인공 봉이 김선달의 많은 일화 가운데 「대동강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19세기 개화기에 들어와서도 대동강은 문학의 소재로 곧잘 등장하였다. 한국문학사에서 신소설의 장을 연 이인직(李人稙)은 『혈(血)의 누(淚)』에서 계기적 사건의 배경을 평양과 대동강으로 설정하고 있다.

현대 장편소설의 효시로 일컫는 이광수(李光洙)의 『무정(無情)』에, 순결을 의심받게 된 박영채가 대동강에 투신자살할 것을 염려하여 이형식이 평양으로 가서 수소문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사건 이후 두 주인공은 결정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다.

대동강이 본격적인 작품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김동인(金東仁)의 단편소설 『배따라기』로, 대동강 선창가 풍경이 작품 분위기를 이루는 가운데, 언제인지 풀 길 없는 한을 품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주인공)와 구성진 배따라기의 가락 등이 어울려 그윽한 정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유시의 효시로 알려진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는 대동강에서의 불놀이 풍경을 통하여 고뇌에 찬 젊은 날의 뜨거운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조중환(趙重桓)의 『장한몽(長恨夢)』은 일본 소설의 번안인데, 주인공 이수일과 심순애가 대동강변에서의 작별 장면은 사건전개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박계주(朴啓周)의 『순애보(殉愛譜)』에서도 계기적인 사건의 배경으로서 평양과 대동강이 설정되어 있다. 양주동(梁柱東)의 수필 『패강송(浿江頌)』은 대동강을 예찬한 미문(美文)이다. 대동강의 아름다운 자연은 고래로 재자가인의 사랑하는 곳이 되어, 그들의 낭만과 예술의 배경이 되어왔다.

자원과 이용
수자원

대동강의 내륙수운은 일찍부터 매우 발달하였다. 하구 부근은 익곡이 발달하여 수심이 깊고 유로경사가 완만한 데다가 조석의 영향이 매우 커서 송림까지는 4,000∼5,000t급, 하구에서 63㎞ 상류에 있는 보산포(保山浦)까지는 2,000t급, 평양까지는 30t급의 선박이 항행할 수 있다.

작은 배인 경우 하구에서 260㎞ 상류에 있는 덕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여 배가 다닐 수 있는 거리는 대동강 전장의 60%에 이른다. 연안에는 남포 · 송림 · 요포(瑤浦) · 보산포 · 평양 등 여러 하항들이 발달하였다.

근대 철도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내륙과의 물물교환이나 생산물의 수송은 거의 이 강의 수운을 이용하였다. 특히, 상류지역에서 벌목한 목재는 지금도 그 일부가 이 강을 따라 하류까지 운반된다. 평야를 관류하는 재령강은 수량이 연중 풍부하고 하류부는 조차가 6m 내외나 되어 항상 혼탁하나 수운과 관개에 크게 기여한다.

중류의 상해(上海)까지는 만조시를 이용하면 30t급 선박이 내왕할 수 있고 지류인 서강(西江)도 항행이 가능하여, 비록 소하천이나 쌀과 평야 주변에서 채굴된 철광석의 운반에 큰 구실을 한다. 이밖에도 주요 지류의 배가 다닐 수 있는 거리를 보면 남강이 119㎞, 비류강이 99.4㎞, 곤양천(崑陽川)이 20㎞이다.

북한에서 대동강을 종합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서해갑문을 비롯하여 미람, 봉화, 성천, 순천갑문 등이 건설되어 있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수상운수, 도시급수, 관개용수, 전기생산, 공업용수, 양어 등에 종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서해갑문 건설은 1961년 발표된 대동강 종합개발계획의 핵심사업이자 4대 자연개조사업의 우선과제로 1986년 완공되었다.

대동강 종합개발계획은 용수와 수운 및 전력개발을 통한 평남 · 황남 · 황북 지역의 경제발전 촉진에 목적을 두고 있으며, 이를 위해 첫째, 수운을 통해 대동강 상류지역의 순천 · 북항 · 덕천에서 생산되는 석탄, 광물자원, 시멘트 등을 평양근교의 공업지대 및 남포항으로 수성한다.

둘째, 남포 · 순천 · 재령에 이르는 공업지대와 농업지대를 하나의 대운하로 연결한다. 셋째, 평남 · 황남일대의 농업지역 및 서해안 간척지에 420㎞의 관개용 수로를 건설(1992년 완공. 본수로 417.9㎞, 지선 포함시 800㎞)한다.

넷째, 대동강 하구의 남포항과 송림항의 접안능력을 확장한다. 마지막으로 남포~황남 간 연결을 통해 해안 및 내륙교통의 발달을 도모한다는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관광자원

고조선 이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대동강 유역은 경승지와 고적들이 산재하여 좋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대동강의 굽이치는 물길 경관과 연안의 절경은 예로부터 무수한 시인묵객들의 찬탄을 받아왔다.

강동삼등(江東三登)이 완연한 연봉(連峰)이 수묵화병(水墨畵屛)처럼 둘러쳐져 있는 가운데 동북쪽에 고구려 평원왕의 안학궁유지를 대성산이 막고 있고, 바위틈에서 술이 흘러나온다는 주암(酒巖)을 기점으로 작은 산맥들이 강 양쪽을 활모양[弓形]으로 굽어 내려오다가 평양시 북편에 이르러 금수산(錦繡山)을 이루고 있다.

금수산의 정수는 대동강을 직접 굽어보는 모란봉(牡丹峰)과 을밀대(乙密臺)이다. 모란봉과 을밀대를 잇는 저변의 정삼각형 지역은 상록(常綠)의 기자림(箕子林)을 이루면서 이른바 향혼옥골(香魂玉骨)의 주인인 선연동(嬋娟洞)이 나타난다. 울창한 송림이 들어서 있는 기림리의 전설적인 기자묘(箕子墓) 바로 앞에는 정자각(丁字閣)과 중수기적비(重修記蹟碑)가 있다.

을밀대는 모란봉과 대치한 금수산에 있는 대(臺)의 이름이며,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불리는 정자가 세워져 있고, 이 사허정의 주영(柱楹)에는 청일전쟁 당시의 탄환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의주와 원산으로 가는 관문인 궁륭형(穹窿形)의 현무문(玄武門)을 지나면 을밀대와 마주하고 있는 모란대가 있고 그 위에는 최승대(最勝臺)라는 일비루(一飛樓)가 있다. 모란봉 기슭의 대동강안 사면으로 나서면 392년(광개토왕 2)에 창건한 명찰(名刹)인 영명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이 절에 팔가람(八伽藍: 중이 살며 도를 닦는 집)이 있었으며, 영명사의 승병이 왜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와 싸웠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거찰(巨刹)이었으나, 청일전쟁 때 병화(兵火)를 입어 가람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현존하는 유적은 그 중의 한 가람인 칠성암(七星庵)뿐이다.

영명사의 앞 대동강 절벽 위에 서 있는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고 하는 부벽루는 고려 예종이 서경을 순시할 때 대소신하를 거느리고 이곳에서 성연(盛宴)을 베풀면서 호종신(扈從臣) 이안옥(李顔玉)에게 명하여 부벽루라는 누각명을 지었다고 한다.

누각의 밑에는 푸른 강물이 넘실거리고, 저 건너로 상원 · 중화의 여러 구릉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경승지여서 예로부터 기성팔경(箕城八景)의 하나로 일컬어왔다. 또 대동강을 바로 옆에 끼고 청류벽(淸流壁)을 돌아 장경문(長慶門) 옛터를 지나면 관서 3대 명각의 하나인 연광정이 있다.

이 밖에도 평양6문(平壤六門)의 하나이기도 한 대동문(大同門)은 1406년(태종 6)에 건축한 것으로 서울로 향하는 관문이다. 대동강의 풍치를 덧붙여주는 것으로 크고 작은 하중도(河中島)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중 경관이 단연 빼어난 섬은 능라도이다.

능라도는 모란대 밑 부벽루 앞에 있다. 본래 이 섬은 성천군 관할 하에 있던 것인데 어느 해 홍수에 떠내려 와 현재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은 성천군에서 조세를 징수해갔는데, 광해군 때의 평양감사 박엽(朴燁)이 그 부당성을 제기하여 평양에 속하게 되었다 한다.

독발도(禿鉢島) 아래 있는 벽지도(碧只島)는 속칭 벼개섬이라 하여 임진왜란 · 정묘호란 · 병자호란 때 피난처가 되어 소도원(小桃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밖에도 대동강의 본류나 지류 유역에는 과거의 유물 · 유적지와 심산유곡, 울창한 삼림 및 명승사찰들이 어우러진 개발가능한 관광자원이 곳곳에 널려 있다.

기타

대동강 유역은 전형적인 2년 3작의 농업지역이다. 중 · 상류는 주로 밭농사 지역으로 옥수수 · 밀 · 콩 · 감자 등을 재배하나 순천분지 등 몇몇 분지나 곡저평야에서는 쌀농사도 활발하다. 중 · 하류의 평양평야와 재령평야 일대는 논 · 밭 혼합지역으로 쌀 · 보리 · 밀 · 옥수수 · 고구마 등을 재배한다.

특히, 비옥한 충적평야인 재령평야는 예로부터 양질의 쌀이 생산되어 조선 왕조의 진상미로 바쳐졌다. 이밖에도 산간지방에서는 목우(牧牛)와 양잠이 성행하며, 구릉지에서는 사과와 밤이 많이 생산되고, 담배와 면화도 평안남도 남부 내지 황해도 북부지방에서 널리 재배된다.

또한, 철 · 석탄을 비롯한 각종 지하자원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어 일찍부터 공업이 발달하였다. 지하자원 중 특히 무연탄은 북한 총매장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평안계에 묻혀 있는 무연탄은 중 · 상류의 덕천과 순천군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남도 북부탄전과 하류의 강동 · 대동 · 강서의 3개 군과 평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평안남도 남부탄전에서 대부분 생산된다. 이 지역의 무연탄은 북창화력발전소(140만㎾)와 평양화력발전소(40만㎾)의 연료와 가스 · 암모니아 · 카바이드 제조 등 공업원료 및 가정용으로 쓰인다.

철광은 점판암과 석회암 중에 교대광상(交代鑛床)으로 산출되는 갈철광(褐鐵鑛)이 중심인데, 재령강 주변의 재령철산과 송림 주변에 소규모 철산들이 있다. 중석은 곡산의 만년광산(萬年鑛山)이 매장량 3000만t으로 추정되는 대광산이며 기타 양덕광산도 있다.

금은 성흥 · 성천 · 수안 · 순안 등에서 채굴되는데, 이 중 성흥광산은 북한 최대의 광산이고 수안군의 홀동광산(笏洞鑛山)은 일찍부터 채굴해온 대광산이며 순안은 사금산지이다.

은은 삼덕 · 은산, 형석은 대동 · 중화 · 양덕 · 성천군의 물개(勿開), 인조석유의 원료가 되는 혈암은 평양시의 고방산(高坊山) · 감북 · 장산(長山), 고령토는 강서, 인회석(燐灰石)은 영유(永柔) · 덕천 등지가 산지이며, 석회석은 각지에 매장되어 있어 시멘트 · 카바이드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납 · 아연 · 수연(水鉛) · 석면 · 구리 등도 매장되어 있다.

이런 풍부한 지하자원과 대동강의 풍부한 용수와 편리한 내륙수운 등으로 해서 일찍부터 각종 공업이 발달하여 광복 전에는 한국 제2의 관서공업지역을 이루었다.

평양은 방적(紡績) · 생사 · 견직 · 양조 · 제분 · 제당 · 농기구 · 병기 · 도자기 · 고무 · 기계 · 차량 · 시멘트공업, 강선은 제철 · 제강, 기양은 트랙터, 대안은 전기기계 · 중기계, 송림은 제철 · 제강 · 비료, 남포는 제련 · 판유리 · 조선 · 통신기계, 승호는 시멘트공업이 발달하였다. 이밖에도 하구연안의 천일제염업과 임업을 들 수 있다.

대동강의 하구 주변은 조차(潮差)가 큰 데다 증발량과 일조시수가 높고 강수량이 적어 천일제염에 가장 적당한 곳이다. 남포 서쪽의 덕동(德洞) · 광량만(廣梁灣) · 귀성(貴城) 일대는 북한 최대의 염전지대로 북한 총염전의 70%를 차지한다.

대동강의 상류지역은 전국적인 임업지로 손꼽힌다. 수종은 소나무[赤松]가 많으며, 원목은 대동강을 이용한 뗏목이나 철도를 통하여 평양이나 기타 도시로 반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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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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