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1916년 제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 1923년 졸업했다. 19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신의 주(酒)」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시절 정지용(鄭芝容)·박제찬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간행했다. 1924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고, 1925년 서울청년회에 가입했다. 1926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했다. 1928년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의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1934년 '구인회'에 참여했다. 이어 만주로 건너가 친일신문인 『만선일보』의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을 지내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194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조선문학가동맹에도 가입했다. 그리고 평안북도 당위원회 기관지 「바른말」 신문사 편집국장,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49년 당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정로』의 편집국장 및 그 후신인 『노동신문』의 편집국장과 부주필 등을 지냈다.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신문학과 강좌장이 되었으며, 1950년 6·25전쟁 초 종군작가로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3급을 받았으며, 1951년 김일성종합대학에 복직했다. 1956년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8년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1966년 반당종파분자로 숙청되어,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