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란 인간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가지게 되는, 동등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기본적 권리를 말하며 인권보호운동이란 바로 그러한 인권을 보장 · 보호받도록 노력하는 사회운동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러한 인권의 기본 사상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초기만 하더라도 인권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는 귀족인 영주와 농노를 중심으로 한 신분 사회로서 신분에 따른 권한과 의무가 달랐으며 신분은 세습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부를 축적한 제3신분이 성장하게 된다. 부르주아라고 불린 제3신분은 귀족에 맞서 농노 및 도시 하층 계급과 연대하여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시민 혁명이다.
자연권 사상은 봉건적 신분 질서에 맞선 시민 혁명을 정당화한 사상이다. 홉스, 로크, 루소 등에 의해 주창된 자연권 사상은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기본권을 가지며 그것은 성문법에 앞서는 자연권이라고 주장하였다. 시민 혁명 이후 미국과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시민 헌법은 이러한 자연권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권 사상의 성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자연권 사상으로부터 출발한 인권 개념은 개인의 자유권 특히 사유 재산권인 소유권에 대한 강조를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19세기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남성과, 재산의 소유자에게만 선거권 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발현되었고 결국 노동 계급에게도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으로, 노동 계급의 생존권 투쟁으로, 나아가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인권 확대 요구로 인해 인권의 적용 범위가 점차 확대되었고 인권 담론 역시 ‘자유’에 대한 배타적 강조로부터, 점차 ‘복지’를 국가의 시혜가 아닌 ‘인권’으로 보는 사회권의 형태로 확장되었다. 1948년 채택된 「유엔인권선언」은 자유권과 사회권 두 가지의 내용을 모두 담는 선언으로 만들어졌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권 사상이 등장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시민 혁명을 통해 가능했다. 또 애초 부르주아 상층에게만 적용되었던 인권 개념이 노동자, 여성, 흑인 등으로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되고 자유권으로부터 사회권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 역시 아래로부터 지난한 투쟁을 통해 쟁취되었다. 말하자면 인권 개념의 등장과 수용 · 확대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인권 운동의 등장을 동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시민 혁명은 물론이고 차티스트 운동, 노동 계급의 생존권 투쟁,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 흑인 민권 운동 등은 인권을 쟁취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모두 인권 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권’을 전면에 내걸고 진행되지는 않았다. ‘인권’보장을 전면에 내건, 보다 전문적인 인권 운동은 「유엔인권선언」에 ‘인권’이라는 명칭이 기재되고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본격화되었다. 인권 운동 단체들에 의해 진행되는 ‘전문적’인 인권 운동은 특수화된 대상 집단보다는 계급과 계층을 망라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인 권리 향상을 핵심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인권’ 개념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의 대두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서양에서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시작되었다는 등 다양한 입장이 개진되고 있다. 그런데 그 유래가 무엇이었든 간에 한국 사회에서 인권 개념이 실제 사회에 적용되도록 강제한 것은 동학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에 입각해 있었던 동학 농민 항쟁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신분 차별의 철폐가 선언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에도 인권은 아래로부터 투쟁을 통해서 쟁취되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공식적인 신분 차별 철폐 선언이 실제 신분제의 관행을 없애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구한말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감에 따라 조선인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은 강화되었고 조선인의 전반적인 인권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일제 식민 체제에서 인권 침해는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과 함께 한층 심화되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강제 연행과 강제 노동,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한 징병제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일본군 위안부 제도도 병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인권 운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항일 독립 운동과 병행되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 운동도 이루어졌는데 농민들의 소작쟁의, 노동자들의 원산 총파업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여성들의 저항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좌우 여성 운동가들은 근우회(槿友會)를 결성하고 민족 해방과 여성 해방을 위한 운동을 동시에 전개했다.
한편, 신분 차별 철폐 운동도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리는 최하층 집단이 주도한 형평사 운동은 봉건적 유습과 편견에 도전하고자 한 신분 차별 철폐 운동으로서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사 운동과 연대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기의 혼란을 지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에는 기본권의 형태로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상세하게 규정되었다. 1948년 12월 10일은 세계 인권 선언이 선포된 해이기도 했는데 유엔은 그날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한국 정부는 전쟁기였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부터 세계 인권 선언 선포를 기념하는 행사를 시작했고 1951년부터는 인권 주간으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사회가 인권이 잘 지켜지는 국가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반공을 ‘국시’로 출발한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인권 탄압이 수시로 자행되었으며 무엇보다도 1950년에 발발하여 3년간 지속된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 국민들에게 인권은 사치스러운 단어로 전락했다.
박정희 정권에서도 인권에 대한 담론은 경제 성장, 국가 안보에 종속되어 있었다. 물론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인권 홍보 활동을 강화하여 인권 잡지를 발행하고 인권 주간 행사를 확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일관된 기조는 국가 경제가 발전하면 국민의 기본권과 존엄성이 자동으로 보장된다는 논리였고 반공이 곧 인권 보장이었다. 1970년대 유신 체제가 되면서 이마저도 중단되고 한층 강화된 억압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기조는 1980년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 하에서도 지속되었다.
이처럼 국민의 인권이 극도로 침해되는 상황에 대한 저항 운동도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 인권 운동 단체는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부 수립 직후 생겨난 정부 등록 인권 단체들이다. 대표적으로 한국 최초의 인권 단체라고 할 수 있는 1953년에 세워진 국제 인권 옹호 한국 연맹, 1961년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 인권 옹호 협회 등이 있다. 이들 단체 이외에도 법무부 등록 단체로 법무부 인권 옹호과, 검찰청 인권 상담소, 각 변호사회 인권 상담소, 여성 법률 상담소, 한국 노총 등이 있다. 그러나 정부 등록 단체인 만큼 이들의 활동은 법률상의 인권 침해에 대한 상담과 구제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인권 침해의 당사자였던 정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른 하나는 인권 운동과 함께 반정부 투쟁을 병행한 단체들이다. 인권과 결부된, 거의 모든 문제가 정치 억압을 극복해야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인권 단체들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핵심적인 운동으로 파악했다. 그와 함께 인권 운동을 병행해 나갔는데 이때 인권 운동을 특수화된 전문 분야로 파악하기보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일환(부문)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컸다. 이들은 1970년대 초반 결성되기 시작했는데 주로 구속자 석방 운동을 중심으로 한 자유권적 인권 운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1972년 3월 설립된 ‘국제 엠네스티 한국지부’는 이러한 인권 운동 단체의 효시(嚆矢)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4월에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NCCK) 인권 위원회’가 발족했는데 이 단체는 긴급 조치 이후에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특별 위원회 형태로 시작되었다. 1974년 9월에는 민청학련 연루 혐의를 받은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즉 이 당시 인권 운동은 대체로 국외에 본부를 둔 인권 단체이거나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종교 단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물론 이러한 두 부류의 인권 운동 단체들의 외부에서도 인권 운동이 발생했다. 4·19 혁명기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가족들이 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실제 조사가 시작되었던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오일륙 군사 정변이 발발하면서 조사는 중단되었고 운동도 단절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자살사건은 노동자들의 ‘인간 선언’으로 한국에서 자생적 노동운동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1년 성남에서 이루어진 ‘광주대단지사건’은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 요구를 표현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은 사회권으로서의 인권 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1980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사건 이후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력은 미국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급진화되어 갔다. 그에 맞춰 인권 운동 역시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 조직화 · 급진화되어 갔다. 우선 1980년대 인권 운동의 활동 영역은 민주화 인사의 권리를 넘어 민중 · 민족 운동에 참여하는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의 인권 침해 대응으로 확장되었다.
인권 침해 피해자 모임도 결성되었다. 1985년 5월에 발생한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을 계기로 대학생들이 대거 구속되자 학부모들은 다른 민주화 운동 가족들과 함께 ‘민주화 실천 가족 운동 협의회(민가협)’를 결성하였다. 또한 1985년 김근태 고문 사건을 계기로 야당을 포함한 범민주화 운동 단체들은 ‘고문 및 용공 조작 저지 공동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 단체는 1986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거치면서 점차 확대 · 발전되어 갔다. 이들은 결국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군부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강제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87년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인권 침해도 점차 개선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속도는 매우 더디었고 그나마도 아래로부터 요구가 있을 경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민주화 이후 인권 운동은 그 이전에 비해 오히려 더 활성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민주화 이후 문민정부가 집권하면서 정부에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인권 단체도 등장하는 등 이념적 스펙트럼도 확대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인권 운동의 주요 특징은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분화, 독립된 전문적인 인권 운동이 형성되었다는 점, 소수자 당사자 권리 운동이 활성화되었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은 ‘인권’을 전면에 내세우고 민주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인권 문제들에 새로운 활동 방식으로 대처해 나갔다. 또한 여성, 장애인,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 등 다양한 소수자 권리 운동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한국 인권 운동사에서 1993년은 새로운 이정표(里程標)가 되는 해이다. 1993년에 결성된 인권 운동 사랑방은 민주화 운동에 종속적인 기존의 인권 운동 방식에 한계를 느낀 서준식을 비롯한 인권 활동가들이 만든 단체로, ‘인권’을 전면에 내건 독립적인 한국 인권 운동 단체의 효시이다. 1993년 1월 18일에는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연합 산하 인권소 위원회’가 ‘천주교 인권 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독립된 인권 단체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다산 인권 센터’의 전신인 ‘다산 합동 법률 사무소 산하의 다산 인권 상담소’ 역시 이 해에 만들어졌다. 아울러 1993년 비엔나에서 개최된 ‘세계 인권 회의’는 한국 인권 활동가들에게 독자적 인권 운동, 새로운 인권 운동으로 전환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소수자 권리 운동 역시 다양한 성과들을 이루었다. 1980년대 성장하기 시작한 여성 운동 단체들은 민주화 이후에 보다 더 활성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 남녀 고용 평등법 제정과 가족법 개정을 이루어 냈고 90년대 들어서는 성폭력, 가정 폭력, 직장내 성차별과 성희롱을 방지하고 처벌하는 법률 제정을 이루어냈다. 2000년대에는 정당법을 개정하여 여성 공천 할당제가 실시되도록 하였으며 2001년 여성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 기구의 신설, 2004년 성매매 방지법, 2005년 호주제 폐지 등의 성과를 이루었다.
장애인의 경우 1995년에 ‘한국 장애인 복지 공동 대책 협의회’가 결성되었고 1996년에는 지체, 농아, 맹인, 정신지체 등 4개 유형별 장애 단체로 구성된 ‘한국 장애인 단체 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2000년대 이후 장애인 운동은 이동권 확보와 자립 생활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성 소수자 인권 운동도 등장했다. 1993년 최초의 모임인 ‘초동회’가 결성되었고 이 단체는 결성 2개월 만에 해체된 이후 남성 동성애자들의 ‘친구사이’와 여성 동성애자들의 ‘끼리끼리’가 조직되었다. 1995년에는 대학별 성소수자 모임이 만들어졌고 이는 4개 단체가 연합한 한국 동성애자 인권 운동 협의회로 발전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동성애 문제로부터 트랜스젠더까지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 인권 운동도 본격화되었다. 1994년 1월 10일 경실련 강당에서 네팔, 방글라데시 출신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 11인이 산업재해 보상과 인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는데 이는 국내 최초의 이주 노동자 당사자의 직접 행동이었다. 1995년 1월에는 산업연수생 제도의 반인권적 성격을 규탄하고 산업연수생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이주 노동자 농성이 서울 명동성당의 입구에서 진행되었다. 이 농성을 계기로 이주 노동자 인권 단체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인권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다양한 논쟁들 역시 이루어져 왔다. 우선,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둘러싼 오랜 논쟁이 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따라서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각 국가마다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되어 온 문화적 차이, 국가들이 처해 있는 국제 정치 현실 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개인에게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각각 어느 수준까지 고려하고 허용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자유권과 사회권을 둘러싼 논쟁도 그 역사가 깊다. 역사적으로 인권은 자유권으로부터 시작되어 사회권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확대 ·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 과정이 매끄럽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으며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인권 운동은 오랫동안 자유권 보장 요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생존권, 경제적 평등 등을 강조하는 사회권 역시 인권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역시 제기되어 왔다. 특히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사태를 경유하면서 사회권을 강조하는 입장이 보다 더 강화되었고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인권 개념에 사회권을 어느 정도까지 포괄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인권 운동의 주체가 당사자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니면 당사자가 아닌 일반 시민도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권 운동은 외부의 ‘선량한’ 시민이 인권 침해로 인한 피해자를 돕는 형태로 출발했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권 침해를 가하는 독재 국가를 민주화함으로써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이 최종 목표이기는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소수자 운동은 대부분 당사자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당사자가 아닌 비장애인을 인권 운동의 주체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고 있는 장애인 운동에서 이러한 논쟁은 매우 가열차게 이루어졌다.
시대가 변화해 감에 따라 새로운 인권 문제들도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정보 · 기술이 발전해 감에 따라 컴퓨터에 의한 프라이버시 침해와 온라인상의 소통과 폭력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이처럼 21세기에도 인권 운동은 오래된 문제뿐만 아니라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문제들에도 대처해야 한다는 과제들을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