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삼남지방에는 크고 작은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그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농민들이 민자성(閔子成) 등의 선동으로 5월 16일 읍내에 모여 삼정(三政)의 폐해를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부호가에 방화할 뿐만 아니라 참판 심순택(沈舜澤)의 5대조 사우에도 방화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난의 수습을 위하여 충청도관찰사 유장환(柳章煥)을 급히 파견하였다. 난이 수습되자 주동자로 지목된 민자성·유태로(柳台魯)·유상보(柳相輔)·서정호(徐正浩)·진유완(陳有完)·이형하(李亨夏) 등은 효수되었고, 판관 조병문(趙秉文)과 영장(營將) 이종식(李鍾植)은 난을 사전에 제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주가 서울에서 가까운 충청감영의 소재지일 뿐 아니라, 서울과 영남 등 다른 도의 사람들이 가담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반드시 배후에 조종자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색출하도록 지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