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1993년 결성된 각 대학 총학생 회장뿐만 아니라 단대 학생 회장까지 포괄하는 연합 조직으로 19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학생 운동 단체이다. 초기 한총련은 대학 내 문제와 더불어 민중 운동과 연대해 가면서 대중의 호응을 얻었으나, 1995년을 기점으로 강경 민족 해방(NL)파가 한총련의 중앙 조직을 장악하면서 통일 운동 중심으로 편재되었고 이후 1996년 ‘연세대 사건’, 1997년 ‘이석 치사 사건’ 등을 계기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조직적 탈퇴가 이어지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4·19 이래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선봉을 담당해 왔다. 1980년대 초 학생운동의 조직 형태는 패밀리를 중심으로 한 비공개 서클이나, 학생회와 별개로 운영되는 독립 투쟁 단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후반 이후 강경 민족 해방(NL) 계열의 전투적 학생회 노선을 시작으로 학생회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왔고, 1987년 8월 19일 전국 대학의 총학생 회장들의 협의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창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각 대학 총학생 회장뿐만 아니라 단대 학생 회장까지 포괄하면서 협의체 수준을 넘어 좀 더 중앙 집권적이며 전국적 집행 체제를 지닌 연합체 형태의 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그 조직이 바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이다.
한총련은 1993년 5월 고려대학교에서 공식 출범하였다. 출범 당시 5개 위원회, 3개국, 9개 지역, 1개 특별 지구, 25개 지구 총련, 9개 부문 계열을 두고 있었다.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대의원 대회는 각 대학 총학생 회장과 단대 학생 회장으로 구성되었고 의장 선출, 강령 및 규약의 제 · 개정, 특별 기구장 인준, 의장 탄핵권, 예결산 심의 및 의결 등 사업 전반의 심의 · 인준 · 의결 등의 권한을 가졌다. 그밖에 각 대학의 총학생 회장으로 구성되는 중앙 운영 위원회, 각 지역 총련 의장단과 특별 기구장(대변인, 조국통일위원장, 학원자주화추진위원장)으로 구성되는 중앙 상임 위원회가 있었으며 각 회의는 의장이 주재하였다.
한총련이 출범한 1993년은 문민정부의 출범, 동구권 붕괴, 서태지로 대변되는 신세대의 출현, 해외 배낭여행 열풍 등 세상이 급변하는 시기였다. 급변하는 현실을 반영하여 한총련 역시 ‘생활 · 학문 · 투쟁의 공동체 한총련’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아울러 한총련은 1994년 쌀 수입 반대 투쟁, 1995년 전두환 · 노태우 학살자 처벌 투쟁으로 5·18 특별법 제정에 공헌하는 등 한국 사회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대중의 호응도 얻었다.
그러나 1995년을 기점으로 강경 NL파가 한총련 중앙 조직을 장악하면서 활동의 중심이 통일 운동으로 되었고 표어도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변경되었다. 한총련의 통일 운동은 매번 정권과의 격렬한 충돌로 이어지곤 했다. 특히 1996년 여름, 연세대학교에서 주최한 8·15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를 경찰이 강경 해산하려 하자 한총련은 이에 맞서 격렬한 시위로 대응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수백 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의경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다음 해인 1997년에는 5기 한총련 출범식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이를 진압하던 전경 1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더구나 한총련 간부들이 캠퍼스 주변을 배회하던 선반 기능공 이석 씨를 경찰의 프락치로 의심하여 집단 구타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1997년 검찰, 1998년 대법원이 차례로 한총련을 이적 단체로 규정하였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대학생 5월 축전, 6·15 민족통일대축전을 개최하는 등 통일 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2002년 지방 선거와 총선을 계기로 민주노동당 지지를 선언하고 조직적 참여를 하는 등 정당과 연계한 활동도 이어 갔다.
한총련은 1996년 연세대 사건, 1997년 이석 치사 사건 등을 계기로 조직적 세력 약화를 겪게 된다. 물론 변화한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80년대 운동권식 이념 지향, 상명 하달의 비민주적인 조직 운영 방식을 답습한 점도 세력 약화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IMF 외환 위기 사태 이후 대학가에도 예외없이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와 실업난은 한총련의 대중적 지반을 붕괴시켰다.
1999년 이후 한총련에 대한 조직적 탈퇴가 이어지게 된다. 민중 민주(PD) 계열의 학생운동 정파인 전국 학생 연대가 전국학생회협의회(전학협)를 결성하면서 학생회 운동은 한총련과 전학협으로 분화되었다. 1999년 전북총련이 지역 총련으로서는 처음으로 한총련을 탈퇴하였고, 2003년에는 온건 NL 그룹을 중심으로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추진 운동이 시작되어 2005년 정식 출범하면서 한총련은 소수 강경 NL그룹만으로 축소되었다. 2008년 3월 한총련은 신임 의장 선거에서 후보자를 찾지 못해 출범 16년 만에 처음으로 의장 선출에 실패했으며, 2011년 8월 26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사이트가 폐쇄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전대협을 계승한 한총련은 1990년대 학생운동도 1980년대와 마찬가지로 학생회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한총련은 90년대 초반의 짧은 도약기와 이후 긴 세력 약화 시기를 거쳤는데, 그것은 한총련이 고수했던 80년대식 운동권 문화, 상명 하달의 비민주적 조직 운영, 나아가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 방식 등이 이미 90년대에 그 수명을 다 했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2000년대 이후 한총련의 몰락은 전반적인 한국 학생운동의 몰락을 동반했는데, 그것은 IMF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와 실업난이 한총련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전반의 대중적 지반을 붕괴시켰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