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은 민주적 노동조합을 건설하기 위하여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전국적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 노동쟁의와 민주화운동이다. 1987년 7월부터 현대그룹에서 시작되어 영남권으로 확대되었다. 이석규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한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구속하였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8시간 노동, 노동악법 개정, 노동3권 보장, 자유로운 노조결성 보장, 블랙리스트 철폐, 생존권 보장, 작업조건 개선, 저임금 개선 등이었다. 민주노조결성, 어용노조의 민주화, 대폭적인 임금 인상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 최고의원이 6·29선언을 발표하고 직선제 개헌을 약속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러나 7월부터는 노동자들이 민주노조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민주화운동을 전개한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현대그룹에서 시작되었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고, 7월 16일 현대 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 신고서류를 탈취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대립이 격화되었다.
7월 하순에는 민주노조운동이 영남권으로 확대되었다. 마산 · 창원 지역의 대공장들이 민주화운동에 합류한 것이다. 8월 17일과 18일에는 3만여 명의 울산 현대그룹노조연합(현노협)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해 도시 전체에서 해방구와 유사한 상황을 연출했다.
뒤이어 노동자대투쟁은 부산과 거제로 확산되었으며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8월 22일에 이석규 노동자가 직격 최루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석규 열사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8월 28일 이석규 열사 장례식 이후에 노태우 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했다. 9월 4일 대우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파업농성장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농성과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고 대규모 구속 사태가 벌어졌다. 이와 더불어 9월부터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점차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노태우 정부는 제3자 개입, 위장취업, 좌경용공 등의 여론 공세를 펴며 노동자들이 민주화운동을 고립시키려 했고, 기업주는 휴폐업 조치로 대응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민주화운동은 수도권, 경인지역의 중소기업과 비제조업으로 확산되었으며, 운수, 광산, 사무, 판매, 서비스 등의 직종에서 파업투쟁이 지속되었다.
7·8·9월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주로 요구한 것은 8시간 노동, 노동악법 개정, 노동3권 보장, 자유로운 노조결성 보장, 블랙리스트 철폐, 생존권 보장, 작업조건 개선, 저임금 개선 등이었다. 이와 같은 요구사항들은 노동자대투쟁이 기본적으로 경제적 민주화운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대투쟁의 결과로서 1987년 12월 말 기준 노동조합수 4,103개(1986년 2,675개), 조합원수 1,267,457명(1986년 1,035,890)으로 증가했고, 1987년에 일어난 노동쟁의 3,749건 중 3,341건이 7·8·9월에 발생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유익한 조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조합의 이념과 기능을 체득할 수 있었고,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는 유효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들의 최초의 대규모적인 분출이라고 평가되고 있으며, 민주노조결성, 어용노조의 민주화, 대폭적인 임금인상 등의 성과를 성취했다. 물론 이것은 6월 항쟁의 정치적 효과 가운데 하나였다. 그동안 제5공화국 정부의 강력한 억압과 탄압에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이 일정하게 정치적 자유가 허용된 국면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6월 항쟁에 비해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상대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바가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후 노동자대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연장선에서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