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호적등본에 단기 4248년생으로 등재)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이갑룡(李甲龍)이며, 1964년 이창민(李昌民)으로 개명했으나, 백년설이라는 예명이 잘 알려져 있다. 작사가로서는 향노(鄕奴), 이향노(李鄕奴) 등을 사용했다.
1928년 성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듬해 성주농업보습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다. 이후 상경하여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후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 문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일본에 유학했으나, 고베[神戶]에서 당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던 박영호(朴英鎬)의 권유로 전기현(全基玹) 작곡의 「유랑극단」을 취입, 1931년 1월 가수로 데뷔해 큰 인기를 얻었다.
1941년 태평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체결했고 ‘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등을 유행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일제는 그를 침략전쟁의 선전에 이용했다.
1942년 그가 취입한 ‘모자상봉’은 일본의 유명한 군국가요를 번안한 것이며, 지원병 선전을 위해 제작한 ‘조선해협’의 주제가 ‘조선해협’을 부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다수의 군국가요를 취입했으며, 1941년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조선연예협회와 조선악극단 후원으로 조직된 재선부대연예위문단의 일원으로 일본군 부대와 육군병원 등에서 공연했다.
1942년에는 만주건국10주년기념 만주개척촌위문연예단의 단원으로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1944년 음반제작이 중단되면서 공연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태평양악극단, 악단 제일선, 무궁화악극단 등의 공연단체와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고아원 운영과 사업체 경영에 주력했다.
1950년대에는 가수와 작사가로서도 활동하면서, 1956년에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 평화신문사의 사업국장, 1958년에는 센츄리레코드사 문예부장 등 사업에도 관여했다. 대표곡으로는 ‘두견화사랑’, ‘나그네 설움’, ‘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등이 있다.
문화훈장 보관장(2002)을 받았다. 백년설의 고향 성주 이시봉에는 「번지없는 주막」, 성주고등학교에는 「나그네 설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