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출생.
1929년 일본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福島高等商業學校) 졸업. 1946년 미군정 하의 서울특별시부시장을 역임하였다.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후보로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 뒤 1956년 제3대 민주당(民主黨)국회의원, 1960년 4·19혁명 후의 초대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출마, 초대 참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5·16군사정변 후인 1963년의 선거에서는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 전국구후보로 당선되는 등 줄곧 야당의 길을 걸어온 4선의원이었다. 야당의 경제통이었으며 정당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거의 무소속으로 출마하던 1950년의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국당(民國黨) 간판을 내걸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았다.
당시 김성수(金性洙) · 신익희(申翼熙) 등이 영도하던 야당인 민국당의 원내의석은 25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날카로운 직관과 독설로 투사형 야당인상을 세웠다.
4·19혁명 후의 7·29선거 때는 김도연(金度演) · 유진산(柳珍山) 등과 함께 총선거 후의 신구파 분당론을 제창하였다. 그는 4·19혁명의 물결을 타고 거대 여당으로 등장할 민주당은 두 개로 나누어 보수양당제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나서도 정당정치를 위한 보수양당제의 기틀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후세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거 후 민주당은 그가 주창한 대로 신 · 구로 분당되었으며, 5·16군사정변 후 한동안 정치활동을 중단당하였다가,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야당이 난립되었을 때는 김준연(金俊淵) 등과 함께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 창당을 주도하였다.
제6대 국회 초 야당통합의 바람속에 민정당(民政黨)과 자민당(自民黨) · 민주당(民主黨)과 국민의당이 4당통합을 서두를 때 이를 외면, 한동안 무소속으로 남았다가 뒤에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에 참여하였다.
한일협정(韓日協定)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아 필요하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에서 보이듯이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평소의 지론이었다. 제6대 국회에서 많은 정치적 상처를 입은 그는 그 뒤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