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 헌법이 성립하게 된 사상적 배경은 1919년 3·1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살던 국내외의 2000만 한민족(韓民族)이 다 함께 참여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었다.
당시 민중시위에서 독립을 구가한 2000만 민중의 호소는 단순한 집단적 반항의 성격을 넘어 새로운 국가질서를 탄생시키기 위한 헌법제정권력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전국적 행사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독립을 위한 한민족의 의지는 자연히 조직적인 국가차원의 독립투쟁을 갈망하게 되어, 그 뒤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은 국권회복과 항일투쟁을 위한 정부규모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노령(露領)의 대한국민의회[결의안(決議案), 대통령제(大統領制)], 같은 해 4월 11일의 상해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헌장, 의원내각제), 같은 해 4월 23일의 한성정부[한성정부 약법(漢城政府 約法), 집정관총재제] 등이 그것이다.
이 세 임시정부는 다시 1919년 9월 11일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개헌형식(통합헌법, 제1차 개헌)으로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고 한성정부와 통합하여 하나의 독립운동추진기구로 통일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국에 환국할 때까지 임시헌법을 제정하고, 전후 5차의 임시헌법 개정을 통하여 ‘헌장’·‘약법(約法)’·‘헌법’ 및 ‘약헌(約憲)’ 등으로 그 명칭을 달리하였다.
또한 그에 따른 헌정체제도 대통령제(대한민국임시헌법, 전문, 8장, 본문 58개조-제1차 개헌), 국무령제(國務領制 : 대한민국임시헌법, 6장, 본문 35개조-제2차 개헌), 국무위원제(대한민국임시약헌, 5장, 본문 50개조-제3차 개헌), 주석제(主席制: 대한민국임시약헌, 5장, 본문 42개조-제4차 개헌) 및 주·부석제(대한민국임시헌장, 전문, 7장, 본문 62개조-제5차 개헌)로 달리하면서 27년간의 장구한 기간 동안 국내외 동포들에게 상징적 대표기관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러한 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사상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며, 또한 그 헌법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도 다른 여러 망명(임시)정부의 경우와 같이 망명(임시)정부헌법의 일종에 속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의 성격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위에 따라 살펴보면,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가 한민족의 주권회복을 위한 조직적 저항운동단체임에는 틀림없다.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은 독립을 위한 조직적 저항운동단체의 기본법이라 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장래 국가를 목적으로 형성된 특수한 범주에 속하는 망명정부적 성격을 지니는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각 단계의 헌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임시정부의 헌법은 특수한 범주에 속하는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기 때문에, 그 체제와 내용에서 통상적인 헌법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19년의 대한민국임시헌법(통합헌법)과 1945년의 대한민국임시헌장(제5차 개헌)에서는 근대입헌주의적 헌법의 면모도 발견할 수 있다.
이 헌법의 특징으로는 3·1독립정신·삼균주의(三均主義)·국민주권·자유권보장·삼권분립주의·의회제도·법치주의 및 성문헌법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임시정부의 각 단계의 헌법에서 전문이 있는 것의 경우, 현행 헌법의 전문에 이르기까지 ‘3·1독립정신’을 삽입하여 우리 민족의 건국정신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3·1정신의 역사적 산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 헌법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적 기원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임시정부헌법은 체제면에서 위기적 성격의 망명정부 형태를 면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리·의무 규정이나 권력분립 및 기타 규정에서 근대헌법으로 미비한 요소도 있었다(2차 개헌·3차 개헌·4차 개헌).
그러나 제1차 개헌의 통합정부헌법과 제5차 개헌의 주·부석제 헌법은 임시헌법 가운데 가장 잘 된 근대입헌주의적 헌법의 내용을 구비한 헌법전(憲法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건국헌법이 이 임시헌법전과 유사점이 많아 대한민국건국헌법의 모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건국헌법 전문(前文)의 내용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을 수립하고, 그 다음에 그 대한민국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현재의 대한민국을 재건하는 것으로, 독립정신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하나의 맥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헌법기초위원장이었던 의원 서상일(徐相日)은 헌법초안 제안설명에서 “이 헌법안은 대한민국 임시헌장…… 그 밖에 구미 각국에 있는 모든 헌법을 종합해서 원안이 기초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1회 제헌국회에서 의장 이승만(李承晩)은 개원식사(開院式辭)에서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과 대한민국건국헌법과의 상호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헌법초안 제1장 제1조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문에 대한 대체토론에서 발언한 제헌의원 대부분이 ‘대한민국’이라는 임시정부의 국호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제헌헌법을 기초할 때 전문위원이었던 유진오(兪鎭午)는 “…… 정신적으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 헌법의 이념과 정신을 계승하여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대한민국건국헌법이 임시정부헌법의 개정이 아니고 새 헌법의 제정이므로 그 상호관계에서 법적 계속성을 설명하기 어려우나, 정신적 측면에서 대한민국과 그 헌법은 3·1독립정신과 그 역사적 산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 헌법의 계승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