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 ()

목차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끼니를 이을 수 없어 남의 집에 기식(寄食)하며 그 집주인[雇主]의 부림을 받던 사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끼니를 이을 수 없어 남의 집에 기식(寄食)하며 그 집주인[雇主]의 부림을 받던 사람.
내용

경제적으로는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였지만, 신분상으로는 양인으로 자유민이었다.

고주에 의해 양여(讓與) 또는 매매, 상속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특정한 고공을 제외하고는 고주의 집을 마음대로 떠날 수도 있었다. 또 원칙적으로 군역의 의무도 지녔던 사람이다.

고공이라는 용어는 15세기 초 조선이 중국의 명률(明律 : 大明律)을 형정(刑政)에 받아들이면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에는 명률에서 뜻하는 고공, 즉 일정한 기간과 임금을 작정하고서 고주의 집에 기식하며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무임금의 노동 인구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말로는 ‘더부살이’나 ‘머슴’으로 일컬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것이 고공이라는 명률의 한자로 표현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은 고공, 즉 ‘앙역무안고공(仰役無案雇工)’이라고 표기할 수 있는 고공 외에도 국가가 역리(驛吏)에게 급보(給保)의 형태로 정해준 ‘역리고공’과, 함경도의 향리·토호들에게 사역인(使役人)으로 정해준 ‘세전관하(世傳管下)’라는 예속성이 강한 고공이 있었다.

또 흉년에 수양(收養 : 먹여 살리는 것)·궤식(饋食)된 대가로 법에 따라 종신토록 수양된 집에서 사역당해야 하는 고공, 즉 ‘수양입안고공(收養立案雇工)’이라 표기할 수 있는 고공도 있었다.

그러나 ‘역리고공’이나 ‘세전관하’는 특수한 직역인(職役人)에게 한정된 수가 주어져 직무를 맡게되었고, 또 흉년에 수양될 경우 대체로 자녀나 노비로 삼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이들의 수는 매우 적어서 일반적으로 고공이라고 하면 ‘앙역무안고공’을 가리켰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와 같은 고공이 크게 증가하면서 고주와의 사이에 형사(刑事) 문제가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중국의 고공과는 그 처지가 다른 고공에게 명률에 규정된 고공률을 적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따라서 1681년(숙종 7) 오랜 기간 고주집에 기식하면서 복역(服役)할 것을 자원한 입안(立案)·입적(入籍)의 고공, 즉 ‘앙역입안고공’이라 표기할 수 있는 고공만을 ‘수양입안고공’과 함께 고공률의 적용을 받는 고공으로 정하게 되었다.

뒤이어 1783년(정조 7)에는 수양한 사람을 고공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또 1786년에는 5년 이상을 기한하고 매년 10냥(兩) 이상의 임금을 받도록 고주와 약정된 사람, 즉 ‘수임입안고공(受賃立案雇工)’이라고 표기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 고공률을 적용받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들만을 법적으로 고공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18, 19세기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고 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래의 고공, 곧 ‘앙역무안고공’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적을 비롯한 공문서에 고공으로 기재되지 못했을 뿐이다.

조선시대 고공에 관해서는 위와 같은 이해 외에도 몇 가지 이견(異見)이 있다. 즉, 새경을 받던 머슴이나 품삯을 받던 날품팔이 같은 농업 노동인구였다는 이해와, 부유한 농가에 계절적으로 고용되어 품삯을 받던 농업 노동인구(短期雇工)였다는 이해가 있다.

그리고 특수한 사정으로 양반·토호들에게 예속되어 임금 없이 사역당하던 농업 노동인구(長期雇工)였다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수교정례(受敎定例)』
『추관지(秋官志)』
『대전통편』
『대명률(大明律)』
『조선왕조의 노동법제』(이종하, 박영사, 1969)
『조선후기농업사연구-농업변동·농학사조-』(김용섭, 일조각, 1971)
「고공연구(雇工硏究)」(박성수, 『사학연구』 8, 1964)
「조선후기의 고공」(한영국, 『역사학보』 81, 1979)
「18·19세기의 고공-경상도 언양현호적의 분석-」(박용숙, 『부대사학』 7, 1983)
「18·19세기 양반토호의 지주경영」(이세영, 『한국문화』 6, 1985)
「十五·十六世紀朝鮮の雇工について」(宮原兎一, 『朝鮮學報』 11, 1957)
집필자
한영국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