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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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8대회장,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한 신학자. 목사 · 교육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8년(고종 25) 9월 5일
사망 연도
1948년 10월 18일
출생지
경기도 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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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8대회장,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한 신학자. 목사 · 교육자.
활동사항

1888년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했다. 1908년 1월 보성(普成)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후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로 가던 중 함경남도 이원(利原)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이때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후 함경북도 회령지방의 순회전도사를 거쳐 1917년 경흥(慶興)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1919년 초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1922년 캐나다 토론토(Toronto)의 녹스(Knox)신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구약을 전공했다.

귀국 이후 1927년부터 1938년까지 관북지방 최초의 여성중등교육기관이었던 함흥 영생(永生)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장대리 및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이때 구약학자로서 『구약성서』의 히브리어 원문을 우리말로 개역하는데 전문위원으로 활약했다. 1931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전신) 8대 회장에 선임되었고, 1932년 독일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에 조선대표로 참석했다. 1939년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평안남도)으로 참여했고, 1942년 2월 평의원에 지명되었다. 같은해 2월 평안남도 경찰부 고등과가, 태평양전쟁 발발(1941.12) 이후 평안남도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시국강연회의 강사들을 모아 주최한 '시국좌담회'에 참석했다. 1942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연맹 이사장을 거쳐 1945년 7월 일제가 모든 교파를 통합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통리(統理)가 되었다.

해방 이후 월남하여 1945년 11월 ‘일본기독교’ 청산과 새로운 조선교단 설립을 목적으로 남부대회를 개최해 대회장이 되어 교회연합운동을 벌였다. 1946년 재건된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이 되었고,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장로회연맹 및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에 대표로 참석했고, 이후 그의 제안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정식 가입단체가 되었다. 귀국 이후인 1948년 10월 18일 사망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 중국동북지역편 Ⅳ』(국사편찬위원회, 2006)
『한국에큐메니칼운동사』(전택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
『한국기독교사연구』(김양선, 기독교문사, 1971)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총독부관보』
집필자
심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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