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근이 현감으로 부임한 뒤 3년 동안 전세(田稅)를 정액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여 현민들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반민(班民)인 김규진(金奎鎭)이 읍폐(邑弊)를 바로잡을 목적으로 민중 봉기를 선동하는 통문을 몰래 돌렸다.
그 내용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습격, 파괴하고, 마을도 파괴할 것이며, 또한 이에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호로부터 징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통문을 몰래 돌리다 발각되어 구금되자, 4월 7일 외촌에 사는 수천 명이 관내의 이천장(梨川場)에 모여 소요를 일으킨 뒤 읍내로 향하였다.
이들은 먼저 옥문을 부수고 김규진을 비롯한 여러 죄수들을 풀어주는 한편, 관아로 난입하여 전 이방 우학능(禹學能), 전 수교(前首校) 우해능(禹海能), 하리(下吏) 문진기(文瑨琪) 등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군부(軍薄)와 전부(田薄)·환부(還薄) 등을 모두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읍내의 민가 42채도 불태웠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보다 앞서 일어난 진주민란의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한 박규수(朴珪壽)에게 진주의 실정을 자세히 조사한 뒤, 개령으로 향하여 그 곳의 실정을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급하여 안동부사 윤태경(尹泰經)을 대신 파견, 난을 신속히 수습하도록 명하였다.
난이 수습된 뒤, 주동자 김규진·안인택(安仁宅)·이복대(李卜大)와 난에 가담한 이방 문기표(文基杓), 공문서를 소각한 정지평(鄭之平) 등 5명을 효수하였다. 그리고 좌수 권기일(權基一), 수교 조인국(趙仁國)·박경한(朴慶漢) 등 3명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3차에 걸쳐 엄한 형벌을 가한 뒤, 노비로 삼아 먼 섬으로 내쫓았다.
그 밖에도 십 수명을 먼 섬 또는 먼 곳으로 귀양보내거나 중형을 주었다. 또한 김후근에게도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킨 뒤, 전라남도 영광군 임자도(荏子島)로 귀양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