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4월 17일 고려대에서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 김민석 서울대총학생회장)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전위적 투쟁조직인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위)를 각 대학에 조직했다. 삼민투위(위원장 허인회 고려대총학생회장)는, 5월 중 광주항쟁 계승기간에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폭로하고 규탄하기 위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할 계획을 세우고 5월 23일에 기습적으로 미문화원을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 미문화원 도서관에서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대자보를 창문에 붙이고, 주한 미대사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벌이다가 5월 26일 자진해서 농성을 해산하고 연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 등 20명이 구속되었다. 피고인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재판거부, 묵비권 행사, 변호인단 전원 사임 등 소위 ‘재판 투쟁’을 전개해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리처드 워커 주한 미대사는 “광주 사태에 미국의 책임이 없다”고 해명했다.
서울미문화원점거사건 이후 경찰은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 이후 학내 경찰 투입 않는다는 방침을 어기고 6월 29일 새벽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9개 대학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삼민투위 관련자 66명을 연행해 삼민투위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과 마찬가지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미국의 정치적 책임을 공론화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과는 달리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