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

연극
인물
일제강점기 「팔백호 갑판상」 · 「십년 전후」 · 「출옥하던 날 밤」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 작사가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처녀림(處女林), 불사조(不死鳥), 김다인(金茶人), 新井英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1년
사망 연도
1953년
출생지
강원도 통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팔백호 갑판상」 · 「십년 전후」 · 「출옥하던 날 밤」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 작사가 ·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11년 강원도 통천에서 출생했다. 학력은 불명확하나 강원도 원산의 광명보통학교를 마쳤으며, 와세다[早稻田]대학 문과 강의록으로 대학 과정을 터득했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관계하며 원산의 극단 조선연극공장 문예부원으로 「눈먼 동생」·「낙화」 등을 시작으로 다수의 희곡을 발표했다. 1930년 발표한 「과도기」와 「하차」는 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 구류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1931년 「팔백호 갑판상」·「십년 전후」·「출옥하던 날 밤」, 1932년 극단 신무대, 대중극단 연극시장과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를 통해서 「지옥」·「너는 사공의 딸」·「낙동강 야화」·「방향 전환」·「무덤을 파는 작가」·「피묻은 삼색기·「개화전야」 등을 발표했다.

1933년 황금좌(黃金座)의 창립공연에 「비극폐업」으로 참여했고 「원앙선」·「기계와 목가」 등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거룩한 손님」(극단 신무대) 등을 발표하는 등 1930년대 상반기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의 한사람으로평가되었다. 희곡 창작 이외에도 「무대희곡 창작의 실제」(『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4.1.18~23), 「조선성을 복습하고 - 희곡창작의 재출발(상)」(『조선일보(朝鮮日報)』 1934.6.15) 등의 글을 통해 창작방법론을 모색하고 조선연극의 정체성 확립을 역설하는 등 희곡의 이론적 정립에도 노력했다. 1937년에는 대중극단의 지나친 상업성 문제를 제기하며 본격연극과 대중연극의 경향을 조화롭게 담은 '중간극'을 표방하며 송영(宋影)·맹만식(孟晩植) 등과 극단 중앙무대를 창단하고 새로운 연극운동을 도모했다.

한편 희곡 외에도 1932년 「세기말의 노래」를 시작으로 「짝사랑」·「번지 없는 주막」·「오빠는 풍각쟁이」·「북청물장수」 등 대중가요 120여 곡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방호과(防護科)와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의 후원으로 에토 기키노스케[衛藤吉之助]의 원작을 각색하여 방공(防空)훈련의 생활화를 내용으로 하는 1막짜리 「가두(街頭)」를 공연했다. 1942년 '내선일체 강화, 일본정신 함양, 전쟁의식 고무에 필요한 연극문화 앙양'을 목표로 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발표한 '노자일체(勞資一體)'의 협동정신을 강조한 「산돼지」에서는 ‘전쟁물자 공출’ 참여를 역설함으로써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해 '국민극(國民劇)의 제2년'이라는 주제로 열린 매일신보사 주최의 연극인 좌담회에 참여했다.

1943년 이태준(李泰俊) 원작의 「왕자 호동」을 각색하여 극단 아랑에 제공했고, 조선인 징병제가 허용된 것을 기념하는 내용인 「조선」(극단 아랑), 기독교·선교사 문제를 소재로 '미영 배격과 일본의 전쟁 승리'를 내용으로 하는 「좁은 문」(일명 사랑과 신곡(神曲), 극단 전진좌) 등을 공연했다.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는 일본군 지원과 미영 격멸을 내용으로 하는 「물새」(극단 아랑)을 발표했다. 또한 5월에는 연출가 안영일(安英一)을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연극인들과 함께 '성지참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1944년 극단 황금좌(黃金座)에서 공연된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지지하는 내용의 「촛불」과 육군기념일에 상연할 목적으로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위촉한 「혈서」를 비롯하여 「농병(農兵)」·「천조(千鳥)」·「흑공주」 등의 작품을 썼다. 1945년 2월 제3회 연극경연대회에 지원병 출정, 창씨개명, 내선(內鮮)결혼 등을 주제로 '신체제(新體制)'를 선전한 「별의 합창」을 출품했다. 같은해 전쟁에 참여한 군인 가족의 원호사상을 강조한 「청실 홍실」과 신경균(申敬均) 감독의 영화 「우리들의 전장」의 원작인 「피와 땀[血と汗]」을 썼다.

해방 이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하여 「겨레」·「민족반역자」 등을 발표했고, 1946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동맹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홍수」·「번지없는 부락」 등을 발표했다. 6·25전쟁 중에는 인민군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1953년 사망했다.

박영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31∼55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한겨레음악인대사전』(송방송, 보고사, 201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해방 전(1940~1945) 공연희곡집』(이재명 외, 평민사, 2004)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최창호, 일월서작, 2000)
『한국근대희곡사』(서연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4)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민족정경문화연구소, 1948)
『동아일보(東亞日報)』
『매일신보(每日新報)』
집필자
심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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