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구민란

  • 역사
  • 사건
  • 조선 후기
1862년(철종 13) 5월 11일 전라도 금구(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에서 일어난 민란.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최진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사)
  • 최종수정 2024년 04월 15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862년(철종 13) 5월 11일 전라도 금구(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에서 일어난 민란.

내용

이날 이북면(二北面)과 낙양면(洛陽面)의 주민 수백명이 환곡이전(還穀移轉)에 따른 폐단을 항의하며 그 시정을 관서에 호소하자, 현령 민세호(閔世鎬)는 이를 단순한 민원으로 받아들여 흥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키려 하였다.

그 때 마침 전라도 지역의 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파견된 호남선무사 조구하(趙龜夏)가 그곳에 도착하자, 수천 명이 그에게 몰려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제출하고, 부당하게 거두어들인 세전(稅錢) 수만 냥을 당장 되돌려주어야 물러가겠다고 하였다.

선무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끝내 해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난폭해진 난민들은 관마를 때려죽이고, 이방 온남구(溫南耉), 구이방(舊吏房) 온평고(溫枰古)의 집을 부순 뒤 관아로 진입하려 하였다.

이에 역졸들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비로소 흩어졌으나, 선무사가 고부에서 전주에 이르자 금구의 난민들이 길을 막고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감영에서는 집사(執事)ㆍ영리(營吏)ㆍ사령ㆍ뇌자(牢子) 등을 금구에 보내어 호위하게 함으로써 전주에 이를 수 있었다.

난이 수습된 뒤 주동자 박용운(朴龍雲) 등은 효수되고, 가담자 가운데 상당수가 하옥되거나 장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조선 후기 삼정문란에 대한 민중저항운동의 한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 『철종실록(哲宗實錄)』

  •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 『임술록(壬戌錄)』

  • - 「1862년 진주농민항쟁(晉州農民抗爭)의 연구(硏究)」(이영호, 『한국사론』19, 1988)

  • - 「1862년농민항쟁연구(農民抗爭硏究)」(오영교, 『손보기교수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1988)

  • - 「1862년 진주농민항쟁(晉州農民抗爭)의 조직(組織)과 활동(活動)」(송찬섭, 『한국사론』21,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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