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민란의 영향을 받아 당시 거창현에서도 전정·군정·환곡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은 부사 황종석(黃鍾奭)이 진주민란을 안핵(按覈)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시규(李時奎)·최남기(崔南紀)·이승문(李升文) 등이 환곡을 비싼 값에 매각하고 다른 고을의 싼 곡식으로 채워 이득을 보는 이무(移貿)와 관아에서 경저리(京邸吏)나 영저리(營邸吏)에게 진 빚인 저채(邸債) 및 환호(還戶) 등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통문을 돌리고 농민들을 모아서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포교의 집을 포함하여 민가 40호를 부수거나 불태웠다.
부사 황종석은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당황한 나머지 말미를 얻어 상경했고,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이 주동자 이시규·최남기·이승문 등 세 사람을 붙들어 대구감영으로 압송하는 길에 그들의 족당(族黨)이 탈취해갔으나 곧 최남기·이승문은 잡혀 진주로 보내져 효수되었고, 포리(逋吏) 신재문(愼在文)·장복영(章福榮) 등은 장형(杖刑)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