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규 ()

소선규
소선규
정치
인물
서울특별시부시장, 국회의원, 초대 참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3년(고종 40)
사망 연도
1968년
출생지
전라북도 익산
관련 사건
5·16군사정변
정의
서울특별시부시장, 국회의원, 초대 참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개설

전라북도 익산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1929년 일본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福島高等商業學校) 졸업. 1946년 미군정 하의 서울특별시부시장을 역임하였다.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후보로 전라북도 익산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 뒤 1956년 제3대 민주당(民主黨)국회의원, 1960년 4·19혁명 후의 초대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출마, 초대 참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5·16군사정변 후인 1963년의 선거에서는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 전국구후보로 당선되는 등 줄곧 야당의 길을 걸어온 4선의원이었다. 야당의 경제통이었으며 정당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거의 무소속으로 출마하던 1950년의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국당(民國黨) 간판을 내걸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았다.

당시 김성수(金性洙)·신익희(申翼熙) 등이 영도하던 야당인 민국당의 원내의석은 25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날카로운 직관과 독설로 투사형 야당인상을 세웠다.

4·19혁명 후의 7·29선거 때는 김도연(金度演)·유진산(柳珍山) 등과 함께 총선거 후의 신구파 분당론을 제창하였다. 그는 4·19혁명의 물결을 타고 거대 여당으로 등장할 민주당은 두 개로 나누어 보수양당제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나서도 정당정치를 위한 보수양당제의 기틀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후세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거 후 민주당은 그가 주창한 대로 신·구로 분당되었으며, 5·16군사정변 후 한동안 정치활동을 중단당하였다가,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야당이 난립되었을 때는 김준연(金俊淵) 등과 함께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 창당을 주도하였다.

제6대 국회 초 야당통합의 바람속에 민정당(民政黨)과 자민당(自民黨)·민주당(民主黨)과 국민의당이 4당통합을 서두를 때 이를 외면, 한동안 무소속으로 남았다가 뒤에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에 참여하였다.

한일협정(韓日協定)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아 필요하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에서 보이듯이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평소의 지론이었다. 제6대 국회에서 많은 정치적 상처를 입은 그는 그 뒤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참고문헌

『역대국회의원총람』(한국국회인물사편찬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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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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