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구는 일제강점기 「총각진정서」, 「왕서방 연서」,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을 부른 가수이다. 가수인 형 김용환과 함께 1935년 동경의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발표한 박시춘 작곡의 「왕서방 연서」가 히트했다. 동경의 영친왕 저택에서 열린 조선악극단 공연에서 김정구가 부른 「낙화삼천」을 듣고 영친왕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있다. 그가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은 1982년 MBC에서 실시한 전국 연령층별 가요 기호 조사에서 1위를 했다. 1980년 가요 가수로는 처음으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35년 가요계의 명물인 그의 형 김용환과, 동경의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고향에 와 있던 그의 누나 김안나와, 피아노 전공의 동생인 음악가족 4남매가 그해 여름 성경학교에 특별 게스트로 금강산 입구에 있는 온정리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들의 노래를 들은 김소동(金蘇東) 후일 한양대학교 영화이론 교수의 권고로 김정구는 서울에 와서 창립한 지 얼마 안 되는 뉴코리아 레코드사에서 데뷔곡을 최선(崔仙)이라는 여가수와 듀엣으로 「삼번통 아가씨」라는 노래를 취입했다. 이는 1936년 4월 신보로 발매되었다.
6월 신보로 「모던 종로」 · 「어머님 품으로」, 계속해서 「청춘랑데뷰」, 8월에는 「인생의 봄」 · 「처녀 시절」, 그리고 9월 신보로 「야루강 타령」을 내놓았다. 김정구의 창법은 그의 형 김용환과 비슷하다고 해서 별로 인기를 집중시키지 못했다.
그는 다시 고향 원산으로 내려가 있었다. 1937년 2월 오케레코드 중역 김성흠(金成欽)의 추천으로 박시춘 작곡 「항구의 선술집」을 발표했다. 1938년 2월 신보로 발표한 만요같은 노래 박시춘 작곡의 「왕서방 연서」가 의외로 히트했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시절 평소 뉴코리아레코드 시절부터 알고 있던 신인 작곡가 이시우(李時雨)의 곡인 「눈물 젖은 두만강」을 오케레코드 신보로 출반했다. 계속해서 「앵화폭풍」, 손목인 작곡인 「바다의 교향시」가 히트하기 시작했다.
1938년 만요 「총각진정서」 등을 내놓았다. 김정구는 무대에서 만요 가수로 인기절정이었다. 1939년 이후 조선악극단이 일본 공연할 때 무대 인기는 김정구가 최고였다.
동경 아카사카[赤阪]에 있는 영친왕의 저택에 초대되어 조선악극단이 공연했었다. 이 때 김정구가 노래부른 「낙화삼천」의 노래를 듣고 영친왕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1944년 형 김용환은 전시체제에 걸맞는 악극단 이동연예대를 조직했다. 이름하여 태평양연예대였다. 이 때 김정구도 형을 도와 입단했다. 이 단체에는 이후 코메디언 구봉서도 단원으로 참여했다.
해방이 되자 김용환은 연쇄극 「아리랑」을 공연, 전국순회로 흥행적인 재미를 보았다. 1949년 형 김용환이 급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책임을 진 김정구는 어린 조카들까지 돌보아야 하는 경제적 부담에 오직 무대출연수입으로 버티었다.
6·25 이후 부산에서도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각 단체 쇼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 부르는 수입으로 자동차 사고로 크게 다친 누나 김안나까지 돌보았다.
그의 노래 밑천이 바닥이 났다. 이유는 월북 작가의 작품은 방송이나 무대에서 부를 수 없는 방송윤리위원회 가요심의규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눈물 젖은 두만강」은 작사자 · 작곡가가 전부 이남에 있으니 전에 취입한 후 그렇게 자주 부르지는 않았던 이 곡을 그의 출연무대에서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더욱이 환도 이후 KBS방송이 남산스튜디오로 크게 확장되면서 새로 생긴 프로로서 매일 낮 12시 5분 뉴스 직후에는 「김삿갓 북한 방랑기」라는 모노드라마의 주제곡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이 20년 동안 매일 방송되었다.
어린이 · 젊은이 · 늙은이 구별 없이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1982년 MBC방송에서 소위 컴퓨터 조사라는 방법으로 전국 연령층별로 가요기호조사를 하였는데 1위는 단연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10월 문화의 날 김정구는 가요가수로는 처음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TV가 칼라시대가 되면서 「가요무대」 시간에는 약방에 감초가 빠지면 안 되듯이 김정구의 노래는 노익장을 과시해왔다. 자손들이 성장하여 1990년 초부터 하나둘 미국 L.A.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다.
김정구는 방송국 출연에 미련이 남아 끝까지 미국 이민을 가지 않다가 80세가 넘은 고령이 되자 가족들 곁으로 돌아갔다. 1998년 9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크라라시에서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