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산군농민사 ()

근대사
단체
1928년 3월 평안남도 맹산군에 조선농민사의 지사로 설립되어 1934년 무렵까지 활동한 천도교 농민운동 단체.
이칭
이칭
조선농민사 맹산군지사
정의
1928년 3월 평안남도 맹산군에 조선농민사의 지사로 설립되어 1934년 무렵까지 활동한 천도교 농민운동 단체.
개설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는 1925년에 조직된 천도교 농민운동 단체로서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각 지부와 사우회를 조직하였다. 맹산군농민사(孟山郡農民社)는 조선농민사의 지도하에 천도교 농민운동의 방침을 실천하였다.

설립목적

맹산군농민사는 농민의 계몽과 의식 각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각종 교육 활동과 농민의 이익 획득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천도교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연원 및 변천

맹산군에 동학이 최초로 전파된 것은 1895년 무렵이며, 이후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교세 확장은 천도교종학강습소, 천도교청년당, 조선농민사 맹산지사 등의 활동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농민사 맹산지사의 기원은 1926년 잡지 『조선농민』 지부의 설치에 있다.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사우회(社友會)가 조직되었고, 이것이 1928년 2월 맹산농우회(孟山農友會)로 개칭되었다가 3월 조선농민사 맹산지사로 성립하였다. 설립자는 조처항·방임주·김응철 등이었다. 이후 맹산지사는 맹산군 8개면과 85개 리 모두에 농민사를 조직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1933년 맹산군농민공생조합의 창설 과정에서 조합 자금의 절반 이상을 군내 ‘대상회주(大商會主)’가 납부하여 공생조합의 활동이 이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맹산군농민사는 농민층의 이해보다 천도교 종교 조직의 확대, 강화라는 측면에서 운영되어 농민층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1932년 이후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이 본격화하면서 맹산군농민사는 점차 쇠퇴하여 1935년 무렵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능과 역할

맹산군농민사는 야학, 강습회, 독서회 등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였으며,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특히 농민공생조합의 활동은 조선농민사 활동 중 가장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공동경작과 공작계의 활동을 통해 천도교가 추구하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한편 농민사 내에 통제부를 설치하여 농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는데, 이는 농민에 대한 천도교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맹산군농민사의 활동은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였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는 달리 개량적 농민운동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주로 농민층의 일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의 농촌 진흥 정책에 부합하는 듯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조선농민사의 조직과 활동」(박지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8)
「일제하 맹산군농민사의 활동과 민족운동」(조성운, 『정신문화연구』 26-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3)
「일제하 조선농민공생조합의 조직과 활동」(조성운,『동학연구』 13, 한국동학학회, 2003)
집필자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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