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정석증(鄭錫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계순(鄭啓淳)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정동만(鄭東晩)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계락(金啓樂)의 사위로, 이조판서 정기세(鄭基世), 목사 정기년(鄭基年), 부사 정기명(鄭基命) 등의 아들을 두었다.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부응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21년 서북 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덕완군(德完君: 뒤의 철종)을 영립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궤장(几杖)을 받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의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다시 정계에 나섰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 출신으로 20여 년 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저서로 『경산집(經山集)』 40권과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촬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