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

두만강변
두만강변
자연지리
지명/지명
백두산(白頭山, 2744m)의 동남쪽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석을수(石乙水)를 원류로 하여 마천령산맥 과 함경산맥에서 발원하는 대지류를 합해 동해로 흘러드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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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두만강은 백두산(2,744m)의 동남쪽 대연지봉(2,360m)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석을수를 원류로 하여 마천령산맥과 함경산맥에서 발원하는 대지류를 합해 동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총 길이는 521㎞로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길다. 유역 면적은 10,513㎢(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유역 면적을 합하면 41,242㎢)에 달한다. 한반도 최북단의 자연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선사 시대 이래로 한반도 문화 형성의 통로 역할을 했다. 고려 · 조선시대에는 여진족과 힘겨루기를 하던 곳이며, 일제강점기에는 학정을 피해 강을 건너 이주하던 곳이다.

정의
백두산(白頭山, 2744m)의 동남쪽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석을수(石乙水)를 원류로 하여 마천령산맥 과 함경산맥에서 발원하는 대지류를 합해 동해로 흘러드는 강.
개설

중국러시아와의 국경을 따라 흐른다. 길이 521㎞, 유역 면적 10,513㎢(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유역 면적을 합하면 41,242㎢).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로 긴 이 강은 백두산 동남쪽 대연지봉의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석을수를 원류로 하여 처음에는 동류한다. 그 다음 마천령산맥에서 발원하는 소홍단수(小紅湍水, 82.5㎞)를 합류, 북동류하면서 마천령산맥과 함경산맥에서 발원하는 서두수(西頭水, 173.1㎞) · 연면수(延面水, 80.0㎞) · 성천수(城川水, 76.3㎞) 등의 대지류들을 합류한다.

중류에 이르러서는 심한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하면서 보을천(甫乙川)과 회령천(會寧川)을 합한 후 본류는 북북동류한다. 함경북도의 최북단에 이르러 중국의 간도(間島) 방면에서 흘러오는 해란강(海蘭江)을 합류한 뒤 유로는 급전하여 남동류한다. 하류에서는 다시 간도 지방에서 남서류하는 혼춘강(琿春江)과 우리 나라 쪽의 오룡천(五龍川) · 아오지천(阿吾地川) 등의 지류를 합한 뒤, 수량과 하폭을 증대하면서 하구 부근의 호소(湖沼)지대(地帶)를 거쳐 서수라(西水羅) 부근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두만강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한청문감(漢淸文鑑)』 만주지명고(滿洲地名考)에서 언급하고는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두만강은 또, 고려강(高麗江) · 도문강(圖們江) · 토문강(土們江) · 통문강(統們江) · 도문강(徒門江)으로 표기된 바도 있다. 만주지명고에 의하면, 두만강이 새가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라는 뜻의 도문색금(圖們色禽)에서 색금을 뗀 도문이라는 여진어(女眞語) 자구(字句)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청문감』의 동문유해(同文類解)에서는 원나라 때 지방 관제에 만호(萬戶) · 천호(千戶)라는 관직명이 있었는데, 여진어로 만호를 두맨이라 발음하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두만강이라고 한다. 한편,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쓰여 있는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자구 속의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청나라측이 강변한 바가 있다.

두만강은 중국 ·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역사상 매우 중요한 강이었다. 고려시대까지는 여진족이 주로 살던 곳이어서 그들의 영향이 문화와 취락 경관에서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몰아내고 개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병영취락(兵營聚落)이나 개척취락들이 형성되었다.

함경도 지방에 기근이 들 때마다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이 강을 넘어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이들로 인하여 청나라와 국경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일제의 학정을 피하여 수많은 우리 민족들이 이 강을 건넜다. 이러한 민족의 역사를 안고 있는 두만강 유역은 비록 자연적 조건은 매우 불리하지만 거의 무진장으로 펼쳐진 미개척의 삼림자원과 지하자원이 있어 무한한 개발 가능의 잠재력을 가진 미래의 땅이다.

자연환경

지질은 상류에서는 신생대 제3기에 분출한 현무암 내지는 조면함(粗面岩)이 분포하고, 중상류는 화강편마암, 중하류는 화강편마암 위에 상부고생층과 제3계(第三系)가 순차적으로 퇴적되어 있으며, 하구 연안은 화강암지대이다. 상류의 현무암지대는 용암대지(熔岩臺地)로서 생성 연대가 오래되지 않아 지표수가 지하로 복류(伏流)하는 경우가 많다. 또 원시림이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개석(開析)의 정도가 낮고 하곡(河谷)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현무암의 풍화점토가 두꺼운 곳에서는 투수성(透水性)이 불량하여 곳곳에 습원(濕原)이 분포하기도 한다.

상류의 하계(河系)는 전반적으로 수지상하계망(樹支狀河系網)을 이룬다. 중류의 무산에서 회령까지는 특히 심한 감입곡류를 이루며 회령 · 종성 · 훈융(訓戎) 등에 소규모 평야가 발달하여 있다. 온성 이하의 하류는 경사가 완만하며 주운(舟運)이 가능하며, 유로의 변화가 심하여 하중도(河中島)가 수없이 형성, 소멸되고 있다. 하구 부근에는 상류에서 운반된 토사의 퇴적으로 인하여 삼각주충적평야가 발달하여 있고, 주변에는 습지성의 수많은 호소들이 형성되어 있다.

두만강 유역은 고위도에 위치하고 대륙에 인접하여 있는 데다가 동해상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습기가 함경산맥과 개마고원에 막혀서 겨울철에는 몹시 춥고, 여름철에는 서늘하며 강수량은 극히 적다. 1월 평균기온 -20℃ 내외, 최저기온 -34.1℃(1922.1.14., 함경북도 무산), 8월 평균기온 18∼20℃, 최고기온 40℃(1919.7.24., 함경북도 종성)를 이루며, 연평균기온은 4∼6℃이다. 우리 나라에서 최한랭지대를 이루며, 한서의 차가 매우 큰 전형적인 대륙성기후 지대이다. 연강수량은 500∼650㎜로 우리 나라 최과우지대(最寡雨地帶)를 이룬다. 특히, 작물의 생육 기간과 관련되는 무상기간(無霜期間)은 120∼180일이어서 경작에 매우 불리하다. · 보리 농사는 거의 불가능하고 감자 · 귀리 · 아마 등 특수작물을 많이 재배한다.

두만강의 중상류 지역은 한대침엽수림대의 원시림이 대수해(大樹海)를 이룬다. 밀림 속에는 이깔나무 · 분비나무 · 가문비나무 · 자작나무 등을 비롯하여 들쭉 · 머루 · 다래 등 산과실, 고사리 · 더덕 · 버섯 등 산채류, 산삼을 비롯한 약초 · 향료식품 등이 자생한다. 대체로 침엽수가 76%, 활엽수가 24%를 이룬다. 두만강에는 40여 종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다. 그 중 유명한 것으로는 연어 · 송어 · 황어 · 잉어 · 빙어 · 열목어 등이 있다. 토양은 주로 회백색의 포드졸(podzol)토양이 분포하나 하류 지방에는 반건조성 토양인 흑토가 국부적으로 분포한다.

역사와 문화유적

한반도 최북단의 자연 경계를 이루는 두만강은 선사 시대 이래로 한반도 문화 형성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구석기인의 생활 흔적이 조사, 보고된 곳은 두만강 연안의 동관진(潼關鎭)이었다. 그 뒤 1963년에 함경북도 화대 장덕리의 홍적세유적, 웅기 굴포리 서포항 조개더미유적 등이 보고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구석기 문화의 한 흐름은 두만강을 건너 최초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만강은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에도 역시 문화 유입 경로 구실을 하였다. 만주 및 연해주 지역의 신석기 · 청동기 문화가 두만강의 지류 및 내륙으로 확산되어 갔다. 신석기 유적으로 웅기 송평동(松坪洞) · 청호리(淸湖里) · 농포동(農圃洞) 등의 빗살무늬토기유적을 들 수 있다. 또 회령의 오동(五洞)을 비롯하여 나진 초도(草島) · 무산 호곡동(虎谷洞) 등에서 청동기시대 유물 및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이처럼 두만강 연안을 중심으로 신석기 · 청동기 문화는 흔히 동북 지역의 문화로 분류되며 종종 기타 지역의 문화와 그 특성을 달리한다.

역사 시대에 들어오면서 두만강은 부여 · 옥저 · 고구려 · 발해의 영역이 되었다. 발해 시대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源府)남해부(南海府)의 경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멸망 후에는 고려의 영향 아래 있던 여진인들이 이 강 언저리에 살았다. 그러나 대체로 조선 초기까지는 야인들의 할거지였다. 금나라 초기에는 영가(盈歌)가 여진인들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두만강의 하류 지역을 경략(經略)하였다.

금나라 말기에는 포선만노(浦鮮萬奴)가 하류 지역을 지배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합란부(哈蘭府) 수달로(水達路)의 땅이었다. 고려 말기 및 조선 초기의 적극적인 북방 경략으로 두만강 주변의 야인들이 통제를 받게 되었다. 세종대인 15세기 전반에 회령 · 종성 · 경흥 · 온성 · 경원 등의 진을 새로이 설치하였으며, 특히 이 지역은 조선 왕가의 발상지로서 중시되었다.

이에 대하여 명나라는 1403년(태종 5) 혼춘과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土門江)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여 여진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1412년에는 건주좌위를 토문강 지역에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건주위 · 건주좌위 · 건주우위는 건주여진의 핵심이었다. 그 밖에도 두만강 바깥에는 우량하(兀良哈) · 오도리(斡都里) 등의 야인들이 있어, 빈번하게 국경을 넘나들며 문제를 일으켰다.

16세기말에는 강 입구에 있는 녹둔도(鹿屯島)에 국경 수비를 위한 주둔군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이순신(李舜臣)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그의 부대가 이 둔전을 관할하면서 침입하여 온 여진을 격퇴하였다. 17세기 중기 이후 강 북쪽 100∼200리에 이르는 지대는 조선과 청나라의 완충지대로 설정되었다.

1644년(인조 22)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넘은 뒤, 자기 조상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도문강(圖門江) 이북 지역을 봉금지구(封禁地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농민들이 경작지를 찾아 이곳으로 다수 이주하게 되면서, 양국의 국경 분쟁을 불러 일으켰다. 1712년(숙종 38)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토문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19세기말에 이 토문강을 어느 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가 다투게 되었다. 한편, 1860년(철종 11) 러시아는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체결,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 700리의 땅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았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두만강 하류의 16.5㎞에 달하는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는 중 · 소와의 북방 전략 요새지인 녹둔도를 상실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조선 시대에 있어 북면의 야인 침입과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전초지로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처럼 유서 깊은 녹둔도를 우리 나라와는 사전 협의나 사후 통고도 없이 러시아가 영토화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 나라 조정에서는 뒤늦게 청나라를 통하여 이 섬의 반환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청나라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그 뒤 러시아의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1869년(고종 6)에서 1870년 두 해 동안에 관북 지방의 대흉작으로 인하여 월강이주민(越江移住民)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월강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였으나 계속 단속만 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자 단속을 완화하여 월강경작(越江耕作)을 공인하고, 두만강의 섬과 대안지방(對岸地方)에 대해서는 함경북도 지방관이 지권(地券)을 발급하고 토지대장을 만들어 수세(收稅)까지 하였다.

이로부터 약 10년 후인 1881년에 청나라가 길림성 지역을 개방하고 혼춘에 소간국(招墾局)을 설치하여 개간 가능 지대를 조사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이미 한인(韓人)이 정착, 영농하고 있음을 보고, 청나라의 관할지이므로 여기에서 생업하고 있는 자는 청국민으로 다스리겠다고 우리 조정에 통보하여 오자, 조정에서는 주민쇄환(住民刷還)을 고시하게 되었다. 강 연안의 주민들은 청나라가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오인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알고 있음에 경악하였으며, 조정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을 실제로 답사하였다. 또 종성 부사로 하여금 돈화현(敦化縣)에 조회하여 한 · 청 양국이 상호 파원(派員)하고 국경을 조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리하여 1885년에 감계담판(勘界談判)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백두산정계비를 기초로 하여, 비를 세운 직후에 경계를 표시한 석퇴(石堆) · 토돈(土敦) · 목책(木柵) 등을 살펴 토문강을 국경으로 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청나라는 토문 · 도문 · 두만강이 동일한 강임을 주장하고 도문강의 원류를 탐사하여 한계로 하자고 맞서 감계는 결렬되었다. 2년 후에 다시 재감에 임하였으나 정해감계(丁亥勘界)도 결렬되고 말았다.

한말에는 의병운동을 전개하던 애국지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청나라와 러시아에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들어가 조직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는가 하면, 학교 등을 설립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길(延吉) 등이 그 중심지이었다.

두만강 유역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으로서 강 유역에는 선사 시대 유적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지역은 무산 · 회령 · 웅기 등지이다. 무산 지역은 강 지류인 성천수가 합류되는 곳으로 무산 서쪽으로 넘나들기 힘든 관모봉(冠帽峯)이 가로놓여 있으므로 그 동쪽 기슭을 흐르는 성천수 하류의 계곡은 대륙의 북쪽 주민들이 동해로 나가는 첫 번째 관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 신석기 주민들이 남겨놓은 유물들이 적지 않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강 연안의 두루봉 바로 밑의 서남쪽 경사면 일대는 신석기시대 말부터 철기시대 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회령지대의 계곡은 보을천 · 회령천 · 팔을천(八乙川) 등의 지류가 두만강과 합류되는 곳으로, 두만강 유역 일대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다. 회령벌 동쪽 기슭을 흐르는 회령천은 대륙쪽에서 동해로 향하는 두 번째 통로로, 여기에도 일찍부터 청동기인들이 모여 산 곳으로 보인다.

이들 청동기인들의 주거지는 회령벌 동쪽 기슭의 오동과 회령벌 서쪽 기슭에 놓인 유선동 검은개봉에서 발견된다. 검은개봉은 강변의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3면이 매우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다만 동남쪽만이 연대봉(煙臺峯)에 접하여 말안장 모양의 고개마루를 이루고 있는데 검은개봉 밑의 구릉지대에서 청동기시대의 토기조각들이 단편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두만강 하구의 서번개와 동번개로 불리는 늪의 서남쪽에 서포강(西浦江)이 있는데, 두만강과 늪 사이는 높이 300m 미만의 야산들이 가로막혀 있다. 이 야산 서남쪽 끝에서도 원시유적 등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하구에서 서남쪽 약 25㎞ 지점에는 웅기읍의 용수호(龍水湖)가에 송평동이 있다. 용수호 동서안에 평평한 모래언덕과 그 경사면 일대에서 유적이 발견되며, 나진동(羅津洞) 동쪽에 돌출한 반도의 남쪽 해변가 모래언덕, 청진벌 서남쪽 농포리, 수성천(輸城川) 하구의 원수대(元帥臺) 등에서도 무수한 유물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강 유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원시 시대 유물 유적은 회령을 중심으로 한 반경 5㎞내의 지역으로 운연(雲淵) · 성동(城洞) · 남산(南山) · 봉의(鳳儀) · 검은개봉 · 영수(永綏) · 요동(料洞) · 대덕(大德) · 장무(奬武) · 김생(金生) · 사을(沙乙) · 궁심(弓心) · 한성(汗城) · 개척동(開拓洞) 등이 있다. 오늘날 회령 시내에도 원시 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으며, 오동유적을 비롯하여 회령읍성 동문(東門) 안과 오산 기슭에도 유물포함층이 있고 성내 중심 언덕에도 있다.

오동유적은 그 중 가장 중심을 이루는 중요 유적으로서 그 범위도 수 만㎡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이 유적은 포함층도 두껍고 원시층 상부에는 고대 및 중세기의 문화층이 있다. 이 유적은 일찍이 회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충적단구인데, 현재는 하상(河床)이 낮아져서 강이 바로 이 단구의 기슭을 흐르고 있다고 한다. 강의 잦은 범람으로 유적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일찍이 유실당하였으며 문화층이 잘린 단층이 보일 정도라고 한다. 북한측은 1949년 나진 초도의 원시 유적 발굴과 1954년 오동유적 발굴에 착수하는 등 많은 발굴 작업을 벌인 바 있다고 한다.

두만강 유역 일대는 수많은 성지(城址)가 있는데, 이는 예로부터 이 지역이 우리 나라 동북방면의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두만강 유역 일대의 고성곽지(古城廓址)를 살펴 보면 무산군의 삼봉평(三峯坪)이라는 곳에 말간고성지(末干古城址)가 있는데, 이는 무산진(茂山鎭)이 옮겨 오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여진족의 노토반호말간(老土蕃胡末干)의 할거지로 추정된다. 이곳에 연대상으로 이보다 훨씬 앞서는 토기 · 석기류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선사 주민의 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산군 서하면 임강동(臨江洞)에는 임강대고지(臨江臺古址)가 있는데, 우측 둘레가 600여m로 흔적만이 겨우 남아 있으며 부근에는 폐지(廢址)가 있고 기왓장이 산재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여진 시대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서하면 흥암강구(興巖江口)에서 하류로 얼마쯤 가면 만주 쪽에 소조곡고성지(小鳥曲古城址)가 있으며, 흥암동 뒷 구릉에는 약 1,500여 개의 석루(石壘)가 있다. 이는 한말의 국경수비대가 주둔해 있던 병영지이다.

무산군 영북면 양영동에는 양영진지(梁永鎭址)가 있다. 이곳은 한때 여진족의 선가(先加)마을이었던 것을 1674년(현종 15)에 회령군의 양영만동보(梁永萬洞堡)를 이곳에 옮겨 양영보라고 하고 권관(權管) 1인, 사병 14인, 봉군(烽軍) 2인, 보인 50인을 두고 있다가, 숙종 때 무산부에 귀속하게 한 진(鎭)이다.

풍계면 명신동에는 풍산진지(豐山鎭址)가 있다. 이곳은 여진의 도곤(都昆) 마을이었던 것을 1674년에 회령군 구진전동 폐보(廢堡)를 이곳에 옮기고 만호 1인, 사병 59인, 봉군 20인, 보인 110인을 두었다. 이곳은 1684년에 무산부에 소속되었고, 1729년(영조 5)에 만호 김우서(金禹瑞)가 처음 석성(石城)을 축조하였다. 남문 밖에 축성비가 일제 강점 때까지 남아 있었는데, 비면의 작은 글씨는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豐山堡築城碑(풍산보축성비)’라는 글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회령군 내에는 회령읍 오산(鰲山)의 북팔을천(北八乙川) 건너 높은 구릉이 있는데, 이곳을 유선덕(柳先德)이라 한다. 유선덕 서북쪽 기슭에는 석성지가 있다. 이는 월강을 막기 위한 파수막으로 번병(番兵)의 소창(小倉)을 두었던 곳이다. 1441년(세종 23) 김종서(金宗瑞)가 축성한 행성지(行城址)는 연대(煙臺)로부터 두만강 우안에 뻗어 있는 성터로 이곳을 경계로 하여 성 밖에 반호(蕃胡)의 거주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보을하천 근처에는 오국성지(五國城址)가 있는데, 유선동에서 약 10리 서북쪽에 위치하며 축조 연대는 미상이나 성 둘레는 약 4㎞에 달하고 높이는 3∼4m 정도이다. 이 성지는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축성물이라고도 하며 금나라의 오국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성안에는 건물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 있다. 이곳 중앙부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옆에 운연(雲淵)이라고 새긴 비가 서 있으며, 이는 송나라 휘종(徽宗)의 글씨라 전하여지고 있다. 성 가운데에는 기와 · 석기 · 토기류의 파편이 출토되고 있다.

오국성지의 북방 강안에는 포항폐진지(浦項廢鎭址)가 있는데 오국성지는 남쪽에, 북쪽에는 애친각라씨(愛親覺羅氏)의 발상지라고 하는 한성현(漢城峴)이 있다. 한성현은 한성치(汗城峙) 또는 한왕습사대(汗王習射臺)라고 칭한다. 이곳은 유선동포항(浦項)의 대안 간도 땅에 있는 애친각라씨의 발상지이며 한왕의 병마를 기르던 곳이라고 전한다. 산상에는 옛 성터가 남아 있다. 봉의면 파전에는 폐진지가 있는데 이는 볼하포진성지(乶下浦鎭城址)라고 한다. 팔을면(八乙面) 기덕산(基德山) 위에는 둘레가 130여m나 되는 옛 성터가 있는데 여진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성군 동관면에 동건산성지(童巾山城址)가 있는데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 둘레 190m, 높이 1m, 절벽 340m가 되는데, 동건이 이 돌에 ‘태정5년방구7년운운(泰定五年防寇七年云云)’이라 함으로써 산성 이름을 동건산성이라 하였다고 한다. 여진어로 종(鍾)을 홀독한(忽禿罕)이라 하는데 동건이라는 음은 홀독한의 와전어가 아닌가 보고 있다.

종성 읍내에는 수항루(受降樓)라는 누각이 있다. 누각 서쪽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종성의 금산(金山)이 높이 솟아 있다. 수항루는 두만강을 건너 침입하여 오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로 알려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뇌천각(雷天閣)이라고 부르다가 1608년(선조 41) 침입한 여진족을 격멸하고 이곳에서 항복을 받았다고 하여 수항루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건물은 보기드문 현존 목조 3층 다락 건물이다.

남산면에는 방탄진지(防坦鎭址)가 있는데 선조 때에 만호 이맹(李孟)이 축조한 것으로, 둘레 700여m, 높이 3m에 병사 196인이 있었다고 한다. 고읍면에는 고읍성지가 있는데 이는 영북진지(寧北鎭址)로 구여진(舊女眞) 백안(伯顔)이 옛 성을 수축한 것이다. 본래는 토성이던 것을 1634년(인조 12)에 도병마사 신여철(申汝哲)이 개축하고 성안에 연못 둘을 파고 앞면의 토축을 석축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주위는 25㎞, 높이 8m에 우물이 다섯 개 있다.

온성군 온성면 주원동에 토축이 있는데 주원폐보(周原廢堡)로서 주위가 150여m이다. 남양면 풍서동(豐西洞)에는 1484년(성종 15)에 축성한 유원진지(柔原鎭址)가 있는데 석성 둘레는 약 10여㎞에 높이는 3m이다. 영충면 영달동에는 1442년에 설치한 영달진지가 있는데, 1662년의 구보(舊堡)로서 이곳에 옮겨 영건보(永建堡)로 고쳤다가 그 뒤에 다시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고 한다. 석성 주위는 12㎞, 높이 2.5m로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던 곳으로 폐성되었으며 문지(門址)만 남아 있다.

미포면에는 황파진지(黃坡鎭址)가 있는데 석성 둘레는 5㎞, 높이 3m로 1523년(중종 18)에 축성하였는데 한말에는 국경 수비대의 진영이었다. 훈융면에는 훈융진지가 있는데 1464년(세조 10)에 김종서가 축성한 토성(土城)으로 숙종 때에 돌로써 성을 다시 쌓았다. 또한 여기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두고 병사 258인을 주둔시켰다고 하는데 성의 둘레는 10여㎞라고 한다.

경원군 경원면 봉운동에 진과 보의 흔적이 있는데 일명 야랑성지(也郎城址)라고도 한다. 토축으로 둘레는 약 2㎞, 높이는 1.2m이었다고 한다. 또한, 봉운동에는 후훈봉수대지(厚訓烽燧臺址)가 있다. 경원면에는 고현성지(古縣城址)가 있으며, 강 가운데 동도(東島)의 대안인 혼춘에 있는 고려 토성이 그 옛날 실관성지(實關城址)로 추정되고 있다.

안농면 안원동에는 안원보지가 있는데 석성으로 둘레 약 9㎞, 높이 약 2.5m였다. 병사가 212인으로 용당(龍黨)과 유다도(柳多島)에 파견하여 대안을 경계하도록 하다가 1864년에 폐지하였다. 아산면 백안동에는 고아산진지(古阿山鎭址)가 있는데 석축의 둘레가 약 10㎞, 높이 2m이던 것을 1480년(성종 11)에 혁파하여 아산보에 옮겼다. 고아오지보지(古阿吾地堡址)는 아산면 백안동 강안에 있던 토성인데 1488년에 경흥군 아오지로 옮겼다.

경흥군 아오지읍 용성동에는 판성동고산성(板城洞古山城)이 있었는데 석축성지가 남아 있다. 노서면 녹둔도에 녹둔도보가 있었는데, 녹둔도의 옛 이름은 사차마도(沙次麻島)라고 하였으며, 두만강 하류의 흐름이 변함으로써 섬 모습을 잃어버리고 육지화되었다.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하여 부당하게 러시아의 영토가 되고 말았다. 녹둔도보에 토성이 있었고, 목책과 병선(兵船)을 설치하여 조산만호가 관할하였다. 조산 인근에는 두리산봉수대지(豆里山烽燧臺址)와 조산남봉봉수지(造山南峯烽燧址) 등이 있었다. 1519년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이 주청하여 고무산성(古茂山城)을 폐하고 무산으로 보를 옮겨 놓았다. 이 밖에도 적지 않은 보 · 진지 · 봉수대지가 분포되어 있다.

문학예술에 나타난 모습

함경도는 일찍이 조선 초기에 육진(六鎭)을 쌓고 우리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의지를 보인 적이 있기도 하였으나,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고 두만강(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과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확정지음으로써 우리 땅으로 병합되기까지는 대체로 여진족들의 거주지이자 그들의 활동 무대였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실록 같은 사료 속에는 두만강에 대한 상당한 기사가 있다. 우리의 고전문학 속에서는 조선조의 창업을 기린 「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의 성장지인 영흥 · 함흥 · 경흥 등지가 그와 그의 선조들이 행한 이적의 배경이나 활동 무대로 등장하면서 두만강이 문학 속에 표출되기 시작한다.

“우리 시조(始祖)가 경흥에 사ᄅᆞ샤 왕업(王業)을 여르시니”(제3장), “적도(赤島)안해 움흘 지금(至今)에 보ᅀᆞᆸ느니 왕업간난(王業艱難)이 이러ᄒᆞ시니”(제5장) 등의 내용이 「용비어천가」에 보이는데, 여기서 경흥과 적도는 두만강 유역의 사적지로 조선조 발흥의 성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노래 불려진다.

두만강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민요로는 「 애원성(哀怨聲)」을 들 수 있다. 함경도의 북청을 비롯하여 혜산 · 갑산 · 무산 · 삼수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불렸던 이 민요는 남편을 두만강 건너로 떠나 보낸 여자가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내용이며 모두 42편이 전하고 있다.

이후 두만강이 문학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개항 이후 근대문학에 와서 본격화된다. 그것은 최서해(崔曙海) · 김동환(金東煥) · 김기림(金起林) · 한설야(韓雪野) · 이용악(李庸岳) 그리고 한국 영화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나운규(羅雲奎) 등 동북 지방 출신의 시인 · 작가들의 왕성한 작품 활동 속에서 식민지의 시대적 의미와 더불어 표상된다. 일찍이 그들이 태를 묻었던 어두운 시대 동토(凍土)의 북원(北原)을 노래하며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 문인들의 눈에는 두만강이 오히려 근대의 민족적 수난기에 서사시의 처연한 무대로 혹은 고국 땅의 마지막 문턱의 의미로 상징화된다.

“눈이 몹시 퍼붓는 어느 해 겨울이었다/눈보라에 우는 당나귀를 이끌고 두만강(豆滿江) 녘까지 오니/강(江)물은 얼고 그 위에 흰눈이 석자나 쌓여 있었다/인적(人跡)은 없고 해는 지고/나는 몇 번이고 돌아서려 망설이다가/대담하게 어름장 깔린 강물 위를 건넜다/올 때 보니/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들 손에/넓다란 신작로(新作路)가 만들어 놓였다/지난날 건너던 내외곡 길 위에다”(김동환의 先驅者).

1920∼1930년대 일제 식민지의 앞잡이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그 주구들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고향과 조국을 등진 유랑의 무리들은 북극에 장치된 거대한 자석에나 끌리듯 두만강을 넘어 물 설고 낯선 오랑캐 땅 북간도(北間島)로 흩어져 들어갔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남부여대(男負女戴)한 가련한 군상들은 앞서 간 무리들이 남기고 간 설원의 발자취 따라 끝 모르는 이역의 하늘 저 너머로 무작정 사라져가곤 하였다.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눈 속에 파묻힌 하얀 북조선(北朝鮮)이 보이느니/……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부득이 만류(挽留)도 못하느니/……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김동환의 눈이 내리느니),

“전선(電線)이 운다 잉잉하고/국교(國交)하라가는 전신 줄이 몹시도 운다/집도 백양(白楊)도 산곡(山谷)도 오양간 당나귀도 따라서 운다/이렇게 춥길래 오늘 따라 간도이사꾼도 별로 없지/어름짱 깔린 강(江)바닥을/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안 보이지/회령서는 벌써 마지막 차(車)고동이 텄는데”(김동환의 國境의 밤).

눈 · 눈보라 · 설원 · 추위 · 당나귀의 울음 · 간도이사꾼 등은 두만강이라는 공간과 밀착된 20세기 전반의 비극적 정황을 이루어 특정한 시대의 상징적 의미마저 내포한다. 이제 두만강은 임 찾아 헤매이는 애상적이고도 개인적인 감상에서가 아니라 민족적 수난이라는 보다 대아적 차원에서 인식하게 된다.

“동해의 마지막 항구를 떠나 북으로! 밤을 새우고 날을 지나니 바다는 더욱 푸르다. 하늘은 차고 수평선은 멀고, 뱃전을 물어 뜯는 파도의 흰 이빨을 차면서 배는 비장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마스트 위에 깃발이 높이 날리고 연기가 찬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 날린다. 두만강 넓은 하구를 건너 국경선을 넘어서니 노령(露領) 연해의 연봉이 바라보인다. ……하얗게 눈을 쓰고 북극 석양에 우뚝우뚝 빛나는 금자색 연봉이 저물어 가는 갑판 위는 고요하다.”(李孝石의 露領近海).

노령근해」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국제 여객선의 석탄고 속에 숨어 러시아로 탈출하는 젊은 항일 투사의 고초를 그린 이효석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여객선의 항로는 우리 나라의 최북단 항구인 웅기에서 서수라를 거쳐 두만강 어귀를 지나 노령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이며, 그곳에 이르는 긴장되고도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두만강은 의지가지없는 실향민들의 피눈물로 얼룩진 한 많은 강이다. 또한 두만강은 때로는 항일 투사들이 선혈을 뿌린 활동 무대로 그것이 역사적 현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배경으로 승화됨으로써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나는 죄인처럼 숙으리고/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그러나/나는 안다/다른 한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바다로 가야할 곳으로 흘러 내리고 있음을./.……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오늘밤도/너의 가슴을 밟는 듯 슬픔이 목마르고/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기리 마음의 눈을 덮어 줄/검은 날개는 없나냐/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조 앉은/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이용악의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풀폭을 수목(樹木)을 땅을/바윗덩이를 물으녹이는 열기가 쏘다저도/오즉 네만 냉정한 듯 차게 흘으는/강(江)아/천치(天痴)의 강아/……너를 건너/키 넘는 풀속을 들쥐처럼 기여/다른 국경을 넘고저 숨어 다니는 무리/맥풀린 백성의 사투리의 향려(鄕閭)를 아는가/더욱 돌아오는 실망을 묘표(墓標)를 걸머진듯한 이 실망을 아느냐/강안(江岸)에 무수한 해골이 딩굴러도/해마다 계절마다 더해도/오즉 너의 꿈만 아름다운 듯 고집하는/강아/천치(天痴)의 강아”(이용악의 天痴의 江아).

두만강은 조국을 잃은 젊은이들의 달랠 길 없는 회한과 분노와 절망과 굴욕과 원망으로 표상된다. 민족의 설음과 처절한 역사적 비극이 펼쳐져도 말없이 흐르는 두만강은 그 모두를 낱낱이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기를 간청받기도 한다. 너무나 억울하면서도 하소연할 길 없는 민족의 비원은 무력한 자아의식과 더불어 자탄과 자기 학대의 울부짖음으로 변하여 비극적 정황은 극대화된다.

이 같은 상황은 일제강점 이후 광복까지 한반도 전역을 짓눌렀던 역사적 현실일 뿐더러 그 기간에 형상화된 문학작품의 보편적이고도 일반화된 문학적 현실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 두만강이 민족 문학의 장으로 한국 문학사에서 거론되는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국경의 밤」은 김동환이 지은 한국 최초의 현대 장편 서사시로 1925년에 출간되었다.

전편 72절에 이르는 작품으로 27절까지가 제1부, 28절에서 50절까지가 제2부, 그리고 마지막인 72절까지가 제3부로 도합 3부로 구성된 긴 서사시이다. 작품의 무대는 두만강 유역인 국경 지방이며 때는 눈이 내리고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운 겨울이다. 이 시의 정서적 배경은 밀수꾼과 간도로 이민 가는 이사꾼들이 느끼는 참담함과 불안과 깊이 관계된다.

주인공인 청년은 타향에서의 오랜 유랑 끝에, 여진족의 후예이며 이미 밀수꾼의 아내가 된 순이를 찾아 옛 고장에 돌아온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 소꼽친구였고 그리고 철이 든 다음 서로가 좋아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재가승(在家僧)인 여진족의 후예는 동족 이외에는 시집갈 수 없다는 엄한 계율과 인습에 따라 두 사람의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청년은 남의 아내가 된 지난날의 애인을 찾아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리고 문 열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사랑이나 정보다 사회를 지배하는 엄한 계율에 매여 그녀는 청년의 간청을 거절한다. 청년은 지난날의 사랑에 의지하여 하소조로 노래 부르고 그녀는 이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대사가 중심이 되어 극적 구성을 이룬다. 서사시의 종막은 두 사람 앞에 밀수를 간 남편이 시체로 나타나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고국」은 최서해의 작품으로 1925년에 출간된 단편집 『혈흔(血痕)』에 수록된 단편소설이다. 3 · 1운동이 일어난 해 봄, 큰 뜻을 품은 주인공 김운심은 고향을 떠나 만주로 건너간다. 서간도를 무대로 때로는 독립 단원으로 혹은 사설 교원으로 유랑하지만 제대로 뜻 하나 이루지 못하고 5년 만에 두만강을 넘어 향리인 회령땅으로 돌아온다. 거지 신세가 된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뿐더러 의지할 데조차 없어 호구지책으로 귀향한 다음날 도배장이 간판을 내건다는, 다소 자조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삼인칭 소설이다.

「향수(鄕愁)」 또한 최서해작으로 『혈흔』에 수록된 그의 초기 단편소설이다. 일인칭인 나에 의하여 회상조로 서술되는 주인공 김우영은 노동으로는 도저히 처자와 노모를 부양할 수 없게 된다. 궁지에 달한 그는 할 수 없이 새 일터를 찾아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을 유랑하나 자기 입 풀칠하기조차 바빠 고향집에는 한푼도 보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지긋지긋한 5년간의 이역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에 다시 돌아오나 차마 향리로는 되돌아 갈 수가 없어 고향에서 멀지 않은 두만강 어귀의 웅기에 정착한다. 끝내 가족이 유행 독감으로 몰살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그는 다시 조국을 떠난다.

「고국」과 「향수」 두 작품은 최서해의 초기 작품들로 자전적 요소를 많이 띠는 ‘빈궁문학’에 속하며, 주로 두만강변을 무대로 하는 이야기들이다. 작품으로서 미흡한 점이 많으나 그의 문제작 「 탈출기(脫出記)」 · 「 홍염(紅焰)」 · 「 박돌(朴乭)의 죽엄」 · 「 기아(饑餓)와 살육(殺戮)」 등과의 연관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북간도(北間島)」는 1958년 최초로 게재되기 시작하여 1967년에 비로소 완결을 본 안수길(安壽吉)장편소설이다. 한말 종성부(鐘城府)에 거주하던 이한복이 두만강의 하중도에서 개간을 하다가 후에 북간도의 용정 비봉촌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그의 후손들이 동포들과 더불어 동북아시아의 숨가쁜 격동기를 겪고 감격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의 눈물겨운 북간도 개간사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는 한민족이민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 이외에 20세기 전반기까지 북간도를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면에서도 그 의미는 크다.

두만강을 소재로 한 영화로 대표적인 것은 「두만강을 건너서」이다. 이는 1928년 나운규프로덕션이 제작한 나운규의 초기 문제작 중 하나이다. 나운규 · 이금룡 · 윤봉춘 · 주삼손 · 전옥 · 이경선 등이 출연하였다. 두만강 유역의 회령과 간도, 용정(龍井)에까지 직접 로케를 한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이다.

풍운이 휘몰아치는 한말, 구한국군의 나팔수로 근무하던 주인공(이금룡분)은 일제에 의하여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뒤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유랑의 길을 떠난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에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식구를 잃고 다시 잃어버린 조국을 찾으려고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는 독립군의 나팔수가 된다. 이 늙은 나팔수는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나팔을 입에 댄다. 옛날 화려하였던 시절에 한국군의 사기를 고무하던 일, 만주 땅에서 독립군의 일원으로 나팔을 불던 일을 회상하면서, 나팔 소리가 비장하게 만주의 하늘에 퍼지고, 자기의 유해를 고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며 나팔수는 눈을 감는다.

나운규는 이 작품에서 민족적 수난을 영상화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왜인들의 가혹한 검열로 상당한 부분이 삭제되고 제목조차 「사랑을 찾아서」로 개명된 후에야 상영이 허락되었다. 대중가요로는 「 눈물젖은 두만강」을 들 수 있다. 원산 출신인 김정구(金貞九)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곡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언제나 오려나.”이 가요는 임의 의미에 따라 다소 애상적이기도 하나 일제의 강압에 의한 대민족적 엑소더스라는 시대적 정황과 합치되어, 서민의 애환을 노래 불렀기에 그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맥맥히 흘러오고 있다.

자원과 이용

두만강은 유역 면적이 넓으나 유량이 많지 않고 급류가 많아서 수운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가항 구간은 85㎞로서 압록강의 698㎞, 한강의 330㎞, 낙동강의 344㎞에 비하면 아주 짧다. 100t 정도의 선박은 겨우 경택(慶澤)까지 소항할 수 있다. 전체 유역을 통해서 지세가 험하고 기후가 한랭하기 때문에 개발이 뒤떨어졌던 것도 수운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이다.

매년 8, 9월에는 홍수가 발생하고, 11월 하순부터 3월 상순까지는 강이 얼어붙는다. 대체로 무산에서 회령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뗏목이 많이 이용된다. 두만강 유역의 포장 수력량은 매우 크지만 현재는 부령에 2만 9000㎾, 서두수에 40만㎾ 용량의 수력 발전소가 건설되어 있다.

두만강 상류 지방은 기암과 심연(深淵), 울창한 대삼림이 우거져 있어 그 경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특히 상류의 삼림자원은 뗏목으로 만들어 강을 따라 대이동하는 경관과 어우러지면 장관을 이룬다. 또한, 곳곳에 성지와 전적비 등이 산재하여 역사교육의 장이 된다. 국경 지대이어서 활발한 관광이 이루어지지는 않으나 천연의 경승지와 역사의 고적지로 잠재력이 크다.

두만강 상류의 용암대지 지역이나 함경산맥 일대에는 냉대침엽수의 원시림이 대수해를 이루고 있어 입목 축적량은 북한 전체량의 17.4%에 이른다. 수종은 낙엽송 · 가문비나무 · 사시나무 등 침엽수가 76%, 자작나무 · 황철나무 · 분비나무 등 활엽수가 24%이다. 원목은 철도나 뗏목으로 수송된다. 특히, 무산은 목재의 대집산지이다.

두만강 유역은 우리 나라에서 주요한 철과 갈탄 매장 지역이다. 철은 무산이 중심지인데, 비록 철 함유량이 37%인 빈광이지만 매장량은 약 11억t에 이르러 우리 나라 최대의 철산지를 이룬다. 중류의 회령에서 하류의 아오지에 이르는 지역은 함경북도 북부탄전지대로서 전국 총 유연탄(갈탄) 매장량의 약 60%를 차지한다. 주요 탄전으로는 아오지 · 고건원(古乾源)의 2대 특급 탄전과 하면(下面) · 훈융 · 학보(鶴甫) · 궁심 · 신유선(新遊仙) 등의 대탄전들이 있다. 이들 자원을 이용하여 무산에는 제철 · 제지 공업, 아오지에는 석탄액화 · 질소비료 · 기초화학공업 등이 각각 발달하였다.

두만강 유역은 생육 기간이 짧은 고랭지이기 때문에 1년 1작밖에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농작물은 극조생(極早生) · 내한종(耐寒種)인 감자 · 아마 · 호프(hop)를 주로 재배한다. 중 · 하류 유역에는 넓은 초지가 발달하여 · 면양 등의 방목이 성하다. 특히, 대규모의 목장으로는 삼지연목장(三池淵牧場)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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