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은 대학 및 정치·사회 개혁을 목표로 하는 학생주도의 집단적·조직적·지속적인 사회운동이다. 서구의 학생운동이 기성세대에 대한 학생집단의 반항적 심리의 표출이라면 한국의 학생운동은 사회운동이자 다른 사회세력을 대변하는 운동의 측면이 강하다. 예비 지식인으로서의 학생 집단이 정치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를 제기하고 특정 지배질서나 정책결정에 항의하며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이다. 조선조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행동에서부터 시작한 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사회변혁기마다 나라의 발전을 이끄는 주요 추진 동력으로 기능했다.
서양에서는 학생운동을 일반적으로 student political activism 또는 student protest, student unrest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학생운동’으로 가장 많이 표기되며 ‘학생소요’, ‘대학생 데모’, ‘학생시위(활동)’, ‘학생정치활동’ 또는 ‘학생정치운동’ 등의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서구의 학자들은 대체로 ‘심리적인 특성’과 ‘정치적 특성’에 의거해 학생운동의 발생과 전개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정치적 조건과 관련하여 학생운동을 설명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이유는 한국 학생운동이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민주화운동․노동운동․통일운동 등과 같은 거시적인 사회변혁의 일환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학생운동을 기성세대에 대한 학생집단의 반항적 행동, 심리적 불만 표출의 측면보다는 민족적 억압, 정치 사회적 모순에 대응하는 사회운동이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다른 사회세력을 대변하는 운동의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학생운동은 예비 지식인으로서 학생이라는 특정 집단이 정치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를 외부에서 집단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또 특정 지배질서나 정책결정에 항의하며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하는 집단적․조직적․지속적인 사회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학생운동은 특정 정치적 격변기에 사회 모든 구성원의 요구가 정치사회 민주화로 집약되어 나타나는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집약 혹은 대표하여 시위, 농성과 같은 공식화된 정치과정으로 외부의 집합적 행위를 통해서 정치사회의 민주화라는 구성원들의 요구를 표출한 행동들의 묶음이다.
한편 행위자로서의 학생은 출신배경이나 행위지향에서는 쁘띠부르주아의 배경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대학생, 세대, 청년 일반, 지식인으로서 더 강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학생운동의 주체는 대체로 동일한 시기에 대학생활 혹은 청년시절을 함께한 동년배 집단이라는 특징이 있다. ‘세대’ 개념을 사회운동 세력 분석에 활용하는 연구들은 세대개념을 코호트(cohort)나 연령집단과 같이 명목적 범주라기보다는 계급(class)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역동성의 규명에 유용한 사회적 실재로서 바라본다.
한국에서 학생은 역사적 주체로서의 성격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 진행된 한국 학생운동의 특성, 즉 학내 지도부의 이중성(공개․비공개)과 다양한 영역의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이 중첩되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면 학생을 구성적이고 관계적인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볼 수도 있다.
과거부터 그러했지만 특히 1980년대 들어서 한국의 학생운동은 정치 변혁의 요구를 집약하여 자신의 임무로 삼고, 쁘띠부르주아로서 자신의 고유한 이해보다는 민중과 민족이 해결해야 할 총체적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하여 이념적으로는 민주-민족-민중-계급 담론으로 발전시켰다. 학생운동의 이러한 성격은 동시대 혹은 이후 진행된 한국의 민주화 운동, 민중운동, 시민운동, 제도 정치활동으로 발전되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학생운동은 강한 역사성․지속성․정치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 학생운동을 조명해야 그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다.
조희연은 학생운동의 이념적 유형변화에 대해서 1960년대 ‘소시민적 인식 단계’, 1970년대 ‘민중주의적 인식 단계’, 1980년대 ‘민중적․혁명적 인식 단계’로 구분한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장기집권, 부정선거 반대 등의 자유주의적 슬로건을 가지고 저항운동이 전개되었고, 1972년 유신체제라는 폭압적 정권이 등장하면서 이에 대응하는 저항담론 및 사회 운동론적 인식이 심화되었다. 1970년대 민중론의 다양한 형태들( 민중사학이나 민중신학, 분단사회학 등)은 1960년대의 비혁명적 인식 단계를 뛰어넘어 1980년대 혁명주의적 인식 단계로 가는 과도기적 인식 단계의 특징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유영익은 한국 학생운동의 유형을 조선시대 말부터 해방 전까지의 반외세 민족주의형, 1960∼1970년대의 반독재 민주주의형, 1980년대 이후의 민중적 사회주의형으로 구분하고 그 특징을 외국 학생운동에 비해 강한 역사의식, 도덕주의적 성향, 민족주의적 성향, 저항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변혁운동과 지도이념의 정립이라는 입장에 근거해 1980년대의 시기를 세분하고 있는 최연구는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시기(1979년 10․26∼1983년 하반기), 운동의 기반을 확장하면서 전진하는 시기(1983년 말∼1985년 상반기), 질적 발전을 모색하는 시기(1985년 하반기∼1986년), 대중운동의 새로운 장을 연 시기(19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선거 투쟁), 반외세 반독재 통일운동의 선봉에 선 시기(1988∼1989년)로 나누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학생운동을 다룬 여러 연구들은 주로 학생운동이 어떻게 사회변혁의 주체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가에 초점을 두며, 왜 학생운동이 급진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는지를 주로 분석하고 있다. 손호철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시민사회 수준에서 진보운동이 복원돼 남남갈등의 새로운 모습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이전과는 다른 급진성을 보이게 된 일종의 문화적 원천을 광주항쟁으로 보는 것이다.
조희연 등 사회운동 연구자들은 1980년대 광주를 분기점으로 급진주의적 저항담론이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적 인식과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주의)적 인식으로 표출되면서 ‘투쟁의 전투화’, ‘이념의 혁명화’, ‘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는 민중적 담론이 주변화된 것으로 상정한다. 대체로 선행연구자들은 진보․보수와 상관없이 1980년대를 ‘혁명을 꿈꾼 시대’(급진화)였다고 본다.
진보적 사회학계에서는 ‘1980년대’를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희생으로 반미자주화와 조국통일의 과제를 확인시켜 준 시대, 운동 이념과 사회변혁론을 중심으로 한 논쟁구조의 심화와 이를 실천 활동과 연계시킨 시기, 운동의 대중화와 연대투쟁이 활성화된 시기로 1980년대라는 시대와 학생운동의 특징을 규정하는 논의가 다수를 차지한다.
한편 다른 시각들은 체계화된 이념으로의 철저한 무장, 이념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개혁의 방법이 아닌 혁명적 방법 선호와 수단의 과격함, 변혁역량의 축성을 위한 타 운동과의 연합, 대중조직과 투쟁조직의 상호 보완체제의 구축 등이 학생운동의 급진화를 설명하는 근거로 거론하기도 한다. 특히 근․현대사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지속성․폭력성․절대주의(Absolutism)․정예주의(Elitism)․반대주의(Anti-ism) 등이 1980년대 급진화된 학생운동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한국 학생운동, 한국 민주화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방법 내지 수단 선택에서 비폭력에 호소하였다는 점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여러 시위현장에서 화염병과 파이프 등이 동원된 적이 있었고, 1980년 봄의 경우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시민들이 무장하고 무장 항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예외적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었고 폭력이 나타난 경우도 대부분 독재정권의 선제적인 폭력적 진압 방침에 대항하는 방어적인 대항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학생운동은 다른 여러 나라들의 경우와 달리 민주화, 정치변혁의 이름 아래 테러나 게릴라전과 같은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폭력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창언은 1980년대 학생운동은 광주항쟁 이후 정치주의, 혁명주의, 전위주의적 흐름에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폭력의 자기 제한적 사용, 노동자 계급 주체론적 사고를 계승하면서도 반제통일전선론적 사고에 기초하여 다양한 계급계층운동을 망라하고자 했던 대중운동이었다고 설명하였다.
한국의 근대학생운동은 어느 면에서는 조선왕조시대의 유학교육 및 사대부 지식층의 실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성균관 유생들이 자치활동 과정이나 집단적인 의사 표시 및 시정 촉구 행동이었던 유소(儒疏)와 권당(捲堂) 등의 방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유생들의 명분론적 선비정신의 전통이 근대 학생운동의 정신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한국의 근대 학생운동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10년대의 2․28독립선언과 3․1운동, 1920년대의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등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함께 1923년에는 조선학생회가 조직되었고, 1924년에는 과학의 연구, 과학사상의 보급과 학생사상 통일 등을 목적으로 내세운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설립되었는데, 후자는 학생운동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후 학생운동은 그 통일성을 모색하면서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운동의 기본방향을 지향하게 된다. 또한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1931년 이후 신간회가 해산되고 항일운동이 지하로 숨어 들어가게 됨에 따라 학생운동도 같은 행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 하의 학생운동은 한국 민족운동의 전위대로서 민족적 과제에 정면으로 대결하였으며 강한 주체의식과 높은 사명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해방 이후 학생운동으로까지 연결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학생운동과 관련한 주요한 사건들은 해방 직후 신탁통치와 국대안(國大案)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 4․19]를 정점으로 한 자유당정권 하의 반독재 투쟁, 박정희 공화당정권 하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 개헌 및 1970년대의 유신체제 반대운동 등을 들 수 있다.
해방 직후의 학생운동은 신탁통치와 국대안을 둘러싸고 좌․우익계 학생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국대안을 반대한 학생들은 국대안이 국립서울대학교 간판 아래 구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일본통치 시대의 관공립 전문학교를 전부 통합하여 관료 이사회가 대학의 운영권을 장악하는 이사회의 제도 아래 일본식 교육체제를 미국식 교육체제로 바꾸려는 하나의 시나리오로 여겼다. 동시에 남․북한 고정화의 과정과 함께 진행된 학원내 진보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로 이해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국대안 반대 학생투쟁공동위원회를 결성하여 저항하였으나, 미군정의 힘에 의해 결국 국대안은 약간의 손질을 거쳐 시행되게 된다. 이러한 진통은 외세의 간섭을 배제한 민족주체성의 확립과 학원민주화 내지 정치․사회의 민주화를 모색한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1960년 4월혁명은 역사상 처음으로 학생이 주체가 되어 기성 독재정권을 타도한 “이 땅에서 최초로 성공한 시민 민주혁명”이었다. 4월혁명은 특히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하려는 운동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유당 독재세력의 완전한 제거조차 이룩하지 못함으로써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1964년의 6․3운동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투쟁이라는 데 그 의미가 남다르다. 6․3학생운동은 직접적으로 군사독재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촉발되었다. 한․일회담의 경제적 배경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경제성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경제성장에 필요한 해외자본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한․일회담의 군사․정치적 배경은 냉전 하의 집단안보체제를 확보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의해서 동북아의 안보체제에 일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다. 6․3운동은 박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한국 학생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다음 단계의 학생운동을 예비하였다.
이후 1969년의 3선개헌 반대운동과 1972년 유신체제 수립 이후 반유신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는 유신체제의 붕괴에 직접 연결되는 1979년의 부마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유신체제 하의 학생운동은 긴급조치 하의 제도적 탄압 속에서 부침하였고,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었다. 이 시기의 학생운동이 직접적으로 유신정권을 퇴진시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것이 붕괴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조건과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1960년대와 질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태일분신자살사건’과 1974년의 ‘민청학련사건’ 등을 거치면서 학생운동이 농촌과 노동현장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후의 학생운동이 민중지향적 시각을 갖는 단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70년대 학생운동과 더불어 이른바 ‘청년 문화’가 활발하게 꽃피워졌다. 1970년대부터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생활양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점차 유행하였는데 특히 10월 유신 선포 후 패배주의와 무력감에 젖어든 대학가에는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와 함께 장발, 미니스커트, 고고 춤까지 유행했고, 양희은, 김민기와 같은 통기타 가수들과 최인호와 같은 젊은 작가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문화를 퇴폐적이라고 비난했지만, 젊은이들의 현실불만과 저항적 에너지가 분출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1970년대 청년 문화는 1950년대 실존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암울한 현실 속의 학생들에게 도피처 또는 저항의 수단이 되었다.
청년 문화와 더불어 1970년대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민족’이었다. 1960년대부터 고조된 학생들의 민족주의가 1970년대 한층 심해진 정치적 억압 속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분출한 것이었다. 즉 서구 문화의 유입에 맞서 민족 문화를 복원하자는 취지였다. 학생들은 집단적인 공동체 문화 공연의 장을 통해 당시의 권력층을 통렬히 풍자함으로써 유신 정권에 대한 저항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민중문화에 깔려있는 공동체적․집단적 정신을 지배층에 대한 비판의식을 높이는 수단으로 서민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강조하였다. 특히 탈춤․풍물․마당극․마당굿 등 서민들이 향유하는 토속적인 문화형태를 재발굴하고 재창조하였다. 개인의 테크닉, 우아한 공연, 엄숙함, 청중과 연기자의 엄격한 구분을 특징으로 하는 상류계급의 문화와 구별되는 자발적인 참여, 즉흥성, 자연스러움, 신명, 현실세계 비판, 공동체적 연대감 등이 민중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로 보았다. 지식인과 학생들에 의해 수용되고 재창조된 서민들의 일상적 전통문화는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알맞은 핵심적인 문화적 요소, 즉 공동체 정신, 민주적 참여,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 그리고 사회변화를 향한 집단적 투쟁을 위한 활기찬 정신을 포함하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학생 사회는 ‘민중’을 논의 주제로 삼았고, 대학 문화는 민중 문화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한마디로 1970년대 이후 대학 문화는 민족, 민주와 함께 민중을 핵심 가치로 삼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학문화의 한 흐름은 1980년대 노동문화로 발전되었다.
1980년대 광주항쟁을 전후하여 한국 학생운동은 두 가지 차원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하나는 독재정권의 최대의 피해자이자 경제적 모순을 바닥에서 온 몸으로 겪었던 ‘민중’을 더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학생운동의 ‘민중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1970년대 후반 현장론과 정치투쟁론, 1980∼1981년의 무림․학림논쟁과 1982년의 야비․전망논쟁, 1984∼1985년의 MC․MT논쟁(깃발․반깃발 논쟁)등을 거치면서 더욱 급진화 되었고, 한국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운동의 조직화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 나갔다.
먼저 광주항쟁이 동시대인의 부채감에서 비롯한 운동 참여와 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원천이 되었다면, 1982년부터 시행된 졸업정원제와 1984년의 학원자율화는 양적으로 팽창된 대학사회, 학원자율화를 통해 확보된 상대적으로 개방된 공간은 저항언론, 저항담론 활성화와 함께 운동문화의 확산과 저항주체의 동형화에 일조한다. 일부 지식인과 학생운동 그룹은 비판이론이나 사회민주주의 같은 온건한 이론이 아닌 맑스주의의 특수한 전략모델인 볼셰비즘 수용의 배경과 동기를 금단과 배제의 ‘단극구조(unpolar structure)’가 낳은 결과 즉 ‘정치사회’와 ‘공론장의 부재’, 군부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단선적 적대와 관련된다고 본다.
1980∼1990년대 학생운동은 급진화와 동시에 87항쟁을 거치면서 대중화에도 성공한다. 1987년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경기․충청․강원․호남․영남지역을 포괄하는 전국 95개 대학의 전국적 협의체가 발족하였다. 학생운동 주류(NL)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는 협의체 조직이며 대학의 대표자(총학생회장)를 회원으로 한다. 전대협은 비주류 학생운동 세력(CA, PD)가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민족과 민주세력의 연대를 강조한다.
전대협은 1987년 대선 시기에는 ‘후보단일화를 위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천명하였고, 전대협, 서대협 등이 주축이 되어 ‘민주쟁취 청년학생공동위원회’ 결성하면서 선거투쟁에 적극 가담하였다. 1988년에는 평화캠페인을 전개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을 이끌어 내는데 한 몫을 했고, 다음 해인 1989년에는 북한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임수경을 파견함으로써 과거의 역량을 재현하는 듯 했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 닥친 ‘공안정국’으로 활동이 위축되면서, 휴식기를 가진 전대협을 위시한 학생 운동권은 1991년 봄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을 계기로 그동안의 열세를 일시에 만회하려는 듯 4∼5월 동안 강경한 투쟁을 벌였다. 또한 소위 ‘외국어대생의 정원식 총리서리 계란투척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되면서 학생운동의 열기는 식고 말았다.
전대협은 7기에 이르러 1993년 3월 경희대에서의 대의원 총회를 통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 1993년 5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약칭 한총련)으로 재발족하였다. 그러나 전대협을 계승한 한총련 시기 학생운동은 더욱 침체에 빠지게 된다.
사실 199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는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전개된 운동의 내재적 위기, 즉 권위주의 시기 운동의 한 주기를 끝내고, 민주화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주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심화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재야운동세력이 정치권으로 일부 진입하고 정치적․사회적 행위와 갈등을 규정하는 게임의 규칙이 변화하였다. 학생운동 역시 변화된 상황과 조건에 맞게 운동의 방식을 변화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한총련은 그러한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채 내부 민주주의의 부재, 모든 문제의 미국 환원, 반미-통일지상주의 그리고 북한의 논리와 정서를 역 편향적으로 수용한 결과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적 상상력’을 상실하고 학생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1991년 ‘5월 투쟁’의 패배와 현실 사회주의권 몰락으로 운동 진영에서 이탈하는 활동가와 학생이 늘어나고, 대학사회 전반에 정치적 무기력․무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91년 6월 외국어대 ‘정원식 계란투척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대한 권력과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다음 1993년 문민정권의 출범은 더 광범위한 대중적 이반과 탈정치화를 부추겼다. 이는 군부세력 집권의 종식과 문민정부 집권 초기의 개혁드라이브가 강력한 대중 이데올로기로 전화한 결과다.
여기에 더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신세대 논쟁, 소비문화의 확산, 신자유주의로의 편입과 대학의 시장논리 강화, 학부제 도입 등 변화된 현실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균열이 더해지면서 학생운동의 위기는 급속히 확산․가속화되었다.
한편 반독재 민주세력이 집권한 1997년 이후 학생운동도 많이 약화된다. 1997년은 한편으로는 반독재 개혁 자유주의세력이 집권하는 전환점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1997년 9월 외환위기를 계기로 국제금융기구(IMF)의 관리 하에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적 개방화시대로 들어가게 된 전환점이었다.
반독재 민주정부는 한편에서는 그동안 저항세력으로서 요구하던 의제를 폭넓게 정부정책 의제로 전환해 실현하는 성과를 냈지만, 다른 한편 신자유주의적 프레임을 수용했고, 그 부작용을 상쇄하는 적극적 정책을 전개하지 못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회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비정규직 양산, 소득분배의 악화, 고용불안, 양극화 등 신자유주의적 개방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났고, 이에 대해 반독재민주정부가 적극적인 사회정책으로 응전하지 못하여 대중의 삶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민주정부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나타났으며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담론, 민주주의운동에 대한 회의와 도전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위기의 원인은 정치․경제 변화의 영향도 크지만 학생운동 진영 내부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민주화 시대, 학생운동 내부의 균열과 안주, 포섭(초대받은 정치)이라는 측면과 주체적인 전략노선 수립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물론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된 것은 분명하지만, 2000년대 학생운동 내부에는 1980년대가 추구해왔던 제도적․구조적 전략에 더하여 1990년대식의 문화적 전략을 결합하여 운동의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려는 경향도 있다. 법적․제도적․절차적 민주화를 통해 확장된 소통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대중의 정치적 저항을 시민사회라는 체제 내부의 특정한 공간으로 포획하려는 권력의 작동에 능동적으로 대응해나가려는 노력도 시도되고 있다.
한국 학생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현대사의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온 군부 억압통치와 정면으로 대결해온 투쟁세력이었고, 민주화운동의 주된 추진력이었다. 4․19에서 1960∼1970년대 엄혹한 시기에 아무런 저항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을 때, 선도적 투쟁을 감행하였고, 노동 현장참여, 1980년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 1987년 6월 항쟁, 그 이후의 통일운동, 최근의 촛불시위와 등록금 투쟁에서 보여준 응집력까지, 한국의 학생운동은 대체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인 ‘강한 운동의 전통’과 그 중심적 역할을 해온 학생운동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생운동은 자체의 이론 형성에는 이르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많다.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그 가시적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론이 많지만 부정적 측면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했지만 민주주의를 단계론적으로 사고한 ‘민중민주주의’ 개념의 한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충분히 탈피 극복하지 못한 점, 민중지향성이 갖는 계몽주의적 한계 등이 비판되고 있다. 한국 학생운동은 높은 투쟁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를 보다 심층적이고 주체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이는 비단 학생운동 자체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외부 환경의 부침에 크게 영향을 받아온 한국 지식인사회 및 사회과학계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학생운동은 새로운 시대적 상황과 도전 앞에서 자체 혁신과 재정식화를 통한 새로운 급진화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특히 학생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이 민주화 이후 변화된 상황에 주동적으로 대응하여 “비국가주의적, 비노동계급적, 비계급적대적 저항성을 포괄하면서 일국적 한계를 뛰어넘어 정치․경제 질서의 지구화에 대응하는 저항과 연대의 지구화의 과제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