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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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의 지방지배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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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향회는 조선시대 양반의 지방지배 기구이다. 향안(鄕案)에 수록된 향원(鄕員)으로 구성되는데, 향원 가운데 선출된 향임의 모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향임 선출과 향안에의 등록, 사족 내부 결속, 이서층의 임면, 부역체제 운영에의 간여 등의 역할을 통해 사족의 공통된 이해를 지키고 수령의 권한을 견제하고 이서층을 통제하였으며 백성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갑오경장 때에 법제화를 시도하였으나 보수적 양반들의 반대로 근대적 향회제도를 실시하지 못하였다. 1907년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일제에 의해 폐지되고 지방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양반의 지방지배 기구.
내용

16, 17세기에는 향안(鄕案)에 이름이 수록된 양반(이들을 鄕員이라고 함.)들로 구성되었다. 향원 가운데에서 뽑힌 향임(鄕任)들의 모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향회의 구조와 성격 · 기능 · 운영 등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향임 선출과 향안에의 등록, 사족(士族) 내부 결속, 이서층의 임면, 부역체제 운영에의 간여 등이었다. 이를 통해 사족의 공통된 이해를 지키고 수령의 권한을 견제하고 이서층을 통제하였으며 민(民)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즉 사족이 한 군(郡)을 지배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최고기구였다.

향회는 조선 후기 양반체제가 무너지면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령의 단순한 부세자문기구로 성격이 바뀌고, 구성원도 사족에서 이향층(吏鄕層)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사족으로 구성된 향회에서 선출되던 향임을 수령이 임면하게 되었고, 향회의 통제 아래 있던 이서층의 임면권이 이서층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행사되었다.

이향층 중 향은 향임층 또는 향족을 의미한다. 이들은 요호(饒戶) · 부민(富民)층으로서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하여 신분을 상승시켜 새로운 지방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경우이다.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는 없었고 다만 지방에서만 양반으로 인정받았다. 이들이 향임에 임명될 때 수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수령에 대한 견제나 이서층에 대한 통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로서 향회도 있었지만 점차 수령과 향회 사이에 대립 ·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향층은 새로운 지배 세력이었지만 전통적인 양반들처럼 면세의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조세를 부담하는 계층(특히 조세부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이었다.

이들이 참여하고 있는 향회에서 바로 자기들이 부담해야 할 각종 조세 및 액수 · 수취 방법 등을 처리해야 했다. 중앙 정부와 수령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되면 향회는 협조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저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향회는 일반민인들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어서 수령의 지나친 조세 수탈에 대해 향회가 저항하지 않을 경우 별도로 민회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요호부민층이 주도하는 향회는 갑오경장 때 법제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 의안에 의해 향회를 제도화하려 하였다. 이때의 향회는 1894년 10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던 조세금납화를 비롯한 새로운 조세 제도를 담당할 지방기구였고 탁지부의 하부 기구였다.

즉, 향회에서 향원을 뽑아 향원이 세금(結錢과 戶錢)을 거두고 지방의 재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향회를 조세행정에 참여시켜 조세(세금의 부과와 징수)를 둘러싼 폐단을 줄이고 국가 재정을 늘리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왜곡, 저지되었다. 이른바 2차갑오경장(을미개혁) 단계에 이르러 이 의안은 시행되지 않았다.

1895년 11월 ‘향회조규(鄕會條規)’에 의해 다시 향회를 설치하려 하였다. 각 지방에 이회 · 면회 · 군회 등 세 등급의 향회를 설치하되, 이회는 동네(30집 기준)마다 두고 한 집에서 한 사람씩 참석할 수 있었고, 면회는 면 단위에 두어 각 이회에서 선출한 대표자들로 구성되며, 군회는 군 단위에 두고 면회에서 뽑은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것이었다.

신분제의 폐지와 함께 참정권이 확대되어 ‘신분’을 기준으로 참정권을 제한하지 않게 되었다. 이회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한 집에서 한 사람씩 참석할 수 있었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에서 신분적 제한을 철폐하였다. 그리고 회의석의 서열은 부역의 많고 적음으로 정하였다.

향회는 교육 · 산업 · 공동작업 · 세금에 관한 사항 등을 처리하도록 구상되었다. 군수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빼앗아 향회에서 뽑은 민선대표에게 주어 세금을 거두도록 되었다. 비록 세금 액수를 결정하는데, 납세자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는 제도는 아니었으나 일단은 세금징수 과정에서 발생되는 각종 부정부패를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

향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군수 · 면장 · 이장이 언제든지 번복(거부)할 수 있어서 이회 · 면회 · 군회가 모두 군수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시기의 행정 체계는 군 단위까지는 중앙에서 장악하고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면 단위 이하에서 ‘자치’를 하는 것이었고, 이 경우의 향회는 군수의 행정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향회 체제는 조선 후기이래 지방 사회에서 발전해왔던 민주주의적 지향이 법제화되는 과정이었고, 지방 사회 차원에서 양반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양반층은 신분제나 과거제의 폐지로 지금까지 누려왔던 여러 가지 정치적 · 경제적 특권(특히 세금을 내지 않던 상태에서 세금을 내야 했다.)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지방 사회의 차원에서 제도화시킨 것이 향회 체제였다.

따라서 양반들은 자신들을 몰락시키는 갑오경장을 결사적으로 저지해야 했다. 을미의병이 그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양반층이 승리, 갑오경장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 결과 보수반동의 경향이 전반적으로 지배하였으며 향회체제는 실시되지 않았다. 양반들은 근대적인 향회제도를 실시하는 것에 반대하고, 그 대신 자신들을 위하여 고안된 향약을 고쳐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향회조규의 향회는 1906년 9월 지방 제도 개편 때 다시 설치가 논의되었다. 이토(伊藤博文)의 지시에 의해 설치되었던 지방제도 조사소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년 5월 일제는 향회가 ‘지방관(군수)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구’라고 하여 폐지하고 그 대신 지방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일제가 향회를 부정하였던 실질적인 이유는 향회체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1907년 재무서의 자문기구로 ‘지방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각 군에 지방 위원을 한 명씩 두었다. 지방 위원은 ‘자산’ · ‘신용’ · ‘지식’이라는 기준에 따라 통감부 관리와 한국인 군수가 협의하여 선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방 위원은 군에서 최고액 납세자(지주), 즉 제일 부자가 뽑혔다. 그리고 지방 위원은 통감부 관리에게 해당 지역의 사정을 알려주어 식민정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렇게 해서 수립, 시행되는 식민 정책이 진정으로 조선인의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선전하였다.

일제는 재무서와 경찰서를 통해 군의 실질적인 행정력을 장악하고 있었는바, 몇 개 군을 관리해야 했던 재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일제는 재무서를 설치하면서 군수 · 향리 · 향임 등 종전의 지방행정 담당자로부터 조세 부과 및 징수에 관한 일체의 서류를 인수받아야 하였는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제는 현지 조선인 가운데 유력자를 앞잡이로 선택해 조세 업무를 쉽게 인수하고 이에 따르는 제반 문제점을 무마하려 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향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많았고, 어떤 지역에서는 더욱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민회(民會) · 민의소(民議所) 등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19세기 내내 계속된 민중 항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봉건지배 체제가 붕괴되지 않고 있었고 또한 식민지화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전제군주제’로는 당시 사회가 직면한 역사적 과제, 즉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국민주권론이 초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국민주권론은 자주 독립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식민지화의 주된 원인이 국왕에게만 주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에게 주권이 있어야 근대화도 자주독립도 이룩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권수호운동과 민권운동이 동시에 전개되었고, 민회 · 민의소 · 군민회(郡民會) 등이 각 지역에 생겨났다.

민회의 주도 세력과 구성원은 대개 부유층이거나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재산의 정도에 따라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고 하여 세금의 액수를 기준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무산자를 대의기구에 참여시키면 무산자가 유산자의 재산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민회로 발전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여전히 향회의 형태로 있으면서 1907∼1909년 사이에 세금인하 투쟁을 벌였고 그 요구가 거절당하자 세금불납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회나 향회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향회나 민회는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발하였고 이에 따라 일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일제는 반일운동을 주도한 민회의 간부를 구속해 민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거나 회비를 받지 못하게 해 재정 압박으로 스스로 해산하도록 하였다. 또한, 서둘러서 민회 단속법령을 제정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제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는 어용단체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로써 조선에서는 부르주아적 정치 제도의 정상적 발전이 사실상 저지되었다. 나아가 조선은 ‘민도가 낮은’ 까닭에 민권을 제도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천부인권설을 부정하고 약자들은 강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거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이익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주장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만들어진 민회나 민의소는 민권을 제도화해 민중의 정치 참여를 보장받으려 하거나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켜 반침략 · 반봉건투쟁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을 받아 거의 대부분 해체당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친일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성부민회’가 좋은 예이다. 이는 일본 황태자의 조선방문(1908.9.)을 환영하기 위하여 당시 한성부윤이 서울시민을 동원하여 1908년 8월에 만들었다. 마치 서울 시민이 자발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유길준(兪吉濬)이 이를 인수, 정비하여 주로 교육 사업에 주력하기도 하였지만, 1909년 4월 한성부민회는 동경에서 한일합병을 청원하였다. 이밖에도 전라남도 나주군민회나 경기도 고양군민회 등은 그 창립 발기자가 앞에 설명한 지방 위원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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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0년 지방행정제도의 변화와 지방자치논의」(이상찬, 『한국학보』 42,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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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895년 지방제도 개혁의 방향-향회(鄕會)의 법제화 시도를 중심으로-」(이상찬, 『진단학보』 67, 1989)
「17세기후반 남원향안의 작성과 파치(罷置)」(김현영, 『한국사론』 21, 1991)
「17·18세기의 제주향촌사회와 그 성격-제주 향안(鄕案)과 천기(薦記)를 중심으로-」(강창룡, 『제주도연구』 8,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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