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동덕여학원 이사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06년에 출생하여 1986년에 사망했다. 계당(桂堂), 민정(敏廷), 방촌상명(芳村祥明)이라고도 한다. 1937년 일본 유학 후 상명고등기예학원을 설립했다. 1940년부터 일제에 호응하고 전쟁에 협력하라는 글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다. 1945년 상명여자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65년 상명여자사범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1971년 한국녹지여성협회를 설립, 국토녹화에 기여한 공로로 농림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1906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했다. 1923년 동덕여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4월부터 1926년 5월까지 경성의 삼선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동경고등기예학교(東京高等技藝學校) 사범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같은 해 종로구 중학동에 상명고등기예학원(祥明高等技藝學園)을 설립했고, 1940년 교명을 상명실천여학교로 변경하면서 교장이 되었다. 1940년 12월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이른바 대동아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기고문을 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0월에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2년 징병제의 실시를 전후하여 강연과 기고문을 통해 징병제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 실행위원이 되었고, 1944년에는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해 조직된 종로총궐기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밖에도 각종 신문과 잡지에 일제의 전시체제에 호응하고 전쟁에 협력할 것을 강조하는 글을 기고했다. 1945년 7월에 재단법인 상명학원을 설립하고, 1951년 9월 상명여자중 · 고등학교의 교장에 취임했다. 1948년 여자중 · 고등학교장 교육시찰단의 일원으로 8개월 동안의 미국교육시찰을 마치고, 귀국하지 않고 시카고대학 교육학부 연구과정과 미시간(Michigan)대학 영어과를 수료했다.
6·25전쟁의 발발로 귀국이 늦어지자 미국부인회의 알선으로 미국시민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연사가 되어 각급 학교를 순회하며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강연을 하는 한편, 1951년 콜럼비아(Columbia)대학교 사범대학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1953년에 재미 상명학원재단을 설립하고 귀국했다. 1958년 양주군 천마산 학교림에 육림사업을 펼치는 한편, 임간학교(林間學校)를 운영하고 1959년 헬싱키에서 열리는 제41차 세계여학사대회에 참석했으며, 1961년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연합회 이사, 1962년 대한여학사회 회우부장, 1964년 서울특별시교육회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상명초등학교를 설립했으며, 1965년 2월에 상명여자사범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이어 1966년에는 부속유치원과 부속중 · 고등학교를, 이듬해에는 부속국민학교를 설립했다. 1961년 학교법인 동덕여학원 이사, 1965년 학교법인 영훈학원(泳薰學園) 이사장에 취임하고 1968년 5월 경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한국녹지여성협회(韓國綠地女性協會)를 설립, 국토녹화에 기여하여 농림부장관으로부터 산림사업발전 유공표창을 받았다. 1972년 한국사학재단연합회 이사, 대한민국문학예술상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조림가협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79년 학교법인 민정학원(敏廷學園), 1980년 학교법인 상명학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1986년 2월 17일 사망했다.
배상명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88∼714)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서울특별시장 교육공로 표창(1955), 문화훈장 국민장(1964), 산림사업발전 유공표창(1971), 대통령표창(1976), 국민훈장 모란장(1982)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