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충청남도 공주 출신. 경성법학전문학교 3년을 수료한 뒤, 화신산업(和信産業) 간부로 일하였으며 중앙신문사(中央新聞社)를 경영하는 등 일찍부터 사업가로서 활동하였다.
동아해상주식회사(東亞海上株式會社)를 설립, 대표취체역을 맡는가 하면,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 취체역의 책임을 맡았다. 광복 후 민주의원(民主議院) 이승만 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관록에 힘입어 정계 막후에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고향인 공주에서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출마, 당선되었으나,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여당인 자유당으로 옮겨 당선되었고, 4·19혁명 뒤인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다시 야당인 민주당(民主黨)으로 돌아와 당선되었다.
그는 정계에서 수수께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8·15광복 직후 미군정시절에는 미국측과도 널리 사교하였는데, 당시 하지(Hodge, J. R.)중장은 그를 가리켜 ‘영어를 못하면서도 외교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구한민당에서 자유당으로 옮겨 이승만과 가까이 있을 때는 수많은 외화혜택으로 재산을 축적하였다. 1958년 ‘2·4파동’ 직후 국회에서 야당이 범칙물자사건(犯則物資事件)을 추궁할 때, 그는 자유당 소속이면서도 야당에 대정부공격의 자료를 제공하여준 것으로 소문났다.
구왕실에 특히 관심을 가져 윤비(尹妃)가 부산으로 피난하였을 때부터 정부의 눈을 피해가면서 왕실에 재정원조를 해주었고, 특히 일본에 있던 영친왕(英親王: 이름은 李垠)에게도 많은 후원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