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해를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며 난이 발생하였는데, 구체적인 구폐사항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대개 제반읍폐(諸般邑弊)로서 지방관리의 실정(失政)으로 인한 삼정문란과 관련된 내용으로 보인다.
고산 겸임 익산군수의 보고에 의하면 5월 4일 수천명의 농민이 머리에 흰수건을 쓰고 몽둥이를 들고 관문에 모여들어 구폐를 요구하며 밤을 새워 떠들었다고 한다. 또, 전 이방 고용규(高瑢逵), 현 이방 고영규(高營逵)와 병교(兵校) 안상일(安上馹) 등의 집이 습격당하였다.
그 때 서리들의 중간수탈이 혹심하여 여기에 대한 반발이 서리의 집에 대한 훼손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불만과 원한을 해소시키는 행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들의 권익이 관철될 때까지 항거하였다. 난민들은 어사에게 정소(呈訴)하여 각 면의 구폐절목(捄弊節目)을 성급(成給)받고 비로소 5월 6일 오후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