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朴鍾哲)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부친 박정기와 모친 정차순 사이 2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형은 박종부, 누나는 박은숙이다. 1980년 부산 영남제일중학교와 1983년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거쳐 1984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학생운동에 투신하였고 1986년 언어학과 학생회장을 지냈다.
대학 입학 후 친구의 권유로 패밀리 또는 팀으로 불리거나 언더서클이라고도 하였던 비공개 운동 조직에 가담해 학생운동을 시작하였다. 학생운동은 주로 두 영역으로 구분되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비공개 운동 조직을 통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 학생회를 통한 것이었다. 언더서클의 주요한 활동은 세미나로 불렸던 선배 지도하의 독서토론, 합숙 MT, 유인물 살포, 가두시위, 공활로 불렸던 공장 취업 활동 등이었다. 과 학생회를 통해서는 농촌 봉사 활동, 학회 활동 등이었다. 1984년 1학년 시기에는 주로 학습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세미나 외에 합숙 등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학습은 주로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경제학 등에 집중되었다.
또한 4 · 19혁명 기념식 시위에 참가하고 유인물 살포, 가두시위 등도 수행하였다. 여름방학 기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진행된 농촌 봉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2학기에는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 등으로 정권의 탄압이 강화되자 시험 거부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과 대표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학년이었던 1985년에는 서울미문화원점거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지지하기 위한 가두 투쟁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되어 5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다. 여름방학에는 전라북도 익산군(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서 진행된 농촌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이어 대림동 세왕전기 공장에 취업해 활동하는 공장 취업 활동도 수행하였다. 2학년 말에는 언더서클이 해체되고 새롭게 개편된 ‘서울대 반제반군부파쇼 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3학년이었던 1986년 과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신입생 환영회, 교련 반대 투쟁 등을 진행하였다.
1986년 4월 11일 청계피복노동조합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고 7월 15일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기정학을 받아 학교생활이 곤란해졌고 향후 투쟁을 위한 준비에 집중하였다. 이 와중에 팀 선배로 수배 생활을 하던 박종운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탐지한 경찰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1989년 박종철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고,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2003년에는 박종철인권상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