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

정치
개념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적 · 사회적 운동을 가리키는 정치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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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반공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적·사회적 운동을 가리키는 정치용어다. 용어 그대로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반공주의의 기원은 민족주의자들과 기독교인, 일본 식민지 권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해방 이후 냉전의 고착화에 따라 국가의 정통성과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반공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는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며, 오직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민족의 진정한 정부가 된다. 반공은 국민을 하나의 이념으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정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적 · 사회적 운동을 가리키는 정치용어.
개설

반공(反共)은 용어 그대로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주의(ideology)’에 대항하는 것, 즉 반공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를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주의’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이론이 생겨난 이래 좌 · 우파를 막론하고 등장했던, 공산주의에 대항함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사조를‘ 반공주의’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반공의 함의를 살필 때에는 그 명칭 속에 숨겨져 있는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래 ‘반공’이라 함은 그 사상적 특수성으로 정의되기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항한다고 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때 ‘반공’, 혹은 ‘반공주의’로써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반공의 의미는 포괄적인 공산주의 대항 운동의 총체였다기보다는 정부 주도하의 단일 이데올로기로 담론화되어 유포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령 1961년 5 · 16군사정변 당시 ‘혁명정부’가 내걸었던 ‘혁명공약’ 제1조는 “반공을 국시의 第1義”로 삼는다고 천명하였다. 이때의 ‘반공’은 앞서 논의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모든 운동’으로서의 ‘반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의 ‘반공’은 분명한 이데올로기적 실체로써 대한민국의 국가 기조, 국민의 기본 소양, 사회적 결속력을 창출해 낸 국민 창출의 동력원이었다.

그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정부 수립 이래 기득권층의 주도 하에 단일한 사상적 흐름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사회 내부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 등장한 한국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정치적으로는 민족지상주의 · 국가주의를 옹호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서방 자유진영과의 동맹을 추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서방국가들의 자유주의를 수용하기보다는 개인의 희생 · 사회적 결속을 옹호하고자 하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상적 특질을 내포하고 있는 한국 특유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냉전이 종식되던 199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연원 및 변천

반공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움직임을 일컫는 만큼, 공산주의의 등장과 그 연원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주의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1848년 ‘공산당 선언’을 통하여 ‘과학적 공산주의’를 주창한 그 순간부터 그 비판이론으로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의 여파로 공산주의 세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공주의 역시 함께 성장하였다.

한국에서의 반공주의의 기원은 공산주의 사상이 소개된 식민지 시기, 특히 1920년대로 소급된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시기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은 민족주의자들과 기독교인, 그리고 일본 식민지 권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민족주의자들과 기독교 계열 인사들은 서구 우익 · 기독교 계열의 공산주의 비판 논리를 흡수하여 공산주의가 당장 시급한 민족 해방보다는 계급 해방을 부르짖는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코민테른 활동을 독립이 아닌 소련에의 종속을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총독부의 대중교육도 반공의 영향력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본 내에서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단속 움직임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대중들을 대상으로 반공주의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존재했던 관변 단체 중 하나였던 조선방공협회의 반공교육이 그러한 경우로 이들이 만들어낸 공산주의자에 대한 ‘선동가’, ‘냉혈한’, ‘패륜아’의 이미지는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공산주의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각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방 이전까지의 반공주의는 하나의 통일된 사조라기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우파적 · 민족적 입장에서의 비판 이론의 집합체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냉전의 고착화에 따라 남북한 간의 이념적 대결구도가 점차 명확해지고 한반도를 둘러싼 대내외적 여건이 대한민국의 생존에 불리해지면서 반공주의의 성격도 변화하게 되었다.

즉 해방 이후 한국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논리적 비판의 성격보다는 국가의 정통성과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한 국가 주도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1948년 8월 10일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미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에게 “대한민국의 국가 정책은 반공이 되어야 한다.”라고 언급한 사실은 한국 반공주의의 국가 주도적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반공주의 확산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란에 대한 진압은 반란군뿐만 아니라 국가에 비우호적이라 상정되었던 해당 지역 주민들에 대한 포섭 작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국민들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보다는 무조건적인 배격,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요구하였으며, 이는 「국가보안법」의 제정으로 법제화되기에 이르렀다.

6 · 25전쟁은 여순사건에서 보였던 체제 수호적 경향의 반공주의가 전국 단위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웠던 시기였던 만큼 이 시기 정부는 국민들에게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의 사상적 기반은 무시되었고,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 고취가 중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5 · 16군사정변을 성공시킨 후 내건 혁명공약 제1조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이는 ‘반공법’ 제정과 같은 실제 정책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반공법’은 직접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나 북한 체제를 옹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찬양’, ‘고무’, ‘동조’의 조항을 통해 포괄적인 처벌이 가능했으므로 악용될 여지가 많았다. 이미 그 내용 여하보다는 공통된 적대감의 공유를 통해 국민 단결의 이데올로기로써 주로 기능하고 있던 한국의 반공주의는, 군사정권 집권 후부터는 공산주의의 유입으로부터 체제를 수호하려는 목적론적 경향을 짙게 띠었다.

또한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에서 보이듯 반공 이데올로기는 정부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성격도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반공주의는 독재체제에 대한 체제 옹호 이데올로기라고 하여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북한체제가 여전히 존재하는 만큼 반공주의는 대북 적대 이데올로기로써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될수록 그 영향력이 커진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내용

일찍이 공산주의가 성립했던 서구에서는 실로 다양한 학파들이 공산주의를 비판해 왔으며,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먼저 우파 진영의 비판 논거를 살펴보면, 자본주의 이론가들의 경우 인위적인 공산주의적 통제경제가 자본주의 체제에 비해 취약성이 강하며 공황 발생 시 시장에 의한 자정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한편으로 이들은 중앙으로의 권력 집중이 가져올 수 있는 경제적 폐해에 대해 지적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에서 맹위를 떨쳤던 파시즘은 공산주의가 강조하는 세계혁명과 계급혁명을 부정하고 계급보다는 민족을 중심에 놓는 민족지상주의를 주장하여 대표적인 반공사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우파 지지의 한 축인 기독교 진영에서도 공산주의 특유의 무신론 · 유물론 · 과학만능주의를 반대하여 반공주의의 이론적 근거의 한 축을 제공하였다.

좌파 진영에서는 특히 아나키즘, 반스탈린주의를 필두로 하여 공산주의의 중앙집권성과 반대파에 대한 무관용을 문제 삼았다. 이들은 공산주의 역시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의 하나일 뿐이라고 인식하면서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한편 자유주의 · 기독교에 기반하고 있는 미국의 반공주의에는 조금 특수한 경향이 드러나는데, 1920년대부터 나타난 미국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를 이론적 틀에서 비판하려 하기보다는 ‘비 미국적 사상(Un-Americanism)’으로 낙인찍고, 이를 기피하고자 하는 ‘적색 공포(Red Scare)’ 현상으로 표출되었다. ‘적대’와 ‘부정’의 논리가 중심이 된 미국의 반공주의는 1950년대의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이어졌다.

한국 반공주의의 내용을 살펴보면, 20세기 초중반까지 나타났던 미국 반공주의와 그 구조적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반공주의가 특정 사조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자파(自派)의 주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기보다는 반공의식이 애국심과 연결되어 개인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측정하고 국민의 자격 유무를 판별하는 양상으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특히 6 · 25전쟁 발발 이후부터는 그러한 경향이 강해졌는데, 이 시기 한국사회에서의 공산주의란 북한체제의 동의어로써, 용공 행위는 이적 행위와 다름없는 행위로 인식되었고, 반공의식의 유무는 한국 사회에서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한편 서구 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의 주된 유포자였던 기독교 세력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반공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한국 기독교계의 반공주의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비판하였다기보다는 공산주의를 기독교적 이원론 하에서 악의 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북한 체제의 비판 · 대한민국 체제 옹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족주의 역시 한국 반공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반공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는 민족의 개념을 혈연적 유대감은 물론 이념적 유대감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변모시켰다. 이 같은 민족 개념의 변형은 1946년 초의 신탁통치 파동 당시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기 우파 반공주의자들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비판 논리가 주로 ‘친소=반민족=매국’의 등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냉전 시기 북한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괴뢰’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를 이민족의 앞잡이로 인식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공산주의자는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며, 오직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민족의 진정한 정부라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이전 시기 서구에서 등장했던 파시즘의 반공주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1960년대 후반의 국가 주도 반공주의 담론 내부에 가미되어 있는 근대화 논의도 한국 반공주의의 한 특성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 근대화론의 근거 중 하나가 근대화를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그로 하여금 공산주의와 대결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구의 반공주의와는 구분되는 한국 반공주의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도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도덕 · 윤리적 영역에서 발견되는 반공주의이다. 여순사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일컬어 “한 하늘 아래 두고는 같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지칭한 데서도 드러나듯 공산주의자에 대한 윤리적 비판은 6 · 25전쟁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6 · 25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공산주의자들은 반공 매체에서 가족, 친구보다 사상을 우선시하는 냉혈한으로 그려지곤 했는데,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이 같은 형상화는 유교적 가치관 하에서 패륜적 행위로 비판받았다. 도덕적 가치관으로써의 반공주의는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이후 더욱 강화되어 정규 교육과정 하의 윤리교과서에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되기도 하였다.

현황

현재 반공주의가 한국 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냉전 시기보다 크게 축소되었다. 구 공산권 국가의 대부분이 몰락한 오늘날, 실질적인 반공주의의 적대 대상은 북한만이 남겨져 있는 상황이지만 고전적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반대의 논리인 반공주의가 이론적으로 북한 사회를 비판할 근거가 될 수 있는지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즉 반공주의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는 사조를 일컫는 용어이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 잔존하고 있는 반북 감정을 모두 반공주의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상황은 오늘날 반공주의가 처해 있는 난관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반공주의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그 이념적 영역에서의 상대적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막대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부터 한국 정부의 고위층은 한국의 국가정체성을 ‘반공’이라고 인식하였으며, 이어진 공산주의 국가와의 전쟁 경험은 국가적 ‘반공’의 기조 하에 전 국민이 사실상 하나의 이념으로 결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같은 결속력은 한국 근대화의 한 원동력이기도 했던 만큼 그 긍정적인 역할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대를 용납지 않는 한국 특유의 반공주의로 인해 한국 사회는 시민 사회와 정치적 공론장의 형성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국가에 의해 주입된 반공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이해관계가 아닌 윤리적 선악의 영역에서 다뤄졌기 때문에 이에 어긋나는 행동은 옳지 못한 일로 판별되었다. 그 결과 반공주의는 한국의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으며, 반공의 이름으로 시민 사회에 대한 탄압이 행해지는 등 부정적 측면도 존재하였다.

참고문헌

『반공의 시대: 한국과 독일, 냉전의 정치』(김동춘, 돌베개, 2015)
『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1950년대, 반공·동원·감시의 시대』(김득중, 선인, 2007)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강인철, 중심, 2007)
『희생양과 죄의식: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강준만, 개마고원, 2004)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역사비평사, 2002)
집필자
박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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