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경성 재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공업전수학교에 입학, 중동학교로 편입했다. 졸업 후 1932년 도쿄 데이코쿠(帝國)음악학교에 입학해 피아노를 전공했다. 193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였다가 오케(Okeh)레코드사 사장 이철을 소개받아 대중가요 작곡을 시작했다. 이후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해 학업을 지속했고, 귀국 후 오케레코드사와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했다. 대표곡으로는 「타향살이」, 「휘파람」, 「목포의 눈물」(이상 1935),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밀월의 대동강」(이상 1936), 「짝사랑」, 「해조곡」(이상 1937), 「바다의 교향시」(1938) 등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악극단, 오케싱잉, 신향악극단, 제일악극대 등의 공연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신향악극단은 그가 1940년 직접 조직한 것이다. 1937년 이후 「총후의 기원」(1937), 「보내는 위문대」, 「봄날의 화신」, 「참사랑」(이상 1943)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군국가요를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1943년 부민관에서 제일악극대가 공연한 「아세아교향악」, 「고향」, 「간첩은 아직 살아있다」 등을 총지휘했고, 1944년 2월 『매일신보』가 조직한 매신산업전사위문격려대의 대원으로서 경인지역의 군수공장에서 공연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1945년 10월 조선음악가협회 위원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음악구락부악단을 재조직하여 이끄는 등 다수의 악단에 참여해 활동했고,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경음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도 빅타레코드사, 데이코쿠레코드사 등의 회사에서 음반을 발매했다. 1957년 불법체류가 적발되어 귀국한 후, 유니버설레코드사, 아세아레코드사, 신세기레코드사 등에서 전속 작곡가로 활동했다. 1960년 한국영화음악작곡가협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64년에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창설을 주도했다. 1965년 월남전 파병 당시 아들 후랭키손이 조직한 위문대에 참가하러 월남에 갔다가, 미국과 일본에 거주하다가 1987년 귀국했다. 1989년 한국가요작가협회를 조직, 초대회장직에 취임했다. 1999년 1월 9일 사망했다.
문화훈장 화관장(1987)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