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은 기존의 규범과 가치, 제도 및 체계 등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반대로 그 변화에 대항하는 다수의 개인들이 모여 공유된 신념, 정체성, 이해관계를 토대로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집합적 행위이다. 사회운동은 사회변동의 산물이자 원인으로서,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여 자기 변형을 지속해 왔다. 사회운동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는 사회변동의 구조적 쟁점과 사건사적 맥락 그리고 운동의 결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사회운동은 사회구조와 지배 권력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비제도적인 저항을 의미하였다. 기존의 억압적인 체제 안에서 합법적인 수단으로 불만을 해결하거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었던 저항자들은 제도권 바깥에서 권력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는 집합적 도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구질서와 신질서가 뒤섞이기 시작한 근대화의 기로에서 국가 권력의 정치적 억압과 시장 권력의 경제적 착취에 대항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계급적 변혁 운동이 전통적 사회운동의 원류를 형성하였다.
한편, 19세기 말 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 개척 경쟁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남아메리카 등지의 이른바 제3세계 주변부 국가들에서 민족 해방 운동을 촉발시켰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될수록 주변부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이 심화되었고, 이에 대항하여 식민 지배에 예속된 민중들의 반제국주의적 및 탈식민주의적 열망이 민족주의적 해방 운동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계급적 변혁 운동과 민족적 해방 운동은 거대한 사회변동의 산물이자 사회 변화를 고무하는 전통적 사회운동의 전형을 이루었다. 그런데 격변하는 근대화의 기류에서 사회구조와 사회적 관계가 복잡다단하게 분화함에 따라 기존의 이데올로기나 사회 세력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의 동원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사회운동은 시민 사회에서 다양한 수준의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분화와 종적 및 횡적 재편을 거듭하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 사회운동은 체계적인 유형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원적이며 다층적인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운동은 사회 문제로 인식되는 다양한 갈등적 현안들에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시민 사회의 집합적 노력을 의미한다. 정치개혁운동, 경제정의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평화운동, 교육운동, 주거권운동, 소비자운동, 장애인운동, 소수자운동, 이주민운동 등은 시민 사회의 분화와 맞물린 사회운동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회운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시민 사회의 유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은 사회구조의 갈등적 균열 상태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의 성격을 가늠하는 척도이며, 더 나아가 기득권을 가진 엘리트 집단의 문제 해결 능력과 민주주의의 품질을 견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평가 기준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이후 한국의 사회변동은 끊임없는 민중 봉기와 저항적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사회구조의 모순과 봉건적 신분 질서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특히 1862년 단성에서 촉발하여 진주를 거쳐 전라, 경상, 충청의 삼남 지역으로 확대된 임술민란은 과중한 조세 부담과 관료의 불법적 약탈에 항거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 민중의 분노가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한 최초의 격렬한 투쟁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임술민란은 민란의 시대를 개막하는 상징적 사건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의미 있는 개혁의 성과를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갈수록 심해지는 중간 관료들의 수탈로 농민층은 극한의 궁핍으로 내몰려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농민 봉기의 폭발적인 증가는 개항 이후 사회 체계 전역에 걸쳐 봉건 질서의 구조적 모순과 왜곡이 명백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 민란의 시대를 정점에 끌어올린 역사적 저항 사건이 바로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발화하기 시작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가혹한 봉건적 수탈과 폭정에 대항하는 한편, 신분제에 의한 차별의 폐지를 주장하는 평등주의적 지향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전쟁 내지는 혁명으로 규정될 정도로 격렬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냈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일본군과 합작한 정부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지만, 신분제 철폐를 단행한 갑오개혁뿐만 아니라 항일 의병투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향후 3·1운동의 정신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35년간 사회운동의 질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식민 통치에 맞서 주권을 회복하려는 민족 해방 운동을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이는 문호를 개방하고 한일합병에 이르는 30여 년간 사회운동이 당면했던 목표, 즉 반외세와 반봉건의 근대 국민 국가 건설 전략이 식민 통치에 대응하여 변형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항일 의병투쟁, 독립협회운동, 애국계몽운동 등이 남긴 서로 다른 저항의 유산을 민족 해방 운동으로 재구성하고 재활성화한 측면이 컸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합방 이전부터 정부가 「보안법」(1907)을 제정하여 공포하게 함으로써 저항에 대한 합법적 억압 조치를 마련하였고, ‘남한대토벌작전’(1909년)을 통해 항일 의병활동을 근절하고자 하였다.
합방 이후 일본의 무단 통치로 인해 항일 저항의 열기는 더욱 달아올라 전국적인 3·1운동과 만주 및 연해주 지역의 무장독립운동으로 번져 갔다. 그러나 3·1운동 직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민족 해방 운동은 여러 갈래로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3·1운동에 대거 참가했던 노동자와 농민층의 정치의식이 고양되면서 식민지 지배 세력에 저항하는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지만, 동시에 일본의 식민 통치 전략에 대항하는 민족 해방 운동의 전략은 갈수록 이념적 또는 조직적으로 통합체를 형성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그렇게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의 민족주의적 및 사회주의적 분화는 해방 이후 극심한 이념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주어진 해방의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소련군과 미군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한 완충 지대로서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여전히 독립 국가로서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식민 통치에서 신탁 통치로, 식민지 체제에서 분단 체제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그리고 소련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세력과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세력 사이의 혼란스러운 노선 갈등과 좌우익 세력 사이의 격화된 투쟁이 벌어지는 해방 공간의 모순에 휩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심화된 민족 해방 운동 내부의 이념 대립은 해방 정국에서 분단 체제 형성의 대내적 조건이자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미군정하의 해방 정국이라는 모순적 상황에서 좌우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남북의 대립 구도에서 남한 사회 내부로 빠르게 옮겨졌다. 그런 가운데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민중 저항으로 기록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이 발생하였다. 높은 물가와 식량난으로 가중된 노동자들의 불만이 부산에서 철도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으로 이어졌고, 주요 산업의 노동자 25만 명이 연달아 파업에 동참하면서 미군정의 정책 실패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뒤이어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하자, 대구와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3백여 만 명이 참가해 수많은 희생자를 낸 10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과 우익 세력의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반공이냐, 친공이냐’하는 새로운 갈등의 축을 중심으로 첨예한 이념적 및 정치적 대결이 펼쳐지는 가운데, 북한은 1946년 3월 토지개혁 단행을 시작으로 북조선노동당 결성, 조선인민군 창설, 헌법 채택,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등을 실시하면서 정치적 평정을 공고히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남한에서도 1948년 5월 총선거 이후 국회를 구성해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단독 정부 수립을 공식 선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주 4·3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저항 세력과 이를 탄압한 반공 세력 사이의 강한 충돌이 일었다. 그러나 결국 제1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남한 내 좌익 세력은 완전히 해체되어 없어지고 반공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회운동은 이념의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해방 이후 우익 세력은 이승만 정권의 수립 과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막강해졌다. 반공주의 일색의 정치 사회 질서에서 사회주의 운동뿐만 아니라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쓴소리를 내는 중도 좌파나 민족주의 세력, 심지어 힘없는 무고한 양민조차도 이른바 ‘빨갱이’로 둔갑되어 모진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친일 반공 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 갖은 불법과 국가 범죄를 자행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 정권에 대한 누적된 불신과 불만을 배경으로 ‘좌익 없는 사회운동’의 대중적이고 전국적인 분노가 1960년 3·15부정선거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의 시위로 점화된 4월 혁명이 전국의 모든 계층으로 들불처럼 확산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월 혁명은 표면적으로는 부정 선거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본질은 1950년대를 관통하면서 켜켜이 쌓인 민중들의 생활 경제에 대한 위기의식과 약탈적 독재 권력에 대한 총체적 불만에 가까웠다. 4월 혁명이 열어 놓은 정치적 공간에 사회운동은 또 다시 재편기를 맞이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록 정치권력의 지배 구조는 4월 혁명의 열기를 흡수하지 못하였지만,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이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4월 혁명으로 부활한 혁신 세력들도 거듭된 선거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정치 세력화를 시도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활력과 혁신 세력의 정치적 도전은 1961년 박정희 군부 세력의 5·16 쿠데타로 중단되었다.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실망하여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 순간에 박정희가 내세운 ‘혁명 공약’은 대중적 공감대를 파고들었고, 혁신계 인사들조차도 쿠데타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법」, 「농어촌고리채정리법」,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 「혁명재판부조직법」, 「반공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을 잇달아 공포하면서 단기간에 권력 기반을 다진 박정희 군부 세력은 약속한 민정 이양 대신 민주공화당을 조직하여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최고 권력을 합법적으로 거머쥐었다. 그리고 1964~1965년에 걸쳐 학생운동이 주도한 한일회담 및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비상계엄령과 위수령 등으로 원천 봉쇄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적이고 비민주적인 실체가 드러났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민주화 운동이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 의원 선거가 치러지고 난 뒤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었고, 1969년에는 3선개헌안에 반대하는 야당 정치인들과 학생들의 거센 저항이 거리에서 분출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계와 종교계 그리고 법조계 인사들이 광범하게 연계된 재야 세력이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견인하게 된다. 특히 재야 세력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구도를 정립하면서 민주화 운동에서 정치적 지도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민주화 운동에서 학생 세력이 투쟁의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면, 재야 세력은 정치적 지도력을 구심으로 민주화 운동의 권력 자원을 모아내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운동은 유신 체제로 공포 정치를 제도화한 훨씬 폭압적인 박정희 정권과 대결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헌법의 긴급 조치 조항을 발동하여 독재 권력에 반대하는 시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사소한 움직임조차도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긴급 조치 시대에도 유신 반대 운동은 계속해서 정권을 흔들었다. 특히 공개적으로 유신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 세력은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어 가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과 변화에 대한 열망을 은밀하게 조직해 갔다. 또한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의식적으로 고양된 학생운동 출신의 운동가들이 노동 현장에서 계급 지향성을 강화하며 민주화 운동의 내벽을 두텁게 쌓아 가기 시작하였다.
20년 가까이 지속된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가 1979년에 이르러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하였다. 장시간 동안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누적된 노동자들의 고통과 불만이 YH무역 사건으로 폭발하였고, 그 여파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의원직을 박탈당하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불안이 증폭하였다. 게다가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민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며 박정희 정권의 위기를 정점에 치닫게 하였다. 벼랑 끝에 다다른 박정희 정권은 결국 10·26사건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독재의 종식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오래 가지 못했다. ‘80년 서울의 봄’이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좌절되면서 가라앉고, 5월 광주의 역사적 비극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 아래,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상흔 위에서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해 갔다. 특히 학생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살인적인 운동 탄압에 맞서 저항 폭력의 도덕적 정당성을 내면화하였고,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중심으로 급진적이고 계급적인 변혁 운동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전두환 정권의 성립 과정과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미국의 방관 또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종래 금기시되던 반미주의가 아래로부터 금지되던 것이 풀리어 반미운동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부문의 운동에서도 조직화와 의식화를 통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이 6월 민주 항쟁을 향했다.
한국의 민주화 이행에서 1987년 6월 민주 항쟁은 결정적인 국면으로 상정된다. 6월 민주 항쟁은 학생, 재야, 종교, 노동, 농민, 여성, 환경 등 기존의 운동 세력들이 총결집하고, 대규모의 시민들이 저항의 주체로 시위에 참가하면서 계급, 이념, 정치, 운동, 종교, 세대, 지역을 초월한 역사적 시민 항쟁으로 평가된다. 시민 항쟁은 전두환 정권이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서는 진압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만들어 결국에는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이끌어 냈다. 동시에 시민 항쟁의 열기는 7월부터 9월에 걸친 노동자 대투쟁의 운동 공간을 열어 주었다. 해방 이래 최대 규모로 전개된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 노조 운동이 사회운동의 중심적인 위치로 재설정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였고,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이 양적 및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사회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아 빠르게 재편되었다. 우선, 6월 민주 항쟁을 주도했던 범재야인사들이 제도 정치권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변혁적 민중운동의 전통을 이어가는 가운데, 노동운동 세력과 통일운동 세력으로 양분된 학생운동은 서서히 운동 지형에서 주변화되었다. 한편,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표를 뗀 빈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지역운동, 종교운동, 문화운동 등의 기존 부문 운동이 시민 사회에서 자율성과 다양성에 기반한 사회운동의 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9년 ‘이념 없는 초계급운동’을 기치로 한 경실련의 출현과 환경운동연합(1993년), 참여연대(1994년)의 잇따른 등장은 변혁적 민중운동에서 온건한 시민운동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가속화하였다.
19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에 이어 1998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시민 운동 단체들은 언론, 지식인, 법조인, 종교인, 그리고 중간 계급 시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제도적 성장과 전문적 분화를 거듭하였다. 시민운동은 과거의 사회운동이 경험하지 못한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운동 환경에서 가파르게 성장하였다. 반면, 노동운동은 시민운동의 놀라운 성장을 뒷받침한 다양한 운동 이슈와 합법적인 활동 방식, 무엇보다 언론의 호의적인 관심에 밀려 대중적 지지와 관심을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6월 민주 항쟁의 깃발을 노동자 대투쟁으로 넘겨받은 노동운동은 민중운동의 급격한 퇴조와 시민운동의 비약적인 성장 사이에서 시민 사회의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결국 노동운동은 시민운동과의 의도치 않은 경쟁에서 밀리고, 운동 의제마저 선점당해 위축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절정에 오른 국면에서 위기론이 대두하였다. 그것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에 대한 냉혹한 평가와 결부되었다. 최대 1,104개의 시민 사회단체가 이름을 올린 총선시민연대는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인 낙천 · 낙선운동을 전개하였다. 낙천운동과 낙선운동은 사회운동이 제도 정치권을 공식적으로 압박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개혁운동으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정당 공천과 선거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총선 시민연대는 보수 세력으로부터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비판을 받으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특히 낙천 · 낙선운동이 일부 영향력을 가진 시민 단체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시민 참여와 의사 결정이 분리된 구조에서 소수의 전문가와 운동 지도부에게 의결권이 주어져 시민의 참여는 주변화되었다는 비판이 시민운동 안팎에서 제기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19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의 성장과 위기를 함축하는 표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에 시민운동은 다시 시민과의 접점을 넓히며 주체적 참여를 이끌어 내고자 여러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가운데 지역을 거점으로 시민운동의 주체를 뿌리내려 삶의 문제를 시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자는 풀뿌리운동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시민운동은 시민 자치, 교육, 보육, 환경, 문화, 소비, 주거, 여성, 노동 등을 망라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풀뿌리운동의 상상력을 실험해 갔다. 시민의 직접 참여를 통한 운동 주체의 형성이라는 풀뿌리운동의 핵심 가치가 생활 영역에 스며들면서 다양한 삶의 이슈들이 운동 이슈로 빠르게 변환될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을 촉진한 인터넷과 온라인 공론장도 언론의 관심이 사라진 시민운동의 중요한 소통과 동원의 창구로 적극 활용되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는 온라인 공론장을 매개로, 유연하고 자발적인 비판적 공중이 풀뿌리운동으로 동원되어 표출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였다. 2000년대 들어 사회운동이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서 ‘시민 단체 없는 시민운동’으로 자기 변형을 하고 있다는 낌새는 이미 2002년 미군 장갑차 사망 사고 추모 촛불 집회,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 집회에서도 나타났지만, 2008년 촛불 집회처럼 기존 사회운동 조직을 매개하지 않으면서도 6월 민주 항쟁을 연상시킬 정도의 대규모 저항으로 분출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촛불 집회는 자기 결정권을 갖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새로운 운동 참여, 즉 사회운동의 개인화 혹은 네트워크화된 탈조직적 사회운동의 본격적인 출현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고, 그렇게 사회운동은 집합적 행위에 관한 기존의 논리를 넘어섰다.
다른 한편, 2000년대 들어 사회운동의 지형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이념적 지형 변화는 2004년 이후 ‘뉴라이트’의 조직적인 출현으로 촉발되었다. 뉴라이트 계열의 운동 단체들은 수구 이념을 대체하는 합리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학계, 종교계, 언론계, 법조계, 의료계 등에서 활동하는 범보수 진영의 지식인들이 주도하여 조직되었다. 특히 뉴라이트 운동에 과거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일부 참여하면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모아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5년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창설되면서 뉴라이트 운동은 기존의 사회운동 지형에 보수적 시민운동의 독자 영역을 빠르게 구축해 갔다. 이후 뉴라이트 운동은 진보운동의 대항 운동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시민 사회에서 보수 운동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보수 권력의 장기 집권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민 사회에서는 보수와 진보로 양분된 이념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그 와중에 2016년~2017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 집회는 보수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동안 구조적 차원에서 억눌려 온 시민의 분노와 변화에 대한 열망이 일련의 촉발 사건들을 거치며 하나로 모아졌고, 결국에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운동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촛불 집회는 전국의 광장에 모인 대규모 시민들이 평화롭게 이룩한 가장 진보적인 성취로 평가되면서 촛불 항쟁 또는 촛불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촛불 집회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층 더 발전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토론이 요구된다. 사회운동이 민주주의와 함께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화 이후 사회운동의 변화와 그 궤적을 돌이켜보면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의 질문에서 나오는 진부한 답변 대신, ‘왜 민주주의인가?’,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되묻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