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

박정희
박정희
정치
인물
해방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제5, 6, 7, 8, 9대 대통령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가.
이칭
중수(中樹)
이칭
다카키마사오[高木正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7년
사망 연도
1979년
본관
고령(高靈)
출생지
경상북도 구미
관련 사건
4·19혁명|2·27선언|6·3사태
정의
해방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제5, 6, 7, 8, 9대 대통령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가.
개설

본관은 고령(高靈). 창씨개명한 이름은 다카키마사오[高木正雄], 호는 중수(中樹). 경상북도 구미 출생.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한 다음,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 군문에 들어갔다. 당시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하여 혈서를 썼으며, 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犬馬の忠]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 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滿洲新聞)』(1939. 3. 31. 7면)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광복 후 1946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되었다. 6·25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5년 제1군참모장, 1960년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 제2군부사령관으로 재직중, 군부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던 1949년, 사상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순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육군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운동으로 복역은 면제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당하였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뒤 현역으로 복적되었다.

1950년 육영수(陸英修)와 결혼하였다.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8년5개월간을 집권하였는데, 그의 통치시대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4·19혁명으로 성립된 민주당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장교들은 쿠데타 성공 후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 삼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이를 통해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그 의장은 박정희였다. 이로부터 2년 7개월간 군정이 실시되는데, 최고통치권자인 최고회의의장 박정희는 먼저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라는 목표 아래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해체를 포고하는 한편, 용공분자와 폭력배의 검거에 착수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그 해 말까지 3,000여 명의 용공분자와 4,000여 명의 폭력배를 체포하였다.

군사정부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였으며 부정축재자에 대한 가차없는 조사를 실시하였다. 사회기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댄스홀·고급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으며, 비밀댄스홀에서 춤을 즐기던 남녀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년 6월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쿠데타 1개월이 못 되어 전국적으로 보안관계 범법혐의자의 검거수만도 3만 5,000여 건에 달하였다는 사실은 군정 초기에 얼마나 철저한 구악일소작업과 강력정치가 진행되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군사정부는 국민운동본부를 설치, 생활간소화·가족계획·문맹퇴치사업을 벌이는 한편, 친선방문외교·초청외교 등 적극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군정 초기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에 주도권쟁탈전이 벌어져 일련의 반혁명사건이 꼬리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파는 완전히 거세되고 박정희 중심의 주류세력이 실권파로 정권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군정 후반은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으로 전국이 소란하였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이양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 1월부터 시작된 정치활동재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그 사이 군정은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저질러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대통령취임사를 통해 박정희는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3공화국의 박정희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일국교정상화였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기간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확립을 위한 기반구축을 목표로 한 제1차 5개년계획은 당시 후진국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하였다. 그러나 계획 자체의 졸속과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부족으로 제1차 5개년계획은 전반적으로 실적미달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대일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이미 군정기간인 1961년 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 한·일회의가 열렸다.

이와 함께 실무교섭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박정희는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일본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일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다. 이같은 대일자세는 ‘친일외교’·‘흑막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박정희정부의 대일저자세시비는 제3공화국 의회 벽두에 대통령국회출석결의안 등으로 논란될 만큼 국민의 대일감정을 자극하였다.

특히 한국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문제와 이른바 ‘김·오히라메모(金·大平memo)’로 결정된 6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여론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한·일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국민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일으켰으나 박정희정부는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일을 성사시켜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수출드라이브·산업기지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이와 함께 점차 독재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개헌으로 나타났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야당과 재야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대두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로써 탄압하였다. 유신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당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여론도 한국의 강압정치를 비난하였으나 박정희는 굽히지 않았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황금만능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한편,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국가안보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한 것은 박정희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박정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간 밀사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민주항쟁이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하였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참고문헌

『박정권18년 그 권력의 내막』(이상우, 동아일보사, 1986)
『국가와 혁명과 나』(박정희, 향문사, 1963)
『오·일육군사혁명사』(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1962)
집필자
이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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