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민란은 1862년(철종 13)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전쟁이다. 진주 부근의 작은 고을 단성에서 시작된 농민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전역으로, 4월에는 전라도로, 5월에는 충청도로 확산되었다가 제주를 포함한 전국 70여 개 고을로 번졌다. 삼정문란 등 농민에 대한 억압 수탈의 심화가 원인이었다. 조정에서는 선무사·안핵사·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총체적 실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삼정이정책을 마련하였으나 실질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곧 옛 제도로 환원되고 말았다. 그러자 9월에 다시 민란이 일어났고 이후 대원군·민씨 정권 아래에서도 계속되었다.
1862년 농민항쟁은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70여 개 고을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일어난 곳은 2월 4일 진주 바로 위쪽에 있는 작은 고을인 단성이었다.
단성으로부터 시작된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4월에는 전라도로, 5월에는 충청도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조세문제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자 항쟁이 수그러졌다가 정부가 개혁을 시행하지 못하자 다시 터져 나왔다. 9월부터 제주지역,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및 몇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농민항쟁이 발생한 주요한 원인은 삼정문란(三政紊亂)을 비롯한 봉건정부와 관리의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또 항쟁 과정에서 고리대나 고을의 소작료를 통해 지역 내 농민수탈에 앞장섰던 토호양반 · 지주 부호가가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농민층 분해에 따른 계급대립이 농민항쟁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농민항쟁 발생의 핵심 원인이었던 삼정문란은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으로 조성된 봉건해체기의 사회모순이 응집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 조세는 삼정이라 하여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정(還政)에 의해 부과되었고, 이외에 잡세 · 잡역세(雜役稅)가 부과되었다.
전정은 오랫동안 양전이 실시되지 못해 애초에 정확한 조세부과가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해마다 풍흉에 따라 조세부담을 가감하고 조세 부담자를 모아 조세 납부조직을 만들기[作夫] 때문에 이 과정을 장악한 이서배(吏胥輩)의 농간이 심각하였다.
더구나 전결세에 각종 부가세가 붙어서 조세액이 크게 늘어났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도결(都結)을 실시해 전결세를 받고 바치는 과정의 중간 이익을 수령이나 향임(鄕任), 서리 등이 손쉽게 차지하였다. 군정은 군현별로 군역부담액은 고정되었는데 군역을 부담하는 양민(良民)은 계속 줄어들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환정은 애초 진대(賑貸)를 위한 환곡이 그 이자를 재정 확보에 이용하면서 환곡 액수가 크게 늘어나 관청 고리대로 전락하였다. 또한 환곡을 나눠주고 거두어들이는 과정에서 많은 폐단이 일어났고, 관리들이 중간에서 빼돌린 원곡을 민에게 추가로 부담시키는 일도 빈번하였다. 삼정 이외에도 농민들은 잡세와 잡역세를 부담하였다.
잡세는 포구세(浦口稅) · 시장세(市場稅) · 어장세(漁場稅) · 실점수세 등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주로 농업 이외 부문의 생산과 유통에 주로 부과된 조세였다. 잡세는 균역법에 의해 부분적으로 국가제도에 의해 수립되었으나 대부분 중앙관청, 궁방, 지방관청의 자의적인 수취에 맡겨져 있었다.
잡역세는 지방 재정분으로 충당하기 위한 조세인데 중앙정부의 통제 없이 마구 증대해 주요한 조세문제의 하나로 대두하였다. 결국 당시의 조세문제는 개별민의 조세부담능력에 따른 정확한 조세부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신분에 따른 조세부담의 차별이 존재했다는 점, 군현 내의 수령 · 향임 · 이서배 · 양반들이 결탁해 조세수취를 이용해 민(民)을 수탈했다는 점, 남의 조세부담 · 포흠(逋欠)까지도 공동 부담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조세문제는 관리들의 부정에 의해서도 발생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구조적인 요인이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은 조세부담자의 사회적인 처지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현저해 진주의 경우 당시 토지대장을 분석해 보면 6%의 지주가 44%의 농지를 소유했고, 63%의 농민이 겨우 18%의 농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자연히 농민들간에 담세 능력의 차이를 가져왔고, 담세 능력에 따른 정확한 조세부과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신분제의 변동양상은 울산지방의 경우 19세기 후반에 절반이상이 양반 신분으로 호적에 올라 있다. 이는 남아 있는 양민층에게 군역부담이 집중되는 것을 의미하며, 신분에 따라 부담에 차이가 나는 조세제도를 개혁할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더욱이 조세 수취방식이 일반조세의 경우는 군현 단위로 제정되면 민에게 조세를 부과하고 거두는 과정은 상당 부분 군현에 위임되었다. 이전에는 군현 내에서 지방의 사족층이 수령과 이서배를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방지배력이 쇠퇴하면서 수령과 이서배를 중심으로 한 민의 수탈을 견제할 세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이제 민이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정치구조의 변화가 절실히 요청되었다. 사회모순이 심화되고, 새로운 변화가 절실히 요청되는 이 시점에 민들은 사회모순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을 통해 민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독점한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판소리나 탈춤 등에는 관리와 양반의 지배를 벗어나 좀더 자유스럽게 살기를 원하는 민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농민항쟁은 농민들이 고을의 조세문제를 논의하면서 모의되기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대개 고을민들이 마을이나 고을단위로 조세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논의구조가 있었다. 고을단위의 논의는 주로 향회(鄕會)라는 고을 지배세력들이 모이는 기구에서 이루어졌지만 유사시에는 참가층이 확대되었다.
항쟁의 초기 논의과정은 향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민이 참여하는 경우와 민들이 논의를 제기해 각 마을에 통문을 돌리고 새로운 논의기구를 만들어내는 경우로 나뉘었다. 논의는 처음에는 고을 수령과 감영에 청원하는 등장(等狀)을 내자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시위를 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자는 쪽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양반들도 함께 모였지만 이들 대부분은 농민들이 논의를 주도하면서 과격한 방향으로 나가자 중간에 빠져 나오게 된다. 등장을 제기하고 시위하기 위해 읍내로 들어온 농민들은 수령을 고을 경계 밖으로 쫓아내고 관아를 부수고 이서배들의 집을 불태우거나 죽이는 활동을 벌였다.
농민들은 시위하고 돌아가는 과정에 그 동안 괴롭혔던 토호양반가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의 주된 공격대상은 이서배 · 향임층 · 양반가 · 부호가 등이었다. 초기에 일어난 항쟁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진주지역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주는 경상우도에서 제일 큰 고을이다. 지리산 기슭으로 토지도 매우 비옥한 편이었다. 반면 진주목과 경상도 우병영이 자리잡고 있어서 농민들의 부담이 많았다. 진주목과 경상도 우병영은 관원, 이서배의 포흠으로 없어진 환곡을 토지와 가호에 일률적으로 부담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유계춘(柳繼春) · 이계열(李啓烈) · 이명윤(李命允) 등의 주도아래 진주목과 병영의 부당한 조세부과에 대응하려는 모임이 1월부터 2월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첫 모의는 서쪽 축곡면에서 가졌다. 여러 차례의 모임 끝에 고을 전체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중집회를 가지기로 하였다.
2월 6일 수곡장터에서 열린 대중집회에는 여러 마을의 대표자들이 참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여기서 읍내를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마침내 2월 14일 농민항쟁이 시작되었다. 수곡 장시와 진주 서북쪽 덕산 장시를 장악한 농민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였다. 세력을 모은 봉기민들은 덕천 강변을 따라 읍내로 진출하였다.
18일 읍내 외곽에 봉기민들이 진출하자 진주목사는 조세문제를 시정하겠다는 약속문서를 내주었다. 19일에 농민들은 객사 앞 장터에서 집회를 가진 다음 병영을 공격하였다. 농민은 20일까지 읍내에 머물면서 진주목과 병영의 이서배 · 양반가를 공격하고 조세문서를 불태웠다.
농민들은 읍에서 물러날 때 몇 대열로 나누어 외곽으로 나가면서 평소 자신들을 수탈하고 부리던 토호들이나 대상인, 지주 · 관청기구를 공격하였다. 20일에서 23일까지 22개 면을 지나면서 수십 채의 집을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농민항쟁은 기본적으로 고을마다 개별항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봄철에 집중적으로 봉기하였다. 봄철은 바로 지난 가을에 매겨진 조세를 완납해야 하는 때로서 관아에서 조세를 받아들이기 위해 농민들을 들볶고 형벌까지도 서슴지 않는 시기였다.
그리고 어느 지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던 다른 고을 농민들도 ‘어느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일어나 문제를 해결했다더라. 우리도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봉기하였다.
또 정부에서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안핵사 · 어사 등을 파견하자 농민들이 이들의 고을 조사를 기회로 삼아 항쟁을 일으켜 이들의 순행지역에서 연속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항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지역별로 일어나는 시기나 항쟁의 유형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나타났다.
경상도 지역은 처음에 지리산 기슭인 단성 · 진주 · 함양 · 거창 등의 진주권에서 2∼3월 사이에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다음은 경상도 서북인 상주권에서는 상주 · 선산 · 개령 · 인동 · 성주 · 비안 · 군위 등에서 3∼4월 사이에 일어났으며, 두세 차례 일어난 읍도 여러 곳 있었다.
셋째로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울산 · 창녕 · 밀양 · 신녕 · 연일 · 현풍 등 경주권에서 일어났다. 이 가운데 경주 · 신녕 · 연일 · 창녕은 정부의 조세개혁 방안인 삼정이정절목(三政釐正節目)이 반포된 이후인 10월 경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경상도 지역은 경주 · 창원 · 상주 · 진주 · 성주 등 읍세가 큰 지역에서 주로 일어났으며, 안동권에 속한 고을 중 비안에서만 항쟁이 발생한 점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경상도에서는 단성 · 진주 · 개령 · 인동 등에서 사족들이 항쟁 초기에 참여하는 모습도 보여, 일부 세력 있는 양반들도 세도정권이나 지방관의 수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전라도 지역은 3월27일 익산지역을 시작으로 4월과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함평 · 고산 · 부안 · 금구 · 장흥 · 순천 · 강진 등 전라도 54개 군현 가운데 38여 곳에서 항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된다. 전라도는 삼남 가운데서도 가장 항쟁이 많이 일어난 지역으로서, 이 지역에서 첨예한 계급대립과 국가 수탈이 보다 격심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함평의 경우 농민들은 14개 면의 민들이 훈장, 면리임과 연계해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한달간이나 모임을 지속하는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충청도는 농민항쟁이 크게 위세를 떨친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점과 감영이 있는 공주와 병영이 있는 청주를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에서 대부분 일어났다는 점이 특징이다.
곧 공주와 그 관할에 속한 임천 · 은진 · 회덕 · 진잠 · 연산과 청주와 그 관할인 문의 · 회인 · 청안 · 진천 등의 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읍의 규모로 볼 때는 공주 · 청주 · 임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행정적으로 소읍인 현에서 일어났다. 서쪽의 내포지역에서는 한 곳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4월에 신창 · 온양 등지에서 명화적이 나타나서 병영이나 진영에서 명화적(明火賊) 체포를 위해 군대가 동원되는 등 통제를 심하게 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도 지역은 대부분 초군(樵軍)이라는 땔나무꾼, 일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항쟁을 일으켰다.
다른 지역은 공격 대상이 관아와 이서배에 집중된 데 비해 충청도는 오히려 토호양반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지역 양반들과 초군, 농민들간의 갈등이 그만큼 심했음을 말해준다. 삼남 이외의 기타 지역은 주로 가을에 들어서 일어났다.
당시 전라도에 속한 제주도는 9월부터 여러 차례 일어났고,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는 10월에 일어났다. 이들 지역의 항쟁은 제주도는 제주 · 대정 · 정의 세 고을만이 힘을 합쳐 이듬해 1월까지 끈질기게 항쟁을 벌인 점, 그리고 광주는 서울에 가까운 지역으로서 서울까지 와서 시위를 벌인 점 때문에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농민항쟁을 통해 농민들이 제기한 주요한 요구는 무엇인가. 농민들은 조세문제의 해결을 비롯해 봉건적인 억압과 수탈 제거를 직접 요구하고 또 행동을 통해 나타내었다. 항쟁과정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조목을 만들어 제시한 곳도 여러 곳 있었다.
경상도 내륙에 위치한 인동 역시 환곡의 포흠이 큰 문제였다. 관에서는 환곡 포흠을 농민에게 부과시키기로 하고 도결(都結)로 토지에다 배정하려 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항쟁을 일으키고 12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자료상 알려진 것이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① 이서(吏胥)의 포흠(逋欠)을 농민에게 징수하지 말라.
② 결가(結價)는 매결당 7냥 5전씩 하라.
③ 그간 도망했거나 죽은 군정(軍丁) 천여명을 장부에서 제외하라.
④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군보(軍保)를 1인당 2냥씩 하라.
①은 전주(田主)와 마찬가지로 이서가 착복한 환곡을 농민에게 징수하지 말라는 것이고, ②는 토지 1결당 부담량이 자꾸 높아지자 국가가 정한 1결 23두의 부담을 돈으로 환산한 액수인 7냥 5전 이상은 거두지 말라는 것이다. ③과 ④는 군역의 문제이다. ③은 평민들이 지는 군역 부담 총량을 줄여달라는 요구이다.
신분제의 변동으로 평민이 줄면서 군역 부담자가 자꾸 줄어드는데도 고을에서 내야 할 군역 총 부담량은 줄여주지 않아 남아있는 평민들의 군역 부담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④는 평민만이 군역을 지는 것은 부당하니 양반도 군역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내걸고 항쟁을 벌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요구사항이다.
한편 충청도 공주농민들은 네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봉기하였다. 그 가운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세미(稅米)는 항상 7냥 5전을 정해 거두라.
② 각종 군포(軍布)를 소민(小民)들에게만 편중되게 부담시키지 말고 각 호마다 균등하게 부담시키라.
③ 환곡의 폐단을 없애라.
④ 군액의 부족분을 보충하거나 환곡의 부족분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결렴(結斂)하는 제도를 폐지하라
①은 인동과 마찬가지로 전결세의 정액금납화를 요구한 것이고, ②는 신분에 따른 군역부담의 불균형을 해소하라는 것이다. ③은 환곡폐단의 시정요구이고, ④는 여러 가지 명목을 붙여서 전결세를 자꾸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1862년 농민항쟁에서 제기된 요구를 종합해 보면 전결세에 대해서는 무한정 높아지는 조세에 대해 1결당 조세부담을 고정할(정액금납화 요구) 것, 군역세에 대해서는 인징 · 족징, 신분차별을 폐지할 것, 환곡제에 대해서는 이서배의 포흠을 농민에게 부담시키지 말 것과 원곡 분급을 정지하고 순수하게 조세화 할 것 등이다.
농민들의 요구는 신분에 따른 조세 차별의 혁파, 규정에 없는 조세증대 금지, 중간수탈의 금지, 조세 부담능력에 따른 조세부과 등으로 요약된다. 농민들은 이처럼 직접 요구조건을 만들어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고을 조세운영을 담당해온 수령 · 향임 · 이서배 · 양반층을 공격하고,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읍의 권력을 장악해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조세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조세문제와 같이 분명하게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중세사회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요구도 다양한 부면에 걸쳐 제기되었다.
농민항쟁의 주요한 참여층인 초군들은 사대부가의 산림광점을 금하라는 요구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요구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농민항쟁의 참여자 가운데는 억울한 재판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태신(笞訊)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재판과 형벌이 수령이나 지배층의 농민수탈의 무기가 이용되는 데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 토호양반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많이 나타나 양반들의 억압과 수탈을 벗어나기를 원하는 농민들의 바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농민들의 조세개혁의 요구는 물론이고 농민들의 다양한 불만과 개혁 요구는 조선 정부로서는 세제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한 쉽게 들어주기가 어려운 내용이었다. 먼저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였다.
먼저 봉기지역에 중앙관리를 파견해 사태를 조사하고 수습하도록 하였다. 진주에 박규수(朴珪壽)를 안핵사로 파견한 뒤 농민항쟁이 각지로 번져나가자 도별로 안핵사 · 선무사 ·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경상도에는 선무사 이삼현(李參鉉), 안핵사 윤태징(尹台徵),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 · 박이서(朴彛敍) · 임승준(任承準)을, 전라도에는 안핵사 이정현(李鼎顯), 선무사 조구하(趙龜夏), 암행어사 조병식(趙秉式) · 이필선(李弼先) · 조성교(趙性敎) · 김원성(金遠聲)을, 충청도에는 암행어사 김익현(金翼鉉) · 정기회(鄭基會)를, 그리고 제주도에는 안핵사 이건필(李健弼), 함흥에는 안핵사 이삼현을 파견하였다.
정부는 처음에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고 항쟁 주모자의 처벌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5월 들어 봉기가 삼남지역으로 확산되자 크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봉기주모자를 먼저 참수하고 보고하도록 하는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세문제가 수령 한 개인의 탐학, 어떤 한 고을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고 제도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4∼5월 안핵사 · 선무사 · 암행어사들의 보고, 접견을 통해서 삼정의 문란상황, 농민항쟁의 요인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5월 25일부터 조세개혁을 위한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책문을 내려 널리 조세폐단에 대한 개혁안을 구하는 등 삼정이정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이 삼정이정책을 지어 바쳤다.
이는 이정청에 보내져 이정청의 이정절목 마련에 참고가 되었다. 그 내용은 삼정 운영상의 폐단을 개선하자는 것으로부터 동포제(洞布制)를 실시하거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자고 하는 등 부분적인 제도개혁을 제안하거나, 한 걸음 나가 농민들의 담세 능력 자체를 제고하기 위해 지주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기한 부류도 있었다.
정부는 윤8월 19일에 삼정이정책을 발표하였다. 이정책의 내용은 전결세와 군역세 문제는 운영과정의 폐단을 제거하는 정도였고 가장 중요한 개혁은 환곡제도를 혁파한다는 것이었다. 군정의 경우는 이전의 군역제를 그대로 시행하거나 마을민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제도(동포제) 중 지역민이 원하는 대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동포세의 경우도 마을에서 부담해야할 군역부담을 마을민이 원하는대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특히 동포세는 마을의 군역부담을 마을민이 공동으로 부담해야 되므로 군역세의 신분적 차별을 완화시키는 내용이었다. 전정은 양전 해야한다는 원칙론만 제기하고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환정에 대해서는 환곡이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그 동안 환곡세로 담당하던 재정부분을 전결에 옮겨 받도록 결정하였다. 결국 정부가 마련한 삼정이정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농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던 환곡을 없애고 환곡이 담당하던 재정분은 전결세에 덧붙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절목이 반포된 뒤 환곡에 재정을 의지하던 아문에서 반대를 하고, 농민들도 정부가 환곡제도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이전에 이서배가 중간에서 가로챈 환곡 원곡을 농민들에게서 회수하려고 하자 반발하였다. 결국 정부는 10월 29일 삼정이정책의 실시를 포기하고 “옛날의 규례로 돌아간다.”는 명령을 내렸다.
정부안에서도 좌의정 조두순(趙斗淳)만 삼정이정책의 실시에 적극적이었을 뿐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나 안동 김씨의 실권자 김흥근(金興根) · 김좌근(金左根) 등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자신들이 마련한 조세개혁마저도 실현하지 못하고 옛 제도로 환원시키고 말았다.
대신 정부는 원성이 가장 높은 환곡제 운영에서 허류(虛留) 환곡을 대대적으로 탕감하는 조처만을 취하였다. 이후 조선정부의 긴급한 재정적인 필요에 따라 원곡을 끌어다 쓰는 일이 생기는 등의 사태로 인해 소멸되어 갔다. 기본적으로 농민들의 요구나 삼정이정책에서 제시된 환곡제 폐지의 방향이 관철되어 나간 것이다.
하지만 1862년 농민항쟁에서 나타난 농민들의 조세문제에 대한 불만과 개혁의 요구는 조세제도 개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9월부터 제주지역,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몇몇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다시 일어났다. 이후 대원군 정권, 민씨 정권 하에서도 농민항쟁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862년 농민항쟁은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처럼 군사적 행동으로 정권이나 국가를 타도하려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평안도 농민전쟁에 비해 훨씬 많은 지역에서 일어났고, 농민이 좀더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시켜나갔다는 점에서 평안도 농민전쟁 보다 발전된 형태이다.
1862년 농민항쟁은 주로 고을단위로 고을의 조세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수령에게 청원하거나 시위하는 형태 등으로 전개되었다. 항쟁의 초기단계부터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모의하고 주도한 경우가 많았으며, 요구도 훨씬 구체적이었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처지에서 당시의 조세 수취제도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던 점은 정치적 주체로서 농민들이 스스로 각성하고 단련해가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