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2·12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하자 민주화운동이 활기를 되찾았고 학생운동도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1985년 4월에 전국의 대학생 대표조직으로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결성되고, 그 산하에 삼민이념(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위)가 조직되었다.
삼민투위는 기존의 단순한 반독재민주화투쟁을 넘어서서 이념적으로 급진적인 노선을 채택하고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삼민투위는 전국 34개 대학에서 조직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규합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삼민투위는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을 통해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85년 5월 23일 삼민투위 산하 ‘광주학살원흉처단투쟁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등 5개 대학 학생 73명이 서울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전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은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삼민투위를 용공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수배와 체포 작전을 벌였다. 7월 18일 검찰은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여 전국 19개 대학에서 주요 학생 지도자 63명을 검거하고 56명을 구속, 7명을 불구속 입건했으며, 그 가운데 13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이와 같은 ‘완전 궤멸’을 목표로 하는 대대적인 탄압에 직면해서 삼민투위는 사실상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