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오(聖五). 아버지는 판의금부사 정헌용(鄭憲容)이며, 어머니는 박씨이다.
1858년(철종 9)에 별시문과에 급제해 관계로 나아갔다. 1862년 충청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전임관찰사와 여러 수령의 비리를 밝혀 다스렸다. 그 뒤 홍문관 등에서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지냈다.
1864년(고종 1)에는 참찬관(參贊官)으로서 소대(召對)에 참석해 민본사상과 왕위의 지고함을 강조하였다. 우부승지와 성균관대사성·좌승지·이조참판 등의 요직을 거쳐서 도승지로 재직하던 중 1874년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추천으로 정2품에 올랐다.
이어 공조판서와 형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1884년 함경도관찰사로 부임, 남부 지역의 곡식을 옮겨 도내의 기근을 구제할 것을 건의해 왕의 윤허를 얻었으나 갑신정변을 겪는 와중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2년 후 서울로 돌아와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곧 홍문관제학으로 체임되었다. 1886년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공조판서를 지낸 것을 포함해 호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판서직 외에는 여러 차례 홍문관제학 또는 예문관제학을 역임했고, 판의금부사를 맡기도 하였다.
1890년에는 새로운 관제에 의해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가 되었다. 이 해에 대왕대비 조씨가 승하하자 그 날로 공조판서에 제수되어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제조를 겸직해 산릉역을 주관하였다. 장기간 세자시강원의 좌부빈객·우빈객·빈객 또는 일강관(日講官)으로서 세자의 교육에 참여하였다.
1889년 영조의 묘호를 개정할 때, 1892년 세조·인목왕후의 존호를 추상할 때에 악장문(樂章文) 제술을 담당하였다. 1894년의 갑오개혁 후로는 대체로 종1품으로서 왕태자궁일강관 또는 궁내부특진관으로 관직생활을 했으며, 칙임관2등에 서하되었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행정력이 탁월해 고종대에 문한직과 주요 행정부서의 장관직을 두루 지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