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민주화선언은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도덕성·정통성 결여를 지적하는 직선제 개헌요구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나온 선언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대규모의 가두집회로 대항했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지면서 경찰력이 마비되고 군대 투입설까지 나도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이에 노태우는 8개항의 민주화조치를 발표하였고, 이로써 신군부의 군사독재를 청산하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1985년 2 · 12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의 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줄기차게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였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朴鍾哲) 학생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대결국면으로 치달았다.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는 와중에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한 때 위수령(衛戍令: 육군 부대가 일정한 지역에 주둔하여, 경비와 질서유지 및 군기의 감시와 군에 딸린 건축물 · 시설물 등을 보호할 것을 규정한 대통령령) 발동과 군 투입을 검토하였으나 온건론이 우세하여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6 · 29선언이 발표되었다. 신군부는 1988년에 개최될 올림픽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수령이 발동될 징후를 알아차렸던 미국은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를 저지시켰으며, 야당과 신속히 타협하도록 촉구하였다. 따라서 6 · 29선언의 생성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8개항으로 구성된 주요 내용은 ①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며, ②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통령 선거법의 개정, ③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김대중(金大中) 등의 사면복권과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사범 석방, ④ 인간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 개헌안에 기본권 강화조항 보완, ⑤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 ⑥ 사회 각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최대한 보장,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대학의 자율화, ⑦ 정당활동 보장,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 조성, ⑧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해 사회정화 조치의 강구 등이다.
노태우 대표는 자신의 제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는 단서를 첨가하였다. 그러자 민정당은 6 · 29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추인하였으며,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특별담화를 통해 대폭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6 · 29선언은 정부와 집권당의 공식입장이 되었고, 결국 4 · 13호헌조치는 철회되었다. 이 결과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김영삼(金泳三) · 김대중(金大中) · 김종필(金鍾泌) 후보 등에 맞서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6 · 29선언은 집권층의 공개적 민주화 선언으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다. 또한 민중항쟁에 의한 급격한 변혁논리와 지배층에 의한 점진적인 개혁논리 양자의 타협이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있고 난 뒤, 선언의 주체와 실천여부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의 평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선언 직후에는 노태우가 독자적으로 6 · 29선언을 발의해 상대적으로 강경한 입장이었던 전두환을 설득하였다는 것이 정설처럼 간주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라고 지시하였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는 소극적이었으며 전두환은 김대중이 해금된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면 1여2야의 3파전 혹은 1여3야의 4파전에서 승산이 있다고 설득하였다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미국이 한국에 대하여 민주화를 요구한 상태에서 전두환이 주도하고 노태우가 발표한 것이라는 설이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이 있다. 직선제 개헌의 산물로 새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이 선언이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로서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사회가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해 나아갔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당시 야당과 재야세력은 전국민적 항쟁에 직면해 위기에 몰린 제5공화국의 집권세력이 내놓은 일시적인 양보조치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집권세력에 의한 충격요법의 하나로서 정권의 재창출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며 불가피한 정치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절차를 보장함으로써 국민적 저항을 약화시키고, 저항세력의 내부분열을 일으킴으로써 집권당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당시 노태우 후보는 6 · 29선언을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대한 ‘6 · 29항복선언’이라고 규정하였으므로 야당과 재야세력의 평가에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는 결과에 주목해 일시적인 양보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기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보다 긴 안목에서 본다면 6 · 29선언으로 인해 군사독재를 청산하는 한 전기가 마련되었으므로 민주화 선언으로서의 의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신군부의 강경 억압전략이 대중들의 요구에 밀려 민주화 타협전략으로 선회하였으므로 민주화 투쟁의 한 값진 산물로 볼 수가 있다. 또한 민주화를 향한 대결이 거리의 정치가 아닌 선거를 통한 제도권 내의 경쟁으로 변화하는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도 이 선언이 가지는 또 다른 의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