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기서(箕敍). 조병현(趙秉鉉)의 아들이다.
1840년(헌종 6) 유학(幼學)으로서 식년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1842년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시찰하고 실정(失政)한 수령을 보고, 치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도청교리(都廳校理)를 거쳐 1847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1860년(철종 11) 이조참의를 지내고, 1862년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자 왕이 호남의 대소민(大小民)에게 내린 윤음(綸音)을 반포하기 위하여 선무사(宣撫使)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부안 등 각 읍의 난민들의 소요를 막지 못하여 파직되고 말았다. 1864년(고종 1) 실록편찬을 위한 동지실록사(同知實錄事)를 맡았다가 이재원(李載元)과 교체되고, 1866년 형조·예조의 판서와 이듬해 대사헌을 지냈다.
1869년 강원도관찰사로서 선정을 베풀다가 자신의 해직을 상소하였으나 수리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이듬해 치적이 현저하다 하여 인민이 더 재임해줄 것을 요청, 1년 동안 임기가 연장되었다.
1871년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전강원도관찰사로서 강원도에서 시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정사 6조목을 상주하였다. 1874년에는 의정부우참찬·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